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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론에서 본 적정선에서의 거리조정 !!”한석현 글
<아름다운 이야기!!> 원고지 24 매, 2014. 3. 18
명색이 기독교 장로이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박근혜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쓰는 것은 하나님께 외람스럽다. 세상에는 기독인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이단시하거나 석연찮게 바라보는 시각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필자가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정치를 떠나 이웃을 내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주인을 위해 몸받쳐 일해야할 머슴이 하라는 봉사는 마다하고 주인 행세를 한다든지 주인을 엉구렁에 빠뜨리지 못해 안달 하는데도 수수방관한다면 악을 부추기고 부정을 묵시적으로 동의하거나 암묵의 합의를 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그것이 어찌 삶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이겠는가,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십계명을 떠올릴 때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길이 아님도 분명하다. 필자가 부당한 권력의 전횡과 맞서 싸우고 권력의 부정을 질타하는 것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춰볼 때 모순이 아니라 보기 때문이다.주객을 전도(顚倒)하는 성경 해석으로 혼란을 가중시켜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진정으로 필자는 하나님 앞에 극히 작은 자이며 허물투성이 인간이지만 오늘은 논지를 바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사랑의 실천자로 남아 미학적 개념에 어울리는 삶을 빛나게 살기를 바라는 필자가 현재 섬기는 교회 이야기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려고 붓을 들었다.
눈길을 돌려서 보면 세상에는 불신앙의 늪에 빠져 있으면서도 만인의 본보기가 되고 이웃들에게 덕을 행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랑의 공동체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아웅다웅하며 반목과 알륵을 일삼아 사람을 시험들게 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로 연출된다고 들었다. 오늘은 한 아름다운 개척교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경건의 원칙에 어긋나기도 하려니와 오해의 소지도 있겠다 싶어 실명을 거론하진 않겠다. 나는 섬기는 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과의 만남을 기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교회는 “입구는 있으나 출구가 없는, 성도가 들어오기는 하는데 나가는 이가 없는 교회“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교회다. 장로 출신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하자 투성이 정치를 해 교계 분위기를 가뭇없이 흐려놓고 일부 분별없는 목회자들이 뇌화부동하고 마구 먹물을 뿌리는 바람에 사람들을 시험들게 한 것이 사실이긴 하다.
그래 후유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지만 우리 교회는 그런 정치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알짜배기 교회다. 그만큼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약여한 면모를 과시하고 너와 나 사이가 ‘사랑’의 끈으로 묶여 하나가 된, 인간적 결합요소가 튼튼하여 한번 발디디면 교회를 떠나려는 허접한 생각따위를 하는 이가 아무도 없을만큼 내실이 다져진 교회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각다분한 교회 분위기에 이합집산이 잦은 보통의 교회와는 다른 풍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섬기는 교회 목사님은 성직자는 이렇게 살아야함을 실천을 통해 온몸으로 보여주시는 분이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장점으로는 목사님과 사모님의 돈독한 부부애를 손꼽아야 할 듯하다. 흔히 혼인을 가리켜 “이성지 합이요 영육 합일의 경지”라 이르거니와, 서로 살아가다보니 악밖에 남은 것이 없고 “원수끼리 만나는 게 부부!”라는 징크스가 떠도는 일반의 여니 가정과는 생판으로 다른 풍정을 선보인다고나 할까?.
나는 지난 일년간 겪어 보았으되 목사님 부부 사이에서 들려오는 불협화음을 단 한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서로 최대의 존칭을 쓰고 말씨에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빛에는 사랑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를 볼라치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며 만족해하는지를 단번에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애틋한 부부애로부터 출발한 사랑과 믿음 행진은 하염없이 계속돼 목사님 부처를 접하는 모든 이웃들을 행복감에 젖어들게 한다.
목사님은 보기 드문 효자다. 예배 인도와 세미나 참석 등으로 눈코뜰 사이없는 일상에 쫒기면서도 지금은 거주지를 약 반시간 이상 자동차 주행거리 외곽지대로 이전했지만 이전 교회 부근에서 살 적에는 치매 초기 증세인 아비지의 말동무가 돼드리려고 날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릿길를 걸어서 왕복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지극한 효성을 나타냈다. 승용차로 갔다면 문제가 다를 수도 있겠으나 도보로 걸어서 갔다 왔으니 그 지극정상이 놀랍지 않은가.
