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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백탄입니다.
지인의 소개로 이곳을 알게된 후 간간히 들러보다가 처음 글 올리게 되었습니다.
토탈워는 아직 플레이 하고 있지 않지만. 이대로라면 곧 시작할지도 모르겠네요.
자료에 대한 2차 검증까지는 거치지 않고 작성한 글이라,
수정할 부분이나 추가되어야할 사항이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글 시작하겠습니다.
[역사] 1970,1980 미소 간 핵전력 대치와 전쟁위기.
지금까지 우리는 평화로운 시대에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가까운 북한이 도발을 해오지만 외국인들 투자자들이나 군인들만 민감하게 대응할 뿐,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제 북한의 도발을 연례 행사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방문한 외국인들이 민방위 사이렌 소리를 듣고 전쟁이 일어났는줄 알아 절망하는 영상도 우리에게는 웃긴 영상일 뿐이죠. 하지만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여전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08년 러시아-그루지야 전쟁, 2009년 소말리아 전쟁, 2012년 이스타엘 팔레스타인 가자기구 전쟁,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 이라크 내전 등 중동이나 아프리카 그리고 동유럽 등지에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들은 대체로 우리 국민들의 주된 관심사 밖에 있으나, 그 기저에 있는 흐름들은 우리에게도 큰 위협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시리아 내전의 뒤에 있는 러시아와 미국,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보면, 슈퍼파워인 미국, 중국, 러시아의 태평양 주도권 다툼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우리나라도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분쟁 지역에 대한 각국의 개입 상황이 자칫하면 전쟁으로 이어질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대치 상태에 있고, 우리는 그 국가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주의 주제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있었던 핵전쟁 위기 상황에 대한 분석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인류의 종말까지도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으로 알려져있는데요.
1983년 있었던 나토군이 실시한 핵전쟁 가정 훈련 'Able Archer', 그리고 이에 대한 소련의 대응을 살펴보겠습니다.
1. 냉전 연표
1945 2차 세계대전 종전
1947 트루먼 독트린, 마셜 플랜
1949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창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50 한국전쟁
1955 바르샤바 조약
1957 소련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발사 성공. 최초 인공위성 발사
1959 쿠바 혁명
1965 베트남 전쟁
1968 프라하의 봄
1969 닉슨 독트린
1970 핵환산금지조약(NPT) 발효
1972 워터게이트 사건
1973 파리협정
베트남전 미군 철수
제4차 중동전쟁
제1차 석유파동
1975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1978 중국 개혁개방 시작
1979 미중 국교 정상화
이란 이슬람 혁명
제2차 석유파동
제2차 전략무기 제한협정
이란 미국대사관 인질사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나토 회의에서 퍼싱 II 미사일 유럽 배치 승인
1980 이란 이라크 전쟁
1983 대동독 차관
Able Archer (11/2 - 11/11)
1985 소련 페레스트로이카
1986 체르노빌 원전사고
1987 블랙 먼데이
1989 천안문 사태
모스크바 정상회담. 제1차 전략무기 감축협상
베를린 장벽 붕괴
1990 걸프전쟁
1991 소련 해체
2.1980년대를 맞이한 미국과 소련
1970년대를 거치며 미국은 자국에 대한 신뢰를 잃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정치 권력 다툼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워터게이트사건과, 베트남전을 일으키기 위해 정보를 조작한 사실로 정치권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남베트남이 함락되어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졌고, 친미성향이던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며 반미감정이 고조되어 자국민 50여명이 대사관에 억류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긴 베트남 전쟁으로 지쳐있던 미국에게 베트남 공산정권 수립은 허망함을 안겨주는 소식이었고, 독재정권을 지원하던 미국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이란과의 반목은 경제적 대립과 아라비아해·인도양에서의 군비 증강으로 또다른 전쟁의 불안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란의 상황이 미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된 한편, 이란의 옆동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의 영향을 받아, 쿠테타로 집권한 공산정권에 대항하여 반군이 일어나며 내전이 발생한거죠. 아프가니스탄 집권 정권은 소련에게 반란군 진압을 요청했고, 친소정권이 붕괴할 것을 우려한 소련은 1979년 겨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시작에 대해서는 소련이 중동지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침공했다는 팽창주의적 관점의 해석도 있으나, 사실 아프가니스탄 반군인 무자헤딘의 뒤에는 미군의 원조가 있었습니다. 이란이라는 중동에서의 강력한 지지세력을 잃은 미국이, 대치국인 소련이 새로운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기를 바라며 덫을 놓았던거죠. 그리고 소련은 그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다시 이란으로 돌아가보죠. 미국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이란은 미국과의 대치보다 더 큰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로 약해진 군사력을 틈타, 종교를 중심으로 한 혁명의 물결을 우려하던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 것이죠. 전쟁에 직면한 이란은 미국이 무기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했고, 이후 8년을 이어가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됩니다. 당시 중동 지역의 가장 큰 무력을 갖고있던 이란이 서방 국가들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있었기에 서방 국가들은 이라크에 무기를 지원합니다. 주변의 아랍국가들도 이란 혁명의 여파를 우려하여 이라크를 지원하죠. 하지만 미국은 이 두 국가간의 분쟁이 짧게 끝나지 않길 바랬습니다. 이전의 이란이 중동에서 해줬던 역할을 할 새로운 세력도 필요했죠. 미국은 이라크를 새로운 우방으로 만들기 위해 지원합니다. 동시에 이란과의 문제도 해결하기 위해 이라크 뿐 아니라 이란에게도 무기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이란의 공산당이 탄압을 받자 쇼련도 이라크를 지원했습니다. 중국은 이란과 이라크 모두를 지원했고 북한은 당시 이란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있죠.
