| | 1571년 희경루, 전라도 관리 포폄 정사 “28일 오시 초에 4사(使, 병사ㆍ좌수사ㆍ우수사ㆍ관찰사)가 희경루(喜景樓)에 모였다. 내가 먼저 오르고 병사(兵使)가 다음에 올라 함께 북벽에 앉았다. 좌수사(左水使)와 우수사가 다음에 올라 함께 동벽에 앉으니 풍악이 울리고 번갈아 술잔을 들었다. 그전에 두 수사가 첨사와 만호의 포폄을 논의했는데, 우수사는 목포(木浦)를 토(土, 5등)로 삼고 어란진(於蘭鎭)을 수(水, 3등)로 삼았다. 나는 임치진(臨淄鎭)이 군졸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어 또한 토(土)로 삼으려 했는데 좌수사는 여도(呂島)를 토로 삼았다. 두 수사가 물러간 뒤에 병사와 마주하여 수령들의 포폄을 논의했는데, 순창을 내가 토(土)로 삼으려 하자 도사(都事)와 병사는 수(水)가 합당하다고 했다.” 장소는 광주목 희경루(喜慶樓). 희경루(喜景樓)로 표기하고 있다. 1571년(선조 4, 신미) 7월 28일. 당시는 음력이니, 양력으로 보면 지금 이맘때. 전라도의관찰사, 병사, 좌수사, 우수사가 모여 수령과, 첨사, 만호에 대한 포폄을 논의하는 정사(政事).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 기록이다. 유희춘은 1571년 2월 4일부터 10월 4일까지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면서 네번의 순력을 하는데 세 번째의 순력 길이다. 포폄(褒貶)은 관료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인사행정제도. ‘포(褒)’는 승진과 포상, ‘폄(貶)’은 강등과 파직을 뜻한다. 포폄은 전최(殿最)라고도 했다. ‘전(殿)’은 공이 낮음을, ‘최(最)’는 공적이 높음을 말한다. 포폄의 시행과정은 평가와 동의, 보고의 3단계였고 보고 이후 해당 관리에게 성적을 공개하였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각 자급(資級)마다 일정한 기간을 근무해야 한 급씩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이를 사만 승자(仕滿陞資)라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과성적과 포폄성적이 좋아야 했다. 경관과 외관에 대한 포폄은 매년 6월과 12월에 한다. 경관은 해당관청의 당상관이, 외관은 관찰사와 병사와 수사가 상의해 포폄을 한다. 다만, 제주와 대정, 정의 세 고을은 제주목사가 등제를 매겨 관찰사에게 보고한다. 이어진 7월 29일 기록을 보자. 이때는 동헌에서 정무를 본다.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병사와 수사는 작별을 한다. 도사와 함께 수령들의 포폄을 최종 결정한다. “나는 도사와 더불어 포폄을 정했는데, 영암군수 문익성(文益成), 순창군수 우세신(禹世臣), 용안현감 김호(金鎬)를 하등(下等)으로 삼았다. 장성 수령 최적(崔迪), 화순 수령 홍창(洪閶), 동복 수령 김눌(金訥), 흥덕수령 송주(宋宙), 태인 수령 현구(玄球)를 중등(中等)으로 삼았다.” 정리하면, 신미년 춘하 전최는 전라도 관찰사의 순력에 맞추어 광주목에서 병사와 좌·우수사가 모여 7월 28일에 실시한다. 이때 수령은 전라도 57관 가운데 54관. 그리고 전라우수사가 관할하는 임치진첨사와 목포만호 등 5인, 가리포진첨사와 어란포만호 등 6명, 전라 좌수사가 관할하는 방답진첨사와 녹도만호 등 4명이다. 외관 54명, 무관 18명, 도사(都事)를 포함 모두 72명이다. 첨사와 만호 등 무관에 대한 포폄의 평가자는 병사와 수사, 관찰사는 동의자이다. 수령에 대한 평가는 관찰사가 평가자, 병사가 동의자다. 위 두 기록에서 언급된 몇 곳의 수령과 무관의 평가는 관찰사와 병사의 의견이 달랐다. 순창군수는 병사가 높은 점수를 주려 했으나, 낮은 점수를 주장한 관찰사의 의견에 따라 하등급. 평가자인 관찰사의 의견이 반영된다. 첨사와 만호의 평가는 동의자인 관찰사의 의견보다는 평가자인 좌·수사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1567년 기년작 계회도, 희경루 방회도 저 포폄 정사 바로 앞선 기록으로 희경루 방회도(喜慶樓榜會圖)가 있다. 1567년(명종 22)이다. 1546년(명종 1)의 증광시 문과 급제 동기 등이 급제 21년만인 1567년 광주의 희경루에서 만나 방회를 갖고 제작한 것이다. 