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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四端)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씨를 이르는 말이다.
四 : 넉 사(囗/2)
端 : 실마리 단(立/9)
단(端)은 실마리의 뜻으로, 사람의 본성(本性)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씨란 뜻이다. 곧, ①인(仁)에서 우러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②의(義)에서 우러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③예(禮)에서 우러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④지(智)에서 우러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이다.
사단(四端)은 맹자에서 나온 말이다. 단(端)은 끝이란 뜻인데, 그것은 처음 시작되는 끝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 단서를 찾았다고 할 때의 단서와 같은 뜻이다. 우리말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보통 사단(四端)이라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 네 가지를 말한다. 맹자(孟子)의 이 사단론(四端論)은 성선설(性善說)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에서 출발한다. 맹자(孟子) 券3 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맹자(孟子)가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선왕들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남을 차마 해하지 못하는 정사(政事)를 하였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남을 차마 해하지 못하는 정사를 행하게 되면 천하 다스림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孟子曰 :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之掌上)."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 느닷없이 어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다 깜짝 놀라며,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마음이 들 것이다(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출척惻隱之心).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제하려 해서가 아니며, 동네 사람들과 벗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며, 그 아이를 구하여 주지 않았다는 나쁜 평판이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이 일로 미루어 생각하면,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측은(惻隱)해 하는 마음은 인(仁)의 실마리요(惻隱之心, 仁之端也); 불선(不善)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실마리요(羞惡之心, 義之端也); 사양(辭讓)하는 마음은 예(禮)의 실마리요(辭讓之心, 禮之端也);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실마리이다(是非之心, 智之端也).
사람이 네가지 단서(四端)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四端)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仁義)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하는 자이며, 또 자기 임금더러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하는 자이다(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무릇 나에게 있는 이 사단(四端)을 모두 미루어 넓혀 채울 줄 안다면,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 솟아 오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만일 채울 수 있다면 온 천하를 편안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그것을 채우지 못한다면 제 부모조차도 섬기지 못할 것이다(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네 가지의 덕(四德)이라고 하며, 이것들의 발단(發端)이 되는 네 가지의 마음씨를 사단(四端)이라 한다. 즉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등을 말한다.
천년전(千年前) 사람이나 백년전(百年前) 사람이나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이나 결국은 같은 사람이다. 다른 말로 인간이라고 하며 땅위에 존재하는 동물이나 식물과는 같이 있되 구별되는 정신적 존재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인격 즉, 사람됨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체적으로 동물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정신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학습을 통해 유치한 단계에서 인격을 가지는 성숙한 단계로 발전한다.
우리의 선대(先代)는 그 학습의 줄기를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가르침에서 찾았고 그 대표적인 것이 유교문화의 발전과 정착이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라 해도 그 외모가 어떠하든 속에는 유교문화의 기준이 남아 있고 그 틀안에서 생활하는게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 인생의 통과 의례인 관혼상제(冠婚喪祭)에서 그렇다.
말하자면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정체성에는 오래동안 유형, 무형으로 학습된 공자,맹자의 가르침이 남아 있고 그 가르침으로 형성된 인격들이 사회적인 연대를 가지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다. 모든 현대인은 어느 나라, 어떤 공동체를 막론하고 다양성의 시대를 산다. 일상을 사는 환경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도 자기의 뿌리가 되는 정체성 안에서의 다양성이다.
그 하나의 예가 민족성(民族性) 일 것이다. 뿌리가 되는 정체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잘 보전돼야 하고 훼손 되었다면 보강해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정체성을 상실하면 정신적으로 표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성에서 살수록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성찰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튼튼한 뿌리위에서 분명한 정신적 기반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다.
맹자(孟子)는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이며, 그의 언행을 기록한 책을 부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산동성 출신으로 공자(孔子)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이란 뜻으로 아성(亞聖)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자의 사상을 이으면서 이를 다시 명확하게 체계화 했고 인간성에 대해서는 성선설(性善設)을 주장했다.
조선말기,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은 9권 3책으로 맹자(孟子)를 주석(註釋)한 맹자요의(孟子要義)를 쓴 바 있으며, 이퇴계(李退溪)는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 맹자(孟子)의 실천도덕(實薦道德)의 근간인 사단(四端) 을 인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맹자(孟子)의 사단(四端)은 우리가 가진 국민적 정체성과 정서에 그만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上篇)에서 사단(四端)을 인간의 본성(本性)에는 네가지 마음씨가 있다는게 그 전제(前提)다.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가 그것이다.