목사님네 두 자매를 보면 사랑의 정감이 넘쳐흘러 여간 은혜롭지가 않다, 그런 부모님 슬하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길러졌으니 얼마나 인성이 잘 가꿔지고 가다듬어 졌을지는 보나마나 뻔하지 않을까, 아이들의 티없이 맑은 눈망울에서 행복감이 묻어나는 영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목사님은 늘 온유겸손하고 미소띈 얼굴로 성도들을 대하신다. 노인 성도들을 부모처럼 대하며 청소년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는데 진정성이 엿보여 누구나 쉽게 교회 분위기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교회의 성경 읽기 등도 젊은 이 위주가 아니다, 슬로우 템포는 노인에게 돌리는 배려의 흔적이리라.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못할 것도 없겠으나- 훌륭한 목사님은 인성이 가다듬어진 좋은 가정환경에서 길러진다고 말하면 논리의 비약이 될까. 영적 원리에서는 빗나간 궤변일수도 있으나 그같은 매너는 “평소 유교문화권의 사대부 집안에서 받은 양반 교육의 영향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세상에는 내심 집권세력에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성도들의 이탈을 우려하여 일부러 중립을 가장하는가 하면 경우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말을 아끼는 목사님들도 적이 있눈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교회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목사님은 이념적으로 보수 성향이면서 진보도 아우를 줄도 아는 성직자여서 성도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신다.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게 가지고 산다는 단적인 표시가 아닐까? 아무튼 이념적 차이가 성도를 시험들게 하거나 그 때문에 성도가 교회를 떠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 “시험들지도 모른다!”며 성도에게 아부하거나 자기 양심을 속이고 아닌 척 가당한다든지 ‘불의‘를 ‘불의’라 내색하지 못하는 등은 성직저답지 못한 비겁으로 간주돼야 하지 않을까? 인격적으로 가다듬어진 행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목사님은 말씀 위주의 사역을 하시는 분이다. 설교 내용이 너무나 좋고 은혜로워 한번 듣고 버릴 내용이 아니어소 “녹음은 언제 하느냐?“는 질문을 몇차례인가 목사님에게 던진 적이 있다. 말씀 위주이면서도 맛있게 재구성하여 성경을 이해하고 알기 쉽게 해석하는데 도움아 된다, 그렇듯 아름다운 교회에서 필자는 지난 연말 외람스럽게도 ‘장로’ 직분을 받았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린다. 평형감각응 지니신 목사님의 과분한 선택이라 하나님을 위해 더 일을 하라는 격려로 받아드리고 있다. 할렐루야!!
요즘에는 하나님께 의를 이루는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어떻게 삶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들일까? 사랑의 끈으로 매어 너와 나를 하나로 이으며 이웃들에게 감명을 줄 무슨 노하우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도 들어 있어 감명적이다. 모두가 높은 관점에서 나온 고차워에서 둘려주는 설교들이다, 배울 건더기가 있으니 성도들이 청각을 곤두세우는 것이리라,
그같은 맞춤형 서비스의 제공을 가능케 하는 아이디어는 목사님의 영적 능력과 뛰어난 두뇌 플레이에서 나온 영감적인 내용들이라서 퍽 감명적이다. 이를 보며 우리나라 제도권에 감도는 불통 등 난기류 형성의 원인을 떠올려보는 마음이 그다지 명랑 상쾌하지가 않다. 문득 목사님이 대통령이라면 나라의 난맥상을 바로잡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청년 찬양단에게도 정도 이상의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음이 확연히 눈에 띄고 있다, 피아노, 기타, 드럼 등으로 구성된 청년 찬양대의 찬양에도 성도들은 은혜를 많이 받는다. 수 삼주 전 우리 교회에서는 섹스폰 합주단 공연이 열려 여간 은혜롭지가 않았다. 이 연주회는 타 교회를 섬기시면서 우리교회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장로님의 설도로 추진된 것이다.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살면서 목사님이 역동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의 하나가 새벅기도 모임의 황성화가 있다. 지난 한해동안 필자 혼자만의 참석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새벽기도 모임이 3월 로 접어들어 열명 안팎으로 기도인구가 불어난 것에 대해 희망적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과거 유명무실하던 새벽기도 인원이 이만큼 불어난 것은 사모님의 희생적 봉사의 덕이다. 목사님은 의학적 진단 결과 결격 사유가 있어 운전을 하지못해 활동적인 사모님이 그 빈칸을 메우고 있는 셈이다. 성도들과 함께 울고 웃어주는 사모님이 게셔 성도들은 행복하다. 항상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모님에게 감사하며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이밖에도 우리 교회에는 교회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고 몸받혀 일하는 두분의 안수집사 내외분이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주일이면 원거리를 승용차에 다른 믿음가족을 태우고 교회에 림하시는 집사님 권사님도 은혜로운 믿음의 가족들이다. 남편과 사별하여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훌륭한 공무원으로 길러낸 노권사님도 계시다,
오후 예배전의 메시지 성경낭송은 또다른 우아한 모습의 여집사님의 몫이다. 서울에 살면서 주일 성사에 거르지 않고 나와 몸받쳐 일하는 집사님도 있다. 14년간 남편의 병수발을 하면서 열심을 내어 살아가는 여집사님, 수술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보살피며 새벽기도에 거르지 않고 나와 쾌유를 비는 소아마비를 앓은 여 성도님도 여간 은혜롭지가 않다, 그밖에도 해야 할 이야기꺼리들이 많다. 지면의 제약으로 그 모두를 다루지 못한 것에 대해 교회 집사님 성도님들의 너그러운 해량을 구한다.
필자의 불러그 http//;blog.hani.co.kr/hsh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