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鄭矩) 1350년(충정왕 2)∼1418년(태종 18).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시호: 정절(靖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중상(仲常), 호는 설학재(雪壑齋).
대사헌 양생(良生)의 아들이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을 지내고, 1382년 김극공(金克恭)의 옥사에 연루, 유배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한성부우윤을 지내고 1394년(태조 3) 왕명으로 한리(韓理)‧조서(曺庶)‧권홍(權弘)‧변혼(卞渾) 등과 함께 《법화경》 4부를 금니(金泥)로 썼다.
1397년 좌간의대부, 이듬해 정안군(靖安君: 태종)의 막료로서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겸 상서원소윤(尙瑞院少尹)에 이어 승지 겸 상서원윤을 지냈다. 정종 때 도승지‧대사헌, 태종 때 예문관학사를 거쳐 중군총제(中軍摠制)‧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공조판서‧호조 판서‧판한성부사‧계림부윤‧개성부유후 등을 역임하였다.
1417년(태종 17) 의정부참찬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홍무연간(洪武年間: 明太祖時代)에 만든 각궁(角弓)을 구입하여 왔고, 그뒤 의정부찬성이 되었으나 풍질로 사직하였다.
예서‧초서‧전서를 잘 써 이름이 높았고, 성품은 청렴하였으며 예의가 발랐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의 제액(題額)을 썼다.
설악재선생실기(雪壑齋先生實記)가 있다.
○ 정구(鄭矩)의 시에, “고기잡이 등불은 먼 포구에서 돌아오는데, 수자리 북은 변방 성에 누워 있도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옥구현-
○ 정구(鄭矩)의 시에, “겹으로 된 벼랑은 층층 누각을 버티었고, 붉은 기와는 맑은 흐름을 굽어 본다. 여러 구렁은 서쪽을 따라, 구불구불 백 굽이나 내려왔다. 흰 돌 하얀 모래 깨끗하기에, 홍진(紅塵)의 발을 씻고 싶구나. 나는 여울은 돌다리에 뿌리고, 급한 물결은 주옥(珠玉)을 뒤짚는 듯하다. 샘물이 달고 땅이 또 기름져, 반곡(盤谷)에 왔는가 의심된다. 산이 둘리고 초목이 우거졌고, 길이 돌아서 간다는 것이 돌아오는 듯 여기에 오니, 세상 뜻 적어져서 가려고 하다가 도로 묵는다. 흥이 나서 높이 읊조리며, 술항아리 잡고서 긴 대나무를 대했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
○ 정구(鄭矩)의 시에, “푸른 물결 흰 새 해당화 길이네. 얼굴에 스치는 화신풍(花信風)이 차지 않구나.”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통천군-
○정구(鄭矩)의 시에, “하나하나 시속(時俗)을 물으니, 화락하여 옛 풍속이 있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월군-
○ 찬성(贊成) 정구(鄭矩)와 유후(留後) 정부(鄭符)는 모두 대부 정양생(鄭良生)의 아들이다. 형제가 모두 음악에 조예가 있어 찬성은 거문고를 잘 타고 유후는 알지 못한 바가 없었으며 용모도 웅위(雄偉)하였다. 부인이 혹 시골에 내려가면 유후는 홀로 집에서 운산(雲山)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타며 때때로 스스로 노래를 불러 이로써 낙을 삼았을 뿐이요, 일찍이 분바르고 눈썹 그린 계집들 사이에서는 취(醉)한 일이 없었다. -용재총화-
전 의정부 찬성 정구의 졸기
전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 정구(鄭矩)가 졸(卒)하였다. 정구는 동래(東萊) 사람으로 자(子)는 중상(仲常)이요, 감찰 대부(監察大夫) 정양생(鄭良生)의 아들이었다. 정사년 을과(乙科)에 제2인(第二人)으로 급제하여, 중외(中外)에 두루 벼슬 하였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삼가고 명민(明敏)하여,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또 예서(隷書)·초서(草書)·전서(篆書)를 잘 썼다. 무인년에 임금이 정안군(靖安君)으로 판상서사(判尙瑞司)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강직하고 공정하며 고려(高麗)에 아부하지 않은 자를 얻어서 요속(遼屬)을 삼고자 생각하여, 이에 정구를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겸 상서 소윤(尙瑞少尹)으로 삼았다가, 드디어 승지(承旨) 겸 상서 윤(尙瑞尹)을 제수하였다. 도승지(都承旨)로 옮기고,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하였다가, 여러 번 옮겨서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정구는 사람됨이 염정(括靜)하고 낙이(樂易)하여, 청빈(淸貧)을 스스로 지키고 가사(家事)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비록 자제(子弟)를 대할 적에라도 반드시 띠[帶]를 묶고서 보았으며, 종일 고요한 모습이었고 일찍이 거칠거나 노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졸(卒)할 때 나이가 69세였다. 철조(輟朝)하기를 3일 동안 하였으며, 중관(中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정절(靖節)이라 시호하였다. 아들이 둘이니 정선경(鄭善卿)·정효동(鄭搖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