인(仁)은, 애정을 남에게 미치게 하는 도덕적 심정으로 유교의 가장 중심적인 정치, 도덕적 이념이다. 윤리적인 모든 덕(德)의 기초로 이를 확산시켜 실행하면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의(義)는, 도의(道義)의 준말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바른 도리를 이르는 말이다. 예(禮)는, 경례(敬禮)의 준말로 경례는 공경을 나타내는 행동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것이 사람끼리 나누는 인사와 예의(禮義)다. 지(智)는, 지혜(智慧)이며 이는 사물을 인식하고 시비(是非), 선악(善惡)을 가리는 능력을 뜻한다. 사단(四端)은, 이 네가지 바탕에서 우러나는 인간의 심리를 나누어 설명하는 말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남을 사랑하여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맹자(孟子)라는 책에는 "사람들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하다. 이제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다 놀라고 불쌍한 마음을 가진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 함도 아니며, 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러는 까닭도 아니며, 그 원성을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자는 사람들은 다 차마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앞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어린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워 근심하고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반드시 달려가 구하려고 하는데, 이는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근본 마음이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수오지심(羞惡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불의(不義)를 부끄러워 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수(羞)는 자신의 불선(不善)을, 오(惡)는 남의 불선(不善)을 부끄러워 함을 말한다. 즉 불의(不義)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不義)를 보면 아 저건 나쁜거구나 하면서 느끼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이다. 이것은 사단(四端)과의 관계로 볼 때, 의(義)의 단서(端緖)가 될 수 있다.
사양지심(辭讓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서로 양보(讓步)하고 공경(恭敬)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사단(四端)과의 관계(關係)로 볼 때 예(禮)의 단서(端緖)가 될 수 있다.
시비지심(是非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한자를 더 쉽게 풀이한다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린다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사단(四端)과의 관계(關係)로 볼 때 지(智)의 단서(端緖)가 될 수 있다.
불쌍한 사람을 측은히 여기고,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옳지 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 할줄 알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되 옳고 그른일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는 것, 이런 태도를 가지고 복잡 다양한 현대사회를 살아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사단(四端)은 고리타분한 옛것이 될수도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더 그럴 수 있다.
법(法)을 기준할 때, 감옥에 들어앉아 있는 기결수들은 법적 판단에서 함께 살수 없는 불량인간들이다. 그래서 격리시키는 것이다. 법이 무엇인가. 국가의 강제력이 따르는 온갖 규범이 법이다. 그리고 그 법의 정신은, 그 규범들의 내용들은 올바름을 기준하는 것이며 그 안에는 사단(四端)이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실정법(實定法)은 어기지 않았다 해도 법의 정신을 어긴 사람은 사단(四端)을 외면하고 사는 감옥밖의 불량인간이라고 할수 있다. 바로 여기에 사단(四端)의 중요성이 있다.
인간이 인격을 가지고 사회공동체 안에서 건전하고 건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정신의 학습이 계속되어야 한다. 사단(四端)을 문자적으로 지키면서 살기는 어렵다 해도 그 정신을 높이 평가해야 하고 그 가르침들은 지금도 인간에게 필요한 자양분이다. 특히 지금처럼 겉은 점점 더 현란해 지고 속내는 텅텅 비어가는, 천박해 지는 세태에서는 사단(四端)의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갓을 썼던 사람이나 휴대폰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나 똑같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인간에게는 인간이 될 수 있는 정신적 내용이 있어야 한다. 사단(四端)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사유가 그러하다. 지금은 모두가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더 차지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살아야 하는것은 삶의 조건에서 지나친 경쟁이 가져오는 심적, 육체적인 피해가 생각보다 크다는 점이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가져 온다. 스트레스는, 몸에 해로운 정신적, 육체적 자극이 가해 졌을때 그 생체가 나타내는 반응이다. 말하자면 스트레스는, 압력(壓力), 억압(抑壓), 압박(壓迫), 긴장(緊張)같은 해로운 정서에 쫓기는 상태를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질수 없는 일에 대해 가지는 강박관념이 자기의 몸에 이상반응을 나타내며 그 대표적인, 가장 많은 질병이 현대의학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각종 암(癌)이다. 현재 치료중인 환자의 70% 이상이 그 발병 원인이 스트레스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 하나의 무서운 성인병인 당뇨(糖尿)도 마찬가지다. 암(癌)이나 당뇨는 일단 정상적인 삶이 끝났다는 하나의 선고(先姑)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현대는 소유가 곧 부자(富者)인 시대는 아니다. 정신도, 몸도 건강하게, 건전하게 사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다. 삶의 기본적인 조건들이 해결된 시대에서 더 소유 한다는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돈을 경멸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태도다. 돈이 얼마나 좋은것인가. 그러나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돈은 악(惡)이다. 소유는 그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현대는 그래서 자기를 다스리면서 살아야 한다. 내 처지와 수준, 현주소를 알고 살면 된다. 이때 꼭 필요한 교과서가 사단(四端)이다.
