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촌이 있었던 ‘바람의 언덕’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대화퇴(大和退)는 동해 바다 수심 3000m 깊이의 바닥으로 부터 솟아올라 있는 해저산을 말하는 것이다. 대화퇴는 깊은 바다에서 융기한 2개의 해저산으로 구성되어 그 넓이가 수심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대략 수심 1000m를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의 해산을 합한 넓이가 강원도 정도의 크기가 된다.
이 해산은 오징어 조업의 중심 기지이면서 수산자원이 풍부한 어장이다. 무동력 어선이 먼 어장에 나가지 못할 때에는 이곳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우리 어선들이 먼 어장이나 해외 어장을 개척해 나간 시기는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이후 선박이 대형화되면서 대화퇴(大和退)를 중심으로 한 해역은 동해의 주요 어장이 되었다.
이 어장은 용승작용으로 저층의 영양염이 빠르게 상층부에 전달되어 식물 플랑크톤의 생산량이 많아지고, 이를 기초로 하여 해양생물의 생산성이 다른 곳보다 훨씬 높다.
이 황금어장이 ‘대화퇴(大和堆)’다. 이 해저산이 대화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일본의 해양탐사선 ‘야마토(大和)’호가 이곳에서 난파된 후부터라고 한다.
야마토는 5세기경 일본의 대부분을 통치하게 된 나라 이름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의미의 용어로 지금도 쓰인다.
욱일기는 대화혼(大和魂)을 의미한다.
동해 한가운데, 우리 어선들이 조업을 하는 중요한 해역을 식민지 시대부터 일본 이름으로 그대로 사용하고, 우리 이름으로 바꾸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쉽게 생각한다.
이름을 바꾼다면 전문가들은 이렇게 제안한다. ‘동해의 가장 크고 넓은 해산(東海大海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위치한 흑산도 주변 일향초는 일본이 강점하던 시기에 좌초되었던 일본 군함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되었는데 2006년에 가거초로 개명돼 늦었지만, 제 이름을 찾게 되었다.
일향초 어장과 다르게, 대화퇴는 공해상인 점이 다르지만, 발해인들이 이용하던 항로였고, 우리 어업인들에게 삶의 터전이 돼 왔다는 점에서 ‘동해 대해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기를 희망한다.
야마토(大和) 정권은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여 현재의 일본으로 이어진 정통 일본 역사의 시작이다. 그래서 대화혼(大和魂) 일본말로 ‘야마토다마시’ 즉 일본 민족 정신의 진수를 이루고 있다.
일본인들이 세계 전쟁을 치르면서 보여준 일사불란한 협동 정신의 전부를 보여준다. 옥쇄 라고 불리우는 천황을 위한 집단자살, 가미가제, 무사도 이 모든 것이 야마토다마시의 실체인 것이다.
과부촌이 생겨난 이유는, 1976년 10월 28일에서 30일 사이에 동해바다 대화퇴 어장에서 커다란 풍랑이 일었는데, 그때 묵호항 어업전진 기지에서 떠났던 오징어 잡이 어선들이 전부 침몰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선원들이 404명이나 죽었다.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아버지였고 아들이었던 죽은 사내들이 떠나고 여자들은 살 길이 막연했다. 그래서 정부는 그녀들을 위해 해난주택을 지어주었고, 그것이 일명 과부촌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당시 일기예보의 정확성도 많이 떨어졌었고, 지금이면 반 나절이면 갈 수 있던 대회퇴에 그때는 이삼일이나 걸렸기에 그런 커다란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당시 묵호항은 어부가 떠날 때 하는 인사말은 ‘안녕히 다녀 오세요’ 가 아니라 ‘안녕히 가세요’ 였다. 그 만큼 삶의 경계에 있던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