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건]
1964년 2월 29일
신성일 주연 ‘맨발의 청춘’ 공전의 히트
한국 영화사에서 주연을 가장 많이 한 배우는 두말할 것 없이 신성일(1937~)과 김지미(1940~)이다. 좀처럼 깨지지 않을 대기록의 주인공 김지미는 1957년 10월에 개봉된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를 통해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800여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신성일은 1960년 데뷔한 이래 그가 출연한 530여 편의 영화 중 506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신성일은 당대의 잘나가는 여배우 118명과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성기 때는 한 해 65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었고 하루에 8편의 영화를 찍었던 적도 있었다.
신성일의 데뷔작은 1960년 1월 28일에 개봉한 ‘로맨스 빠빠’다. 신상옥 감독이 연출·제작을 하고 김진규와 최은희, 허장강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했다.
무명의 신성일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는 1962년 11월 9일에 개봉한 ‘아낌없이 주련다’(감독 유현목)였다. 연상의 여인과 젊은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기 전까지 신성일은 그저 잘생긴 신인배우에 불과했다.
이후 ‘가정교사’(1963), ‘청춘교실’(1963) 등에 출연하던 신성일이 전성기를 맞은 것은 1964년이었다. 그해 2월 29일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한 ‘맨발의 청춘’(감독 김기덕)이 그 시작이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한 이 영화 후 신성일은 1960년대 부동의 청춘스타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사적으로는 한국 영화 ‘대박 행진’의 시작이기도 했다.
밀수조직 행동책 두수(신성일)가 부잣집 여대생(엄앵란)과 사랑하게 되지만 신분이 다른 남녀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의 두터운 벽을 뚫지 못하고 함께 자살한다는 내용의 영화는 전망 없는 사회를 살아가던 그 시대 관객의 갑갑한 마음에 엄청난 공명을 일으켰다. 가난했던 청춘들은 부잣집 딸과 뒷골목 주먹의 못 이룰 사랑과 죽음의 비련에 울음을 삼켰다.
영화는 단 18일 동안만 찍었는데도 연일 매진 기록을 세워 서울에서만 21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당시 서울 인구 350만 명에 상영관도 단 한 곳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광복 이후 한국 영화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사건’이었다.
[오늘의 인물]
2004년 2월 29일
천재시인 이상의 전 부인이자 천재화가 김환기의 부인이었던 수필가 김향안씨 별세
29일 뉴욕 자택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수필가 김향안(金鄕岸·본명 변동림) 여사는 한국 근대 예술계의 뮤즈였다.
그는 천재 시인 이상(李箱·1910~1937)의 유일한 아내였으며, 한국 그림의 지평을 전 세계로 넓힌 수화 김환기(1913~1974) 화백의 평생을 지킨 아내이자 컬렉터였고 ‘김환기 미술’의 완성자였다.
김 여사는 아들 김화영 환기미술관 이사장 내외 등 가족과 지인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3일 뉴욕 근교 웨스트체스터의 공동묘지에 있는 김환기 화백 묘역 옆에 묻혔다.
지난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한 뒤 1997년 별관 겸 기념관인 ‘수향산방’을 세우면서 “수화 선생은 늘 ‘사람은 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라고 되뇌었는데 이 수향산방이야말로 우리 부부의 50년 된 보금자리이자 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그는 꿈을 꾸듯 수화의 곁으로, 둘만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훌훌 떠났다.
김 여사는 천재 시인의 젊은 아내였고, 천재 화가의 반려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목받는 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천재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천사였을 뿐만 아니라 수필가와 미술 비평가로서 독자적인 예술의 길을 추구했던 여성이었다.
경기고녀(현 경기여고)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온 김 여사는 이복오빠인 화가 구본웅의 소개로 1936년 이상을 만났을 때, 신예 수필가로 문단에 입문한 상태였다.
이상의 요절로 1년 만에 결혼 생활을 끝낸 김 여사는 수필을 계속 썼고, 수화 김환기와는 1944년 결혼했다. 그러나 김 여사는 1956년 “10년 시집살이를 하다 보니 글 쓰고 책 읽는 저만의 일이 하고 싶어졌다”며 프랑스 파리로 홀로 떠나 미술 평론 공부를 시작했다.
김 여사의 유학은 1년 뒤 김환기 화백으로 하여금 홍익대 미대 교수직을 버리고 파행을 결단토록 했다. 김 여사는 김 화백이 파리 화단에서 주목받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는 한편, 자신의 글을 계속 썼다.
김 여사는 수필집 ‘파리’ ‘카페와 참종이’ ‘우리끼리의 얘기’ 등을 통해 파리에서의 이국 체험을 통한 내면 성찰, 예술을 매개로 한 김환기 화백과의 사랑 등등을 간결한 문체로 그려냈다.
김 여사는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1992년 환기미술관을 건립할 당시, 김 화백의 작품을 형상화한 타피스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겠다고 결심, 프랑스의 전통 타피스리 제작소인 고블랭에서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설계와 내부 장식 등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과 설전을 벌이면서까지 취향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부암동 환기미술관은 마루 한쪽 한쪽까지 환기 그림의 느낌과 결을 맞춘 것으로 유명하다.
김 여사는 일생의 짧은 부분을 나누었던 이상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 언급하기를 생전에 꺼렸다. 다만 이상에 대해 “천재는 미완성이다. 사람들은 더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다. 그는 두 번째로 만나 영원한 동반자로 삼은 천재 수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그는 수화의 예술에 대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며 “그에게 자연은 곧 인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 해, 오늘 무슨 일이... 총 17건
2004년 | 천재시인 이상의 전 부인이자 천재화가 김환기의 부인이었던 수필가 김향안씨 별세 |
1996년 | 일제 강요에 의한 홍난파, 전영택 등의 친필 전향서 발견 |
1996년 | 전자주민카드 시범 발급 |
1984년 | 트뤼도 캐나다 수상, 사임 발표 |
1980년 | 서울지하철 3,4호선 일제히 착공 |
1980년 | 정부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에 대한 복권조치 단행 |
1976년 | 현대자동차 포니1호 첫 출고 |
1976년 | 여자탁구, 서독오픈 개인단식전서 중국 꺾고 우승 |
1964년 | 영국 이글항공기 오스트리아산중에 추락 83명 사망 |
1960년 | 모로코에 대지진 |
1952년 | 한국, 중국 항공협정 체결 |
1928년 | 스위스의 무대장치가 아돌프 아피아 사망 |
1912년 | 발칸동맹 결성 |
1892년 | 베링해 어업에 관해 미국, 영국 중재협정 성립 |
1885년 | 광혜원 설립 |
1866년 | 천주교 신자 남종삼 체포 |
1792년 | 롯시니 영국 작곡가 출생 |
[출처: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