공자왈 맹자왈은 결코 고리타분한 수구꼴통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영원한 가르침이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인간실존은 그 근본에서 언제나 똑같다. 사람이 원숭이가 된 적은 없지 않은가. 똑같이 시대에 관계없이 위대한 가르침은 그대로 위대한 가르침이다.
사단칠정(四端七情)
인간의 네 가지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心]과 일곱 가지 감정[情]을 가리키는 유교 용어이다.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감정)으로서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착한 본성(德)에서 발로되어 나오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단서라고 이름 붙였는데, 단(端)이라 함은 선(善)이 발생할 가능성을 가진 시초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의 용어로서 '맹자' 공손추편(公孫丑篇)에 나온다.
측은지심은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마음, 수오지심은 부끄럽게 여기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 사양지심은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은 선악시비를 판별하는 마음이다.
맹자에 의하면 이 사단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선천적인 도덕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이것을 확충함으로써 '인의예지'의 덕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측은지심의 경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그 아이를 끌어안고 구하려는 마음이 순수하게 발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소박한 자발적인 행위를 보면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단설은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근본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주체 내지 도덕적 규범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칠정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인데, '예기' 예운편(禮運篇)에서 비롯하여 당(唐)의 한유(韓愈)가 원성편(原性篇)에서 7정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이것은 중국 고대에서 오래 전부터 있던 사상으로서 인간이 외부 사물에 접하면 여러 가지 정이 표현되는 심리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중용'에는 희로애락의 발현(發) 이전을 '중(中)',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화(和)'라 말하고 있는데, 결국 칠정은 여기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심리의 숨김없는 현실태를 총칭한 것이다.
이렇게 사단과 칠정은 별도로 주장된 것인데, 송대에 성리학이 성립되면서 이른바 사서(四書) 중심의 학풍으로 바뀌자 맹자의 사단설이 중시되고, 아울러 사단에 대립되는 개념인 칠정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자에 있어서는 사단과 칠정을 조선조 성리학에서처럼 첨예하게 대립시켜 상세하게 논의하지는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간의 논쟁 이후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논쟁을 거쳐 한 말에 이르기까지 조선조 주자학자로서 이 사단칠정에 대해 한마디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한국 성리학 논쟁의 중요 쟁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칠론에 존재론적 범주로 사용되던 이(理)와 기(氣)의 개념이 도입되고,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라는 개념이 함께 논의됨으로써 그 논쟁이 한층 복잡하게 되었다.
주자는 "사단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고 하였다. 또 주자는, 제자가 "희· 노· 애· 구· 애· 오· 욕은 칠정이므로 그것은 인간 본성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입니다만, 노(怒)는 수오지심에서 발현되어 나오고, 희 · 애 · 욕은 모두 측은지심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은데 대하여, "애· 구는 어디에서 발현되어 나오는가? 아마 측은지심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구(懼)는 두려운 마음이 심한 경우이다. 그러나 칠정을 사단에 일대 일로 나누어 배속(비교) 시킬 수는 없다. 칠정은 그 자체가 사단 속을 꿰뚫어 지나가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취지로 칠정은 사단에 배속시키는 문제를 물은 데 대하여, "대략 서로 비슷한 것과 갖다 붙여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거나 "본디 사단과 칠정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긴 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주자는 "측은· 수오도 중절(中節: 절도에 맞음)과 부중절(不中節: 절도에 맞지 않음)이 있다"며, "사단은 시시로 발현하는데 거기에 정(正)· 부정(不正)이 있다"라고 하여 사단도 그 발현에 있어서는 절도에 맞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단도 인간 본성에서 발현되어 나온 감정이기 때문에 그 나타난 현 실태를 보면 중절· 부중절과 정· 부정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사단칠정을 둘러싼 논의는 처음에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 뒤 이이가 기대승의 설을 지지하고 이황의 설을 반대함으로써 그 논의는 확대되어 성리학 논쟁의 핵심 문제로 등장, 사단· 칠정뿐 아니라 이기론(理氣論) 및 정치 사회관에 이르기까지 두 유형의 사고 방식의 대립을 보이게까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주리학파(主理學派)· 주기학파(主氣學派)로 학파가 나누어 그 뒤 많은 학자들이 학파적 관심을 가지고 토론하였다. '주리'· '주기'의 문구는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서 각각 도덕론적 입장과 존재론적 입장을 상징하고 있다.