기년작(紀年作) 계회도로 가치가 평가되어 2015년 보물이 되었다. 동국대박물관 소장. 참여자는 광주목사 최응룡(崔應龍, 1514~1580), 전라도관찰사 강섬(姜暹, 1516~?), 전 승문원 부정자(林復, 1521~1576), 전라도병마우후 유극공(劉克恭), 전 낙안군수 남효용(南效容) 다섯 사람. 최응룡은 장원, 임복은 을과 6등, 강섬은 병과 2등을 하였다. 유극공과 남효용은 문과 방목에는 보이진 않는다. 발문에 “동년(同年)”이라 한 것을 보면 무과 급제자로 보인다. 주관자는 전라도관찰사 강섬. 동방으로 영광군수 윤홍중(尹弘中, 1518~1572)과 광양현감 육대춘(陸大春)이 지방관으로 있었다. 방회도 화면은 전서체의 표제, 계회장면, 좌목(명단), 발문으로 구성되었다. 좌목에는 품계와 관직, 성함, 자, 본관, 부친 관직과 함자를 기록하였다. 최응룡이 지은 발문에는 과거 합격 동기생들이 근무지를 따라 흩어진 뒤 못 만난지 20여년이 되었음을 회고하면서, 그 동안의 그리움과 만남에 대한 감회를 적어, 함께 첫 발을 내디뎠던 동료간의 친밀한 공감대가 엿보인다. 다섯 사람의 앉는 위치도 적었다. 축대를 쌓은 대위에 1층은 기둥을 세우고, 2층에 누를 올린 희경루 안에는 모임의 주인공들과 여러 기녀들이 자리한 가운데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다. 담장, 민가, 전정과 활터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래층에는 하인, 피리 부는 악공, 축대 아래쪽에는 나장과 같은 군졸이 서있다. 포폄과 같은 정사 외에도 문헌에서 희경루 제영이 20여편이 확인된다. 교화류와 인정류로 나눌 수 있다. 교화류는 사객(使客)이나 관인들이 왕화(王化)를 수창한 제영. 이선제, 이석형, 성임, 허종, 유순, 김종직, 소세양, 송인수 등 8편. 이들은 또 명의 사신과 수창하기도 한다. 민간의 누정 제영과는 다른 형상화이다. 인정류는 지역출신이나 친분있는 이들이 애향과 교유를 읊는다. 송순, 임억령, 임제, 백광훈 등. 전라도의 요충[一道之衝] 광주, “함희상경(咸喜相慶)” 희경루는 1451년(문종 원년)에 지은 관영 누각이다. 광주목은 1430년(세종 12)에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복호되었는데, 마침 짓고 있던 누각이 완공되자 희경루로 명명하였다. 강등과 복호, 희경루 명명은 긴 사연이 있다. 1430년에 토성품관이 광주 목사를 구타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읍호가 강등된다. 이 강등은 1420년(세종 2)에 제정된 ‘부민고소금지법’의 시행세칙으로 1429년(세종 11)에 수교가 확정되는데 광주 강등이 첫 사례이다. 읍호 강등은 광주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서 처음으로 겪은 강등 조치였고 계수관마저 장흥도호부에 내주고 말아서이다. 계수관은 중앙과 지방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행정기구로서 도의 지시를 관할하는 군현에 전달하면서 군현을 통할하기도 하였다. 광주 읍호강등은 수교 반포 이래 처음 적용되어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광주가 사례로 언급되었다. 더군다나 “사건의 발단이 애매하여 위로는 산천의 귀신과 아래로는 향촌의 부로와 아이들까지 모두 억울함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도 능히 그 일을 호소하지 못한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는 기록처럼 읍호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451년(문종 원년) 여름에 순성군 이개(李𧪚, ?~1462), 전 중추 이맹진(李孟畛, 1374∼1456), 전흥(田興, 1376~1457), 우참찬 안숭선(安崇善, 1392년~1452), 이조판서 권맹손(權孟孫, 1390~1456), 인순부윤 김청(金聽, ?