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
이재훈
순례의 여정엔 늘 사랑이 있었네
젖을 제때 짜지 못한 암소의 배엔 고름이 차고
죽은 자들의 얼굴엔 고통과 평화가 함께 스미는 걸 봤네
내게 사랑은 늘 들판과 외양간의 고통 속에 있었지
자네의 여정엔 아직도 구원만이 있는 건가
어머니가 보고 싶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어머니가 내게는 또 다른 구원의 징표가 되었었네
이 땅엔 내 존재를 온전히 감당할만한 대상이 없었네
나는 거친 아버지의 세계만 알았지 어머니의 세계는 몰랐다네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과 도덕에만 관심있었지
하지만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이었네
그럴 때쯤 마치 마술처럼, 성애의 욕망과
죽음과 예술의 열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네
내 정념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말일세
나르치스. 사십은 늙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사랑도 예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지
한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날 지탱해간다고 생각했지
죽음은 받아들이면 그뿐인데 말이야
세상 그 어디에도 가장 마땅한 이유는 없네 그럴듯할 뿐이지
이 도시 속에서 나는 사십 년의 광야처럼 매일 순례하며 살고 있다네
순례의 삶이 이 도시에 있다는 것을 자네는 믿겠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나무의 짐을 나눠지고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침묵하며 자꾸 울고만 싶네
나는 언젠가 자네의 품에서 서서히 죽어가겠지
내 체온이 식어가는 감각을 오로지 자네에게 보여줄 수 있어 다행이네
나르치스, 자네는 따뜻한 포도주와 부드러운 빵을 원하겠지만
나는 배추를 넣은 된장국을 먹고 싶네
하얀 눈이 내린 들판을 홀로 걷고 싶은 날이네
말이 없어도 언어가 없어도 알 수 있는 세계를 언제 알려줄 텐가
가장 힘든 길은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나
이제 순례를 떠날 때가 되었네 나르치스
자네의 단호한 목소리와 예감하는 눈빛이 그립네
나의 고향인 대지의 소리가 귓가에 가득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