즉, 주리· 주기의 차이의 시원은 인간의 측면에서 자연을 해명하려는 입장과 자연의 측면에서 인간을 해명하려는 입장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이 두 관점의 혼재는 성리학의 본래적인 특성, 즉 자연법 사상의 특성으로 흔히 천인합일(天人合一) 또는 '물리(物理)= 도리(道理)'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황 이전에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설(天命圖說)에서 "사단은 이에서 발현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하였는데, 이 문구를 이황이 개작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기대승이 "칠정 이 외에 달리 또 사단이라는 정이 없다"라는 생각에서 이황에게 해명을 요구함으로써 문제가 발단되었다.
그 후 이황은 자기설을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하는데 기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는데 이가 거기에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질문을 계속하여 논쟁이 수차 계속되었으며, 퇴계 사후에 이이가 기대승의 설을 지지하여 칠정은 사단을 내포한 것이며 사단도 기발이승(氣發理乘)일 뿐이라고 하여 이른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이황은 "대개 사람의 몸은 이와 기가 합하여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가 서로 발용(發用)하고 서로 필요로 한다. 호발(互發)하므로 각각 주(主)된 바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서로 필요로 하므로 서로 그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칠정 대 사단으로 분별하여 말하면 칠정의 기에 대한 관계는 사단의 이에 대한 관계와 같다. 또 사단도 물(物)에 감(感)하여 동(動)함은 칠정에 있어서와 다름없으나 다만 사단은 이가 발현하는데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는데 이가 타는 것이다"라고 하여 사단· 칠정 논의를 통하여 이· 기가 상호발현(互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이황은 주자 학설 중 이와 기는 전연 별개라는 이른바 이기부잡(理氣不雜)의 면을 강조하여 이(理)를 작용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이와 기를 귀천(貴賤) 관계로 파악하였다. 즉, 이황은 이는 이성(理性), 기는 감성(感性)으로 보았으므로 이가 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이욕(利欲)에 떨어져 짐승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황은 사단· 칠정을 각각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에 견주어 선악으로 대립시켜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황에게 있어서는 주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기의 귀천 관계 내지 기에 대한 이의 제어라는 의미의 우열 관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가 우주론에서 이(理)는 작용하는 것으로 본 사고와 표리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즉,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이 · 기를 도덕론을 중심으로 보려 하는 것으로 여기에 그의 성리학의 특색이 있다.
그러나 주자의 "사단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라는 명제 및 정지운의 "사단은 이에서 발현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한다"는 명제는 본래 이· 기를 대략 선악의 의미로 보아 그 개념을 빌려 사단과 칠정을 논하려고 하였던 소박한 입론(立論)이었다.
그런데 퇴계가 이를 "사단은 이발이기수지, 칠정은 기발이이승지(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고침으로써 발(發)에 더욱 강조점이 옮겨지게 되고, 또 수(隨) 자와 승(乘) 자를 대치시켜 은연중 이(理)를 강조하려는 생각을 표현하게 되어, 결국 존재론적 개념인 이· 기의 개념에 혼란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즉, 이(理)는 발현할 수 없는데, 이러한 능동적 발현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이· 기 개념으로는 그의 도덕론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위의 명제에서 나타난 그의 사상적 특성과 그의 언어 사용상의 착오와 한계는 구분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퇴계의 입론에 담긴 사상의 특성을 잘 알 수 있다.
