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투 블루(대한민국. 국가 정보원)-43
국가조직에 몸담아 충성을 맹세한 이 들은 정보원 또는 스파이라는 말을 절대로 입에 올리지않는다.
그들은 항상 자신을 ‘오피서’라 했고 자신을 위해 일 하는 외국인 협력자들을 ‘에이전트’라 불렀다.
국정원장은 집무실 옆 부속실로 강철을 안내했다. 거기에는 안락한 가죽 쇼파와 티테이블, 간이침대, 기타 집기들이 잘 비치되어 있었다. 또한 각종 위스키와 브랜디, 포도주, 커피, 물 같은 것을 거리낌 없이 마실 수 있도록 했다. 홈빠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강철은 홍차를 택했고, 국정원장은 커피를 손수 만들어 마셨다. 벽에는 루부르 박물관에나 있음직한 유명한 그림 한 폭도 걸려 있었다. 그림이 걸린 벽 대각선 쪽 유리창 밖으로 녹음 우거진 숲이 고즈넉이 내려다 보였다.
“중요한 의론이란 게 무엇입니까? 강선생님.”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으며 국정원장이 말했다.
“실은,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미국 에이전트에게 무슨 조치를 강구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국정원장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상당히 스트레스가 높아졌습니다. 이번에 입수한 그 문서 때문에…… 그 에이전트는 자신의 잔꾀가 곧 탄로날 것이라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반역행위라는 자괴감도 한몫을 할 겁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런데, 그 에이전트를 중립국인 제 3국으로 빼돌릴 방안를 연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음 …글쎄요, 내생각은 그녀가 지금 사라져 버린다면 CIA가 철저히 뒷조사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얼마 동안은 그자리에서 일을 하는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이건 우리 쪽 욕심이긴 합니다만.”
“아닙니다. 저는 정반대라 생각합니다. 그 에이전트가 어느날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해도 미국측은 무슨 정보가 얼마나 어디로 어떻게 흘러나갔는지를 밝혀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물쭈물 하다 체포되면 반드시 자백을 하게 됩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것은 한국과 미국간에 국제적인 문제가 됩니다. 일이 그 지경이 되면 어쪄시려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최악일 경우는…. 강선생 뜻은 잘 알겠습니다. 과거에 미국도 우리대통령 집무실을 도청한 사실이 있었지만 그들은 증거를 대라며 오리발을 내밀었어요. 하지만 이건 거기에 비할 바가 못 되지요. 엄연히 체포된 범인이 있으니깐…… 아무튼 방법을 조속히 연구하겠습니다.”
북한. 평양
북조선의 성역 주석궁,
주석궁의 깊숙한 방에서 김정은은 그의 입에 맞는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격식을 차린다거나 식사예절 따위는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자리였다.
그의 옆에는 불필요한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 여비서 한명과 지금 막 호출을 받아 달려온 최부일 인민 보안상뿐 이었다.
김정은은 입에 묻은 음식물을 냅킨으로 닦으며 최부일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이번에 태평양으로 ICBM 발사한 것올 어떻게 생각하오?”
“수령각하, 용단을 아주 잘 내리신 겁니다. 미제국 주의자들의 간담이 서늘해 졌을 것입니다.”
최부일은 군을 장악했을 뿐만이 아니라 당 조직까지도 지배하는 정치국원 이었다.
그는 계속 김정은이 좋아할 말만 골라 했다.
“잘 하셨습니다. 그동안 저들은 우리 해외 교역 수단을 막았고, 우리의 자본 및 외화 이동을 차단했습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식량을 무기화 하는 파렴치한 행동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후회할 날만 남았습니다. 수령각하”
김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다시 질문했다.
“저들에게 요구해야 할 것이 뭐요?”
“수령 각하, 저들은 회담에 복귀하라고 할 것입니다. 회담의 중요 의제는 당연히 우리 북조선 핵무기 일 것 입니다. 즉 저들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핵을 포기 하라는 조건을 제시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조건을 내세워야 합니다. 첫째로, 어느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느냐가 문제입니다. 둘째로, 그 합의 사항을 우리가 꼭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시할 조건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예, 첫째, 유엔이 지금 취하고 있는 경제 제제 조치의 해제와 이와 비슷한 수준의 기타 동결 조치 해제가 급선무 입니다. 둘째로, 미국, 중국, 러시아에 일정량의 무상원조를 요구하는것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셋째, 일본으로부터 과거 36년간 우리동포를 약탈해 간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야 합니다. 넷째로, 남한에 추후 10년간 쌀과 전기, 기름을 공급하라는 약정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정도의 요구는 별 무리 없이 받아 들여질 것입니다. 우선은 이정도로 해놓고 저들의 태도를 봐가면서 우리도 천천히 무슨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수령각하.”
*
호주 시드니. 브론테 비치
브론테 비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망망한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 옛날부터 부호들은 조상의 묘비를 여기에 세웠다. 시드니 부자들의 공원 묘지는 브론테 비치에 있었다.
강철은 여늬 성묘객처럼 카네이션 꽃 다발을 손에 들고 브론테 묘지공원 길을 걷고 있었다.
시원한 바다 바람이 철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묘지가 끝나는 지점 저만치에 바바리 코트 깃을 올린 한 여인이 태평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잔디 언덕에 앉아 있었다.
바다의 잔물결이 한낮의 햇살을 받아 고기 비늘처럼 반짝였다.
여자는 주변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응웬이었다.
“안녕.”
철이 부드럽게 웃으며 응웬에게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녀 역시 희미한 웃음으로 강철의 손을 마주잡았다.