그림1. 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소련 지도
3. 1980년대 이전의 밑그림. 미국 소련, 그리고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
중동 지역의 분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미국 입장에서 소련을 견제할만한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같은 공산국가로 알고있는 소련과 중국은 1960년대부터 분열해왔는데요, 양국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원칙적인 차이도 있었지만 서로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과정에서 국제관계상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1962년부터 발생한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에서 소련이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이죠. 당시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각각 인도에 호의적인 입장이었는데요. 중국이 고립되어있는 상황인 전쟁의 호기를 인도가 놓치지 않았습니다. 막상 시작하고보니 전쟁에서 우위를 점한것은 중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압박과 소련의 묵인하에 중국은 물러났죠. 이후로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와 소련 vs 인도를 견제하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대립구도가 확실해졌습니다. (이후 1965년과 1971년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있었으나 중국은 군사적인 지원은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중국과 파키스탄은 아직까지 우방국이죠.)
1969년에는 중국과 소련의 직접적인 국경분쟁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자연스럽게 중국과 협력하며 소련을 견제하는 구도를 만들어갑니다. 1979년에 들어서는 미국과 중국 양국간에 국교 정상화까지 이루어집니다. 미국과 중국에게 동시에 견제를 당하는 소련이 아프간과의 전쟁까지 시작하게 된거죠. 반면 미국은 베트남과의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이란과의 위기까지 잘 넘겼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1979년에 발생한 2차 오일쇼크로 경제 성장이 부진했고, 인플레이션 완화를 위한 긴축금융정책의 실패로 인한 GDP감소와 실업률 증가로 1983년까지 심각한 불황을 겼었죠. 반면 소련은 석유 생산 수출국으로 괜찮은 경제 상황을 유지했습니다. 1983년이 되자 상황은 반전되었습니다. 시장의 석유 수요 감소로 공급이 과잉상태가 되어 석유값이 급락했습니다. 미국은 유가 압력에서 벗어났고 소련은 경제적인 타격까지 입게되었죠. 1983년, 미국은 경제 회복세에 들어섰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 묶여있었습니다.
그림2. 소련, 중국, 인도, 파키스탄 지도
4. 핵전쟁과 전략방위구상. 스타워즈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핵전쟁에 대한 인식을 알아야합니다. 소련은 1957년 첫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발사를 성공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자국이 폭격을 받을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습니다. 1961년 미국은 지역 피난처 프로그램(Community Fallout Shelter Program)을 실시합니다. 아래 그림4는 이에 따른 1960년대 미국 가정의 모습을 나타낸겁니다. 핵폭탄이 투하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각자의 피난처를 마련하고 고립된 상황에 대비하도록 몇달치 물과 식량까지 준비하게 된거죠. 세계대전을 치루면서도 주된 전쟁터가 유럽이었던 덕에, 본토에서는 전쟁을 할 염려가 없었던 미국의 두려움이 이정도였습니다. 소련을 바로 옆에 두고있는 유럽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했겠죠.