이황의 이발론(理發論)과 관련하여 고려할 점은 성리학의 심성구조론(心性構造論)인 '성이 발현하여 정이 된다(性發爲情)'라는 명제다. 이는 성 · 정을 본체와 작용으로 나누어 심성의 구조를 말한 것으로서 성(性)의 본체의 운동이나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황의 '사단은 이(理)의 발현(發)'이라는 입론에서의 발(發)의 의미와는 언어상의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황의 '이발론'은 왕수인(王守仁)의 심즉리(心卽理)가 '심을 이에 합치시켜라'라고 하는 수양론적 의미가 강한 것과 같이 '이가 기를 제어하여 금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론적 강령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이황의 이러한 주리적 사고는 그 뒤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왕양명과는 다른 '심즉리' 설을 주창하게 되는데, 이는 주리적 사고의 필연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이는 이황이 사단을 이(理)의 발현 즉, 이성적 작용으로 파악한 데 대해 이성적 작용도 작용인 이상 기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이는 무위(無爲)라는 주자의 설을 계승, 존재와 도덕을 일괄하여 이· 기 관계를 이른바 '기발이승일도설'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사단과 칠정의 관계는 칠정은 기의 발동의 총칭이므로 사단은 칠정에 포함된다고 본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은 본연지성(本然之性)· 기질지성(氣質之性)과의 관계와 같다. 본연지성은 기질을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며, 기질지성은 도리어 본연지성을 겸한다. 그러므로 사단은 칠정을 겸하지 못하나 칠정은 사단을 겸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인심· 도심은, 이황에서처럼 대립적이기는 하나, 그것이 사단· 칠정과 같은 대립 관계는 아니라고 하였다.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주장에서 이이는 다시 칠정과 사단을 비슷한 것끼리 연결시켜, 측은은 애(愛)에, 수오는 오(惡)에, 공경은 구(懼)에, 시비는 '희로(喜怒)의 당연성 여부를 아는 것'에 배속시킨다.
그러나 주자는 칠정과 사단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 성격상 나누어 붙이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이의 '사칠배속'은 그의 '기발이승일도설'의 필연적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지나친 천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칠정의 선한 것과 사단은 다르기 때문이다. 사단은 도덕의 표준이라는 성격을 갖는 것이므로 칠정의 선한 것과 같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이는 존재론의 입장에서 도덕률을 규정하려고 하였으므로 '천지의 변화(天地之化)'는 바로 '내 마음의 발현(吾心之發)'이라고 하여 천지에 이화(理化)· 기화(氣化)의 구분이 없다면 우리 마음에도 이발· 기발이 없다고 하였다.
이이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의 명제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즉, 기는 물질적· 시간적 유한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국(氣局)이고, 이는 초월적 존재로 보편적 존재이기 때문에 시공(時空)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통(理通)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기발이승일도설'은 더 나아가 심시기(心是氣)를 주장하게 되고, 이 설은 그 뒤 주기학파의 송시열(宋時烈)· 한원진(韓元震) 등에게 계승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사칠 논쟁은 이황과 기대승과 이이의 초기 논쟁에서는 이황의 '발(發)' 개념의 오해, 이이의 사칠배속의 천착 등으로 개념상의 혼란이 야기되어 논쟁의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았다. 더욱이 존재론적 시각(사실의 차원)과 도덕론적 시각(가치의 차원) 상호 간의 입장 이해가 전제되지 않아 논쟁이 언어상의 논쟁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 뒤 많은 학자들이 다시 논의함으로써 개념이 다시 분석, 정리되어 이황과 이이의 사고 방식이 점차 명료하게 되어 갔다. 물론 이 논쟁의 시원적 원인은 자연법 사상으로서의 주자학 자체 내에 있었다. 즉, 존재론의 차원에서는 이(理)가 무위(無爲)이면서 도덕론에서는 '사단은 이의 발현'이라 하였고, 사단은 본성의 발현으로 순선무악(純善無惡)하다고 하면서 사단에도 '중절과 부중절' 또 '정과 부정'이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유학 사상사에서 사단칠정론은 성리학 이론 논쟁의 핵심이지만 이것이 사상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보는 두 유형의 사고정형(思考定型)으로서 이황의 이상주의, 이이의 현실주의를 형성하였다.