~1462), 전 동지중추원사 유맹문(柳孟聞), 예문 제학 이선제(李先齊, 1390~1453) 등이 논의하였다. 필문 이선제가 중심 된다. 이개와 좌의정 황보인 등은 “토지의 광대함과 인물의 번창함이 서남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서 실로 전라도의 한 도회소(都會所)”로 “구호(舊號)로 회복하도록 허가하여 경신(更新)할 길을 열어 주소서."라 상언한다. 유향 품관과 인리(人吏) 등도 또한 상언한다. 이같은 노력으로 6월 7일 에 광주목으로 복호된다. 양력으로 7월 5일. 이때에 마침 짓고 있던 누각이 낙성되니 고을의 어른들이 태수(안철석)에게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한다”는 “함희상경(咸喜相慶)”의 뜻을 담아 “희경(喜慶)”으로 누의 이름을 지어 이 기쁨을 기념하고자 청하였다. 이에 따라 “희경루(喜慶樓)”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필문 이선제는 「희경루원운」에서 “노소가 흔연히 경사스러움을 기뻐하니, 끝없는 이 즐거움 해마다 이어지기를[老少欣然然喜慶 願令此樂樂年年]”이라 읊었다. 신숙주(1417~1475)의 ‘희경루기’를 통해 경관을 읽을 수 있다. “이에 재목을 모아 집을 짓되 옛 건물보다 더 크게 하여 몇 달이 채 안되어 준공을 하였다. 건물의 칸 수는 남북이 다섯 칸이고 동서가 네 칸인데 넓고 밝으며 장엄하여 동방에서 으뜸가는 누가 되었다. 동쪽으로는 큰 길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대숲이 내려다 보이는데 누의 북쪽에 못을 파 연을 심고 따로 동쪽에 활터를 만들어 관덕(觀德)의 장소로 만들었다.” 1571년 7월 28일 포폄 정사는 희경루에서, 7월 29일의 평가는 동헌에서 이루어짐을 보았다. 이렇듯 희경루는 광주목의 관영 누각으로서 정무를 보는 관아 건물이다. 일반적인 민간 누정의 제영풍류와는 구분되는 기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관영 건조물의 외형으로서만 아니라, 그 공간과 관련된 역사 문화 관련 사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희경루 “복원”과 “중건” 논의는 오래이다. 원래 자리는 동구 충장로 광주우체국 곁이다. 1914년 무렵까지 있었다. 도시화된 원위치와 가까운 광주공원 한켠 시내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새로 짓기 시작하였다. 외형과 공간으로 보자면 “중건”이겠지만, 그 공간에서 행해졌던 “정사”와 “의례” 등을 “복원”하여 재현할 필요가 있다. 저 희경루가 준공 된 이후 지자체의 인사위원회, 시민대상 시상식을 이곳에서 하면 어쩔까. 훌륭한 뜻을 가진 젊은 인재를 선발하고, 지역을 위해 귀감이 되는 향인을 포상한다면, 그 자리가 희경루라면, 누구나 이를 환영하고 박수를 친다면, 이 또한 “함희상경(咸喜相慶)”이 아니겠는가. “어찌 다만 특별히 한 누각에 그칠 뿐이며 한 고을에 그칠 뿐이랴.” 참고문헌 윤진영, 2002,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喜慶樓榜會圖」 고찰」, 『동악미술사학』3, 동악미술사학회 천득염·김민주, 2010,「광주목 희경루의 복원 연구」, 『건축역사연구』19-6, 한국건축역사학회 김영국, 2015, 「광주목 희경루와 그 제영」, 『한국언어문학』93, 한국언어문학회, 조광현, 2016, 「조선후기 외관의 포폄제도와 포폄문서 연구」, 『고문서연구』 49, 한국고문서학회 김덕진, 2019, 「15세기 광주목 읍호승강과 희경루」, 『조선시대사학보』 9, 조선시대사학회 조광현, 2020, 「『眉巖日記』를 통해 본 16세기 양반관료의 근무평가와 인사이동」, 『고문서연구』 57, 한국고문서학회 필문이선제선생기념사업회·향토문화개발협의회·광산이씨대종회, 2021. 5. 24, 『광주목의 복호와 희경루의 역사 활용 방안』 (학술대회)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