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제일 처음 맞는 것이 1696년에 세웠다는 포은 선생의 신도비와 함께 한 세 비였다.
신도비(神道碑)란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이 있는 근처의 길가에 세우던 비석으로 묘 주인의 살라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비다.
홍살문을 지난다. 붉은 색깔의 둥근 기둥 2개에 지붕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 중간에 태극 문양이 있는 나무문으로 궁전, 능 묘 정문 앞에 세워 놓아 참배객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한 다.
여행에서 찾아간 곳에 도착하여 그 명승지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다가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곳의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카메라에 기록한다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이다.
-정몽주(鄭夢周)는 여말(麗末) 문신으로 본(本)은 영일(迎日)로 경상도 영천 우항리가 출생지다.
그래서 경북 영천시에는 정몽주 선생을 배향하는 임고서원이 있고 지금은 그곳이 성역화되어 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하였을 때 난초꽃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태몽에 놀라 깨어나 낳았다 하여 초명(初名)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아홉 살 때였다. 어머니가 동산의 배나무에로 올라가는 흑룡(黑龍)의 꿈에 놀라 깨어보니 아들 몽란이 배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
그 후 그의 아버지 정운관(鄭云瓘)이 책을 보다 잠들었는데 “나는 중국의 주공(朱公)인데 천제(天帝)의 명으로 너희 집에서 태어나기로 하였다” 하는 꿈을 꾸고 어른 되는 예식인 관례(冠禮) 때에 몽주(夢周)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자고로 성인의 이름자를 쓰는 것이 아니어서 한자 ‘朱(주)’ 자를 ‘周(주) 자’로 고쳐 썼던 것 같다.
스승 이색이 정몽주를 '성리학의 창시자로 극찬한 것'과 중국의 주희(朱熹)와 연관된 설화와는 신통하게 일치 된다.
옆으로 경모당(敬慕堂)과 모현당(慕賢堂)을 지나니 공터가 나타나고 '묘역안내도'와 함께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와 백로가(白鷺歌)가 검은 오석의 비에 음각되어 서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정몽주의 어머니 이씨가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주의하라고 아들 포은에게일러준 시조였다.
까마귀는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뜻하는 말이요, 백로는 포은 정몽주를 상징하는 것은 알려진 대로다.
다음은 정몽주가 피살될 무렵에 얽힌 설화다.
-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상에 있는 것을 핑계로 포은은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이 시조로 ‘하여가’와 ‘단심가’로 화답한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하여가’ 시조를 통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나라를 건국하려는 뜻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회유하기 위해서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포은은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단심가’를 답가로 변함없는 충정을 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러나 한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포은(圃隱)의 충성심도 커다란 역사적인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정몽주 선생은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나누어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고 가게 하였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귀한 몸을 맑은 정신으로 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귀가 길에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의 철퇴에 맞아 죽음을 당하였을 때 그의 나이 겨우 56세였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를 역적으로 몰아 효수하고, 정몽주 일파를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공이 피살된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새 나라를 열었다.
그러나 정몽주 자손은 멸족되지 않았다. 13년 후 이방원(태종)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교를 숭상하는 새나라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사학자들의 견해다.
-그가 죽은 석교(石橋)인 선죽교의 처음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다. 포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다리 주위에 옛날에 없던 대나무가 돋아났다 해서 선죽교(善竹橋)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 선죽교에는 포은 선생의 영원이 지워지지 않는 혈흔이 전설처럼 남아 있다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단심가(丹心歌)에 얽힌 포은 선생의 충절의 시다.
이 시조는 국민의 시조가 되어 시조 형식의 틀을 만들어 준 대표적인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