어머니와 사단(四端)
조선 중기, 50세가 넘은 노학자 퇴계(退溪)와 갓 출사한 30대의 기대승은,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인간 본연의 심성인 사단(四端)은 리(理)에서 발현하는 것이지만, 감정적 요소인 칠정(七情)은 리(理)에서 발현되는 것이냐, 아니면 기(氣)에서 발현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상(現象)이 발현(發現)된 근본에 관한 시비였습니다. 어떻게 사단에 따라 행동하고 칠정을 다스릴까 하는, 실천적 문제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그 발현처가 하늘이냐 땅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리에서 기로 발현된 현상계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 논쟁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현실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담론이었을 것입니다. 대체, 현상의 발현처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에 이런 논쟁에 열중하였을까요? 고담준론을 즐기던 선비들은 이를 대단한 논쟁으로 여기어 토론했고, 학당에는 지금에도 회자합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나중에 정치적 파당(派黨)을 만드는데 기여했을 뿐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하교하고 무심히 집에 들어서던 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다시 뛰쳐나갔습니다. 우리 집 대청에 어떤 문둥이가 앉아, 상에 차려진 밥을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문둥이는 사람을 잡아서 간을 빼먹는다는 무서운 소문도 있었고, 그 추한 모습 때문에 집에 들이기를 모두 꺼렸습니다. 그런데 그 문둥이가 우리집 대청에 앉아 멀쩡히 차려진 밥상을 받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집안을 살펴보니, 어머니는 이쪽 마루 끝에 앉아 식사 중인 문둥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나병환자가 집을 나갔겠다고 짐작되는 무렵에 집으로 들어갔더니, 어머니는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앉아 재로 그릇을 닦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그릇들이 어머니가 나병환자에게 차려준 밥상에 올랐던 그릇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왜 문둥이를 왜 집에 들이어 밥을 차려주느냐?"며 화를 내며 항의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는 어머니는 그릇 닦던 손을 내려놓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는 게 아니다! 배고픈 사람이 찾아왔는데 어찌 그냥 내쫓나? 그 사람인들 그런 병에 걸리고 싶어 걸렸겠나, 어쩌다 운수가 나빠 그런 것이지….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는 것이니 사람 업신여기면 못쓴다."
어머니 말씀이 하도 무겁게 들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밥을 빌려 오는 사람들, 우리가 거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축담 아래 서서 밥을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꼭 그들의 그릇을 채워 보냈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밥이 없어 굶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허기가 진 사람들에게는 밥 한 그릇이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야 그날 어머니가 그 불결한 문둥병 환자를 대청마루에 앉혀 놓고 밥상을 차려준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아 허기가 진 문둥이가 찾아오자, 어머니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여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청으로 불러올려 밥을 대접했던 것입니다. 아직 어렸던 나는 그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문둥병 환자에게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정이, 유일한 필요였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 선비들은 높은 관을 쓰고 사단칠정을 논쟁했지만, 사단(四端)이 대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시는 어머니는, 그 사단을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연민을 가슴에 안고 사셨던 것입니다.
맹자의 사단(四端)과 대한민국 정치
맹자는 사람은 무릇 네 가지 선함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그 네 가지는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을 보면 가엾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자신의 그릇됨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착하지 않음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그리고 맹자는 군주는 자신의 선한 네 가지 양심만 따라도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이 있기는 한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아마도 대한민국이 더 훌륭한 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연일 정치권은 국민에게 실망감만 안겨주고 비난만 받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에 본고에서는 맹자의 사단에 비추어 대한민국 정치가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을 정치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국민의 정서를 자극하는 사회적 이슈가 발생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슬픔을 나누고, 재발 방지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슬픔에 처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인간의 측은지심에 비추어 너무나도 당연하고 올바른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이슈가 지나가면 해당 사건에 대한 반성과 교훈은 기억 속에 묻힌다는 것이다. 위안으로 삼자면 재발 방지법이라는 이름 아래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재발이 될법한 허점투성이 법을 만드는 것이 전부이다. 솔직히 그런 법 중에는 엄밀히 말해 재발 방지법이라 할 수 없는 것도 많다. 왜냐하면 많은 법이 처벌을 강화하는 법이지 재발을 방지하는 법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는 단순히 정치적 마케팅이지 진심으로 우러나온 측은지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둘째 대한민국의 국회는 수오지심이 사라지고 내로남불이 만연하고 있다.
요즘 정치인들은 자신의 그릇됨은 모두 정치적 탄압이고, 타인의 착하지 않음은 심판받아 마땅한 일이라 주장한다. 현재 국회에서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의혹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설령 개인적으로 억울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회의원이 그러한 의혹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할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그러한 행태를 찾아볼 수 없다. 부끄러움이 없으니 양심의 가책도 없고, 양심의 가책이 없으니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아 더욱 씁쓸할 따름이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돌보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셋째 정치인들은 국민 앞에서 더욱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의 갑질 논란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갑질의 종류도 다양하다. 폭언, 인사청탁, 이권개입 등 날이 갈수록 창의적인 갑질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사실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은 갑의 위치가 아니라 을의 위치여야 한다. 정작 갑질은 국민이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정치인 수를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갑질하는 정치인들은 줄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당략에 빠져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면 안 된다.