철은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어깨를 맞대고 서로를 의지한채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울 국정원장에게 잘 부탁 해 두었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더군. 지금당장 내가 당신을 데리고 스위스엘 간다면 모든 것이 탄로가 난다는 거야. 만일 그런 사태가 생기면 미국은 주요한 정보가 새어 나갔으니깐 한국과의 회담 같은걸 집어 치우려 할지도 모르고…… 이쪽 계획도 아직은 마땅치 않고 그렇다는 거야.”
응웬은 약간씩 몸을 떨었다.
바다 바람때문인지 CIA공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강철은 또 다시 그녀에 대한 애처로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런 판단이 정확할지 몰라요.”
그녀가 계속해 말했다.
“지금 미국은, CIA는 잔뜩 긴장하고 있어요. 북한이 ICBM을 쏜 이후로 전쟁을 시작해야 할지를…. 지금 저울질 하고 있을 거에요. 아무래도 강경파들의 태도가 심상치가 않아요. 제가 그들의 전화 통화를 옅듣다 보면 다 알아요.”
“대통령은?” 강철이 미국 대통령에 대해 물었다.
“대통령 역시 물러설 곳이 없어요. 문제는 북한의 태도 여하에 딸렸다고 봐요.”
“북한 역시 미국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생각일 거야. 그들이 미사일을 쏜 것은 일종의 시위야. 미국측에 압력을 가해 보겠다라는 그런 생각일거야.”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가물가물 허공을 맴돌았다.
“응웬, 자아 힘을 내요. 당신옆에 내가 있잖아. 우리함께 스위스로 가요. 한국의 높은 사람이 우리를 돕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어요.”
그녀는 조금은 희망에 빛나는 눈동자로 강철을 바라보았다. 철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강철과 응웬이 찾아 들어간 언덕 위 작은 호텔은 바다의 평화로움이 넘쳐났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방 침대 또한 정갈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실내는 온도와 습도를 자동 조절해 주는 시설까지도 잘 작동되어 아늑하기가 그지없는 방에 들어서니 두사람은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두 연인은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호흡까지 느낄 수 있었다.
응웬은 얼굴을 철의 가슴에 깊숙히 묻었다. 응웬의 몸은 뜨거웠다. 둘은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북한 남포. 교화 수용소
10월 하순인데도 초겨울의 바닷 바람이 매섭게 불어닥쳤다. 이 추운날 남포 교화 수용소 앞에 사람 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아버지 또는 형 동생을 한번만이라도 만나 보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교화 수용소 앞까지 왔다. 이들 아버지나 형제들은 먹고 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소규모 밀수를 하다가 붙잡힌 사람들이거나 아예 북한을 탈출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 갔다가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동지,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야. 빨리 여기를 떠나야 해”
신중섭이 장갑수에게 말했다.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한번 만이라도 뵈었으면 해서” 장갑수가 비통한 얼굴로 신중섭에게 대답했다.
장갑수는 이것이 영원히 마지막일거라 생각했다.
“자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빨리 여기를 떠나야 해, 위험해, 그래야 거사를 준비하지”
신중섭은 장갑수를 계속 설득했다.
북한 평양. 미암동
김정은 별장
“어띠게 됬어?”
김정은 은 초조했다.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체포는 시간 문제입니다. 범인은 어떤 자이건 절대로 도망치지 못할 것입니다. 체포되면……”
“체포되면?”
“넷, 체포되면 범행에 협조한 자들을 한명도 남기지 않고 색출하여 자백 받도록 하겠습니다.”
“자백 받은 후에는?”
“그런후 사건이 있던 날밤, 병원 후문에서 일어난 피격 사건을 알고 있는 모든 자들을 집단 수용소로 보내 버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이번 사건은 영원히 묻힐 것 입니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 이번 사건이 국외으로 누설 된다면?”
“그럴리가 없지만…… 사건의 진상이 만약 국외로 누설이 되었을 경우, 이것은 치욕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진상이 국내로도 퍼지게 될것이고 결국 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 들어나게 됨니다.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앞으로의 통치행위를 인민들이 불신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범행에 사용된 총이 무엇인지는 알아봤어?”
“총은 미국제품은 아닙니다. 아마도 제 3국에서 만든 초정밀 저격용 총일 것입니다. 또한 야간 조준장치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런것들은 국내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물건 들입니다. 따라서 비밀리 외국에서 들여온 것은 분명한데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들여 왔는지? 국내에 협력자는 있는지? 이 같은 것을 지금 조사하는 중 입니다.”
“총이 미국 제품이 아니라면 말이야, 제 3세계의 정부가 이번 폭거에 뒤를 봐주지는 않았을까? 그쪽을 한번 생각해 봤어?”
“예, 제 3세계의 정부가 관여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중앙당에 원한을 가진 해외 망명자가 있는지를 조사해 보고 있지만 그쪽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외 망명자?”
“그렇습니다. 과거에 김정일 수령 각하의 하늘 같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장엽, 태영호 같은 놈들처럼 조국을 배반한 쓰래기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류에 대해서도 이미 조사를 시켰습니다.”
“알았어. 공식발표는 언제쯤 할거야?”
“넷, 2~3일 후에 할 계획입니다. ‘중앙당 박봉주 내각총리께서 집무도중에 갑자기 심장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셨다’ 라고 그래서 입원중이시라고……”
“그런 발표 후에는?”
“빌표후 시간이 적당히 흐른다음, 장례식 날짜를 잡아 북조선 최고 의료진이 온갖기술을 다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운명하셨다라 한 뒤에 최고의 예우를 갖추어 평양 유공자 묘역으로 모시겠습니다.”
“암, 그렇지… 그렇게 차질 없이 잘 하시오 동무, 나는 동무만 믿겠소.”
그로부터 한달 후 외신들은 일제히 북한 /조선 중앙 통신/의 보도를 인용해서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겸 내각총리인 박봉주의 갑작스런 심장 마비 사망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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