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의 시험지, 공책, 그림, 성적표를 모아 두었다,♠
<2003-05-15 김두영(전 청와대 제2부속실 행정관)>
육 여사가 박 대통령에 대한 내조에 못지않게
염려했고 힘을 기울였던 일이 자녀교육이었다.
육 여사는 대통령 영부인이기에 앞서
세 자녀 근혜, 근영양과 지만군의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였다.
여사는 세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만은
영부인이란 칭호를 절대로 쓰지 못하도록 했다.
선생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관심이 다른 부모 못지않은, 모범적인 학부형이었다.
바쁜 시간을 틈내 자녀들의 학교를 곧잘 찾는 육 여사는
언제나 정문 밖에서부터 혼자 걸어 학교로 들어가곤 했다.
지만군이 청운국민학교 6학년 때 초겨울이었다.
육 여사는 느닷없이 학교를 방문하여 지만군이 수업을 받는
3층 교실을 찾아가 추운 복도에서
무려 30분 동안을 혼자서 기다리기도 했다.
담임선생은 지만군이 숙제를 해 오지 않은 날 손바닥을 때렸다.
이를 안 육 여사는 저녁에 담임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 잘하셨습니다.
숙제를 안 해 올 때는 사정없이 꾸짖어 주십시오.
어머니로서 미처 살피지 못해 미안합니다.”하고
정중하게 부탁과 사과를 했다.
또한 학교에 가는 날이면 방과 후 학교의 교실을 둘러보고
창문의 커튼을 거두어 손수 빨기도 했다
육 여사는 비록 학교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더라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학교생활과
학업 성적을 자세히 묻는 자상한 학부모였다.
육 여사는 자녀들이 마음껏 뛰어 놀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다.
여사는 “어른들 틈에서 지내는 생활을 하다 보니
친구가 없을 것이 걱정이 된다.”고
담임선생들에게 이따금씩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육 여사는 박 대통령이 청와대를 비운 사이를 이용하여
자녀들의 친구를 초대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1967년 3월 25일 청와대에서 뛰어 노는
꼬마 박지만과 친구들. ⓒ 정부기록사진집
지만군이 졸업반일 때 같은 학년 친구
전원(1천1백명)을 불러 함께 잔디밭에서 뛰어 놀았다.
이때 육 여사가 입고 나온 남색 치맛자락은
개구쟁이들의 손때가 묻어 까맣게 변했지만
아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
육 여사는 인자하면서도 엄한 어머니였다.
특히 자녀들이 특권 의식을 가지지 않을까 항상 염려했다.
여사는 자녀들에게 서민처럼 생활을 하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자녀들의 통학 때에는 자가용을 태우지 않도록 고집을 했다.
근혜양이 원효로 4가에 있는 성심여자중학교를 통학할 때
꼬박 전차나 버스로 다녔다.
이런 육 여사의 검소하고 서민적인 어머니를 본받아
근혜양은 스타킹까지 꿰매신고 다닐 정도였다.
근혜양이 대학을 진학할 때, 육 여사는 될 수 있으면 여성답게
인문계 학과(사학 전공)를 택하길 바랐다.
그러나 우리나라 산업 현실에서 전자산업이라는 분야에 대한
앞으로의 기대가 크고, 전자산업 분야에 참여해 보고자하는
딸의 생산적인 의욕과 주장을 존중해 대신 힘과 용기가 되 주었다.
육 여사는 자녀들이 학교에서 가지고 온 시험 답안지를 비롯하여
학교 숙제와 그림 공작물, 작문, 성적표를 모두 모아 놓았다.
그것들을 자녀들이 결혼하게 될 때 어린 시절부터의 사진과 함께
며느리와 사위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글, 펌. 編: 동해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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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사는 세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만은
영부인이란 칭호를 절대로 쓰지 못하도록 했다.
선생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관심이 다른 부모 못지않은, 모범적인 학부형이었다.
바쁜 시간을 틈내 자녀들의 학교를 곧잘 찾는 육 여사는
언제나 정문 밖에서부터 혼자 걸어 학교로 들어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