최근 민주당 돈 봉투 사건의 혐의가 있는 윤관석, 이성만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방탄 국회라는 소리를 듣는 현 국회에서 체포동의안 부결이 전혀 낯설지는 않지만,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과연 대한민국 국회가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곳인가에 대한 의구심도 커진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체포동의안의 필요성을 법무부 장관이 설명하지만, 왜 부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기준은 국회의원 마음이다. 이는 제도적으로 반드시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생선가게 주인이 고양이인데 그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포기할 리 만무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위기의 순간이다. 대외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좋은 징후보다는 부정적 신호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정치 시스템은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다툼도 있겠지만 정치인 개인이 보여주는 일탈과 문제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빨리 정치인의 정체성을 찾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고 더 나아갈 수 있는 기본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 四(넉 사)는 ❶지사문자로 亖(사)는 고자(古字), 罒(사)는 동자(同字)이다. 아주 옛날엔 수를 나타낼 때 가로 장대 네 개의 모양으로 썼으나 三(삼)과 혼동되기 쉬우므로 전국시대 무렵부터 四(사)를 빌어 쓰게 되었다. 四(사)는 코에서 숨이 나오는 모양을 본뜬 것이었으나 그 뜻으로는 나중에 呬(희)로 나타내고, 四(사)는 오로지 수의 넷을 표시하는데 쓴다. ❷상형문자로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四(사)는 ①넉, 넷 ②네 번 ③사방(四方)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네 사람을 사인(四人), 네 곱절을 사배(四倍), 넷으로 가르거나 갈라짐을 사분(四分), 사방의 경계를 사경(四境), 사방의 둘레를 사위(四圍),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다는 말을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사면초가(四面楚歌), 주위에 사람이 없어 쓸쓸함을 일컫는 말을 사고무인(四顧無人), 길이 사방 팔방으로 통해 있음이나 길이 여러 군데로 막힘 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팔달(四通八達), 이리저리 여러 곳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으로 길이나 교통망이나 통신망 등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오달(四通五達), 사면이 봄바람이라는 뜻으로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좋은 낯으로만 남을 대함을 이르는 말을 사면춘풍(四面春風), 사해란 곧 온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천하의 뭇사람들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사해형제(四海兄弟), 네 갈래 다섯 갈래로 나눠지고 찢어진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짐 또는 천하가 심히 어지러움 또는 질서 없이 몇 갈래로 뿔뿔이 헤어지거나 떨어짐을 일컫는 말을 사분오열(四分五裂),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이라는 뜻으로 인생에 있어 반드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온갖 괴로움을 이르는 말을 사고팔고(四苦八苦), 사철의 어느 때나 늘 봄과 같음으로 늘 잘 지냄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사시장춘(四時長春), 사주의 간지로 되는 여덟 글자 또는 피치 못할 타고난 운수를 이르는 말을 사주팔자(四柱八字), 천하의 풍파가 진정되어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사해정밀(四海靜謐), 갓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뜻으로 뒤늦게 비로소 일을 해 봄을 이르는 말을 사십초말(四十初襪), 404 가지 병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걸리는 모든 질병을 이르는 말을 사백사병(四百四病), 네 마리 새의 이별이라는 뜻으로 모자의 이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사조지별(四鳥之別), 천하를 제 집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천하를 떠돌아 다녀서 일정한 주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사해위가(四海爲家), 사궁 중의 첫머리라는 뜻으로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를 이르는 말을 사궁지수(四窮之首), 사방의 지세가 견고하고 험한 자연의 요새로 되어 있는 땅을 이르는 말을 사색지지(四塞之地),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따로따로 떨어짐 또는 그렇게 떼어놓음을 일컫는 말을 사산분리(四散分離), 어떤 주창에 응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사방향응(四方響應) 등에 쓰인다.
▶️ 端(끝 단, 헐떡일 천, 홀 전)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설 립(立; 똑바로 선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耑(단)으로 이루어졌다. 直立(직립)의 뜻이다. 또 음(音)이 斷(단)과 통하는 데서 빌어 자른 끝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端자는 ‘바르다’나 ‘단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端자는 立(설 립)자와 耑(시초 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端자의 갑골문을 보면 立자가 아닌 止(발 지)자와 耑자가 결합한 모습이었다. 耑자는 잡초의 뿌리와 이파리를 표현한 것으로 ‘시초’라는 뜻이 있다. 여기에 발을 뜻하는 止자가 더해진 端자는 이파리가 앞으로 곧게 뻗어 나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端자는 ‘바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耑자의 의미가 강하게 남아있어서인지 ‘시초’나 ‘끝’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래서 端(단, 천, 전)은 성(姓)의 하나로 ①끝 ②가, 한계(限界) ③처음, 시초(始初) ④길이의 단위(單位) ⑤실마리, 일의 단서(端緖) ⑥까닭, 원인(原因) ⑦막료(幕僚) ⑧예복(禮服) ⑨조짐(兆朕) ⑩생각, 느낌 ⑪등차(等差), 등급(等級) ⑫가지, 갈래 ⑬문(門), 정문(正門) ⑭도대체(都大體), 대관절(大關節) ⑮때마침, 공교(工巧)롭게도 ⑯단정(端整)하다 ⑰바르게 하다 ⑱바르다 ⑲살피다, 그리고 ⓐ(숨을)헐떡이다(천) ⓑ홀(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료(了), 뾰족할 첨(尖), 끝 말(末), 다할 극(極), 그칠 지(止), 마칠 종(終)이다. 용례로는 일의 처음이나 일의 실마리를 단서(端緖), 실마리 또는 일의 첫머리를 단초(端初), 어떤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상태에 있는 것을 단적(端的), 바르고 얌전함을 단정(端正),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음을 단정(端整), 바른 말을 함 또는 그 말을 단언(端言), 바르게 정돈된 모양을 단연(端然), 단정한 사람을 단인(端人), 단정하게 차림을 단장(端裝), 단정하게 앉음을 단좌(端坐), 올바르고 공평함을 단평(端平), 연극이나 영화의 대수롭지 아니한 말단의 역 또는 그 역을 맡은 사람을 단역(端役), 행실이 단정하고 겉모양이 아름다움을 단려(端麗), 바른 뜻을 단지(端志), 단정하고 아담함을 단아(端雅), 단정하고 선량함을 단량(端良), 단정하고 정중함을 단중(端重), 바르고 단정한 행동을 단행(端行), 단정하고 아름다움을 단화(端華), 물건의 뾰족한 끝 또는 시대의 사조나 유행 같은 것에 앞장서는 일을 첨단(尖端), 괴롭고 번거로운 일이나 귀찮고 해로운 일을 폐단(弊端), 일이 일어남 또는 그러한 실마리를 발단(發端), 자기가 믿는 이외의 도나 옳지 아니한 도를 이단(異端), 한 끝이나 사물의 일부분을 일단(一端), 일이 흐트러져 가닥이 많음을 다단(多端), 사물의 맨 끝 또는 조직의 가장 아랫부분을 말단(末端), 맨 끝이나 맨 끄트머리로 몹시 궁하여 여지가 없음 또는 극도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음을 극단(極端), 떠들썩하게 벌어진 일을 야단(惹端), 수 없이 많은 갈래나 토막을 만단(萬端), 온갖 일의 실마리 또는 여러 가지 방법을 백단(百端), 일의 실마리 또는 사건의 단서를 사단(事端), 구멍 속에서 목을 내민 쥐가 나갈까 말까 망설인다는 뜻으로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양 또는 어느 쪽으로도 붙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수서양단(首鼠兩端), 일이 얽히고 설키다 갈피를 잡기 어렵다는 말을 복잡다단(複雜多端), 일이 많은 데다가 까닭도 많다는 말을 다사다단(多事多端), 일부러 말썽이 될 일을 일으킨다는 말을 고심사단(故尋事端),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다는 말을 필유사단(必有事端), 일일이 가려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의 갈피를 이르는 말을 천서만단(千緖萬端), 무릎을 거두고 옷자락을 바로 하여 단정히 앉음을 이르는 말을 염슬단좌(斂膝端坐), 만감이 착잡하게 일어난다는 말을 백단교집(百端交集), 만 가지로 깨닫게 가르치다는 뜻으로 친절하게 가르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만단개유(萬端改諭), 몸 형상이 단정하고 깨끗하면 마음도 바르며 또 겉으로도 나타난다는 말을 형단표정(形端表正)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