그림3. 1960년대 미국 가정의 개인 피난처. Fallout Shelter
1980년대가 다가오자 이러한 핵전쟁 위기는 더욱 고조됩니다. 1977년 소련은 서부국경지대에 중장거리 핵 미사일인 SS-20을 배치했습니다. 1979년, 나토는 소련이 SS-20미사일을 철수하지 않는다면 기존에 유럽에 배치했던 단거리 미사일인 퍼싱 I을 신형 무기인 퍼싱 II로 재배치하고(퍼싱 II는 독일에서 소련까지 직접 타격이 가능합니다.) 지상발사 미사일을 추가로 배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소련은 이에 대응하여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SS-20을 전진배치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유럽은 불안감에 휩싸였고 각지에서는 80년,81년,82년에 걸친 반핵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미사일 배치 당사자인 독일에서는 나토를 탈퇴해야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당시 서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나토 가맹국 유지를 찬성하는 비율은 72%였지만 미사일 배치를 하지 않고 나토를 탈퇴하는 조건과 미사일 배치를 하고 나토 가맹국을 유지하는 조건을 비교했을때는 가맹 유지가 46%로 과반 이하의 비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뒤에는 소련의 지원이 한 몫 했습니다. 소련은 적극적으로 핵 배치에 반대하는 단체들을 지원했고 반미, 반나토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동에서 깨어나 핵 자체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를 냈고, 소련에 대한 반대 여론도 함께 생겨났습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이 핵 전력 배치를 두고 첨예하게 대치하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1982년 11월, 소련의 제 5대 서기장인 브레즈네프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자유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을 막기위해 군사적 개입을 하고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할 수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했었죠. "When forces that are hostile to socialism try to turn the development of some socialist country towards capitalism, it becomes not only a problem of the country concerned, but a common problem and concern of all socialist countries." 그리고 제 6대 서기장으로, KGB 의장직을 지낸 유리 안드로포프가 취임합니다. 안드로포프는 소련의 체제개혁을 단행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1983년 여름 이후로는 공식적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이듬해 1984년 2월 사망합니다.) 여론이 들끓고 각국이 대치하고있는 이 시기에 소련은 리더십의 부재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1983년 3월, 미국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제국(Evil Empire)이라고 비난하며, 미사일 방어를 위한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발표합니다. 아래 그림4를 한번 참고해서 보시죠.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은 오른쪽 그림과 같습니다. 적의 미사일이 발사되는것을 우주 상공의 위성, 지상의 레이더 2개가 관측하여 거리를 측량한 후, 바다 혹은 지상에서 방어 미사일을 발사하여 미리 격추시키는거죠. 왼쪽의 그림이 초기의 구상입니다. 지금 봐도 조금 황당하죠. 지상에서 레이져를 쏘아서 위성2개로 반사시킨 뒤 적 미사일을 요격한다는 계획입니다. (지금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 기술은 모두 이 황당한 계획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그림4.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전략방위구상은 표면적으로는 말 그대로(Defense Initiative) 방어에 치중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방어가 곧 공격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핵폭탄이 개발된 이후, 핵전쟁은 상호확증파괴(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즉 한번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죽는다는 인식이 있었는데요. 선제공격을 받더라도 2차 타격으로 보복을 할 수 있도록 핵탄두를 수천,수만발씩 준비해두고 있었기 때문이죠. 때문에 핵을 보유하고 있는 각국이 서로를 위협하며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쪽이 상대방의 2차타격을 봉쇠할 수 있는 방어시스템을 갖는다는 것은, 일방적인 공격도 가능한 상태, 즉 균형이 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이 전략방위구상과 관련된 기술개발을 마치고 전력으로 배치한다면, 소련이 미사일을 발사한다고 하더라도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레이져로 요격한뒤 그 사이에 소련을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 구상에 대해서는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서방국가들과 소련 모두 반대합니다.
상황을 다시 한번 짚어보죠. 만약 미국이 전략방위 시스템을 실제로 도입해 전력으로 사용하려고 했다면 공표하지 않고 극비로 기술개발을 했을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그렇지 못했다고 하는게 맞겠네요. 전략방위구상에 들어가는 기술은 당시 과학자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을겁니다. 정밀한 측정을 하여 모든 상황을 맞춘 뒤에 실험실에서나 가능하던 상황을 머나먼 우주에서 실현하라는 말이니까요. 가능은 하지만 단기간에 되는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실제 전력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공개를 했다고 보는게 맞겠죠. 전략방위구상은 미국이 전략상 꺼낸 카드입니다. 그 전략의 목적은 상대방과의 전쟁이 아닌 대치 국면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에 있죠. 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우위를 가지고 상대보다 더 많은 '내 편'을 만드는 겁니다. 이러한 목적하에 전략방위구상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손에 쥔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소련과의 협상에서 한가지 패를 더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둘째, 이전과는 다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새로운 패라는 것이죠.
공포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최대 핵 보유국인 미국과 소련이었을겁니다.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능성은 서로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있다면, 그 사실 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큰 압박을 줄 수 있습니다. 위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소련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리더십의 부재,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 중국과의 불화, 경제적 재정 악화, 유럽에서의 여론조작 실패. 미국은 가능성을 키울 수 있는 능력이 되지만 소련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죠. 또한 미국은 소련보다 우수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퍼싱 II의 성능은 SS-20보다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무기를 갖고 있더라도 실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배치하지 못 한다면 소용이 없죠. 배치에 성공한다면 상대방을 코앞에서 압박할 수 있는 상황. 이 새로운 무기를 배치하기위해 적국과의 협상이 필요할텐데, 전략방위구상의 개발여부는 그 자체로 큰 압박이기에, 충분히 협상의 패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물론이고 세계의 여론이 공포의 균형을 두려워하며 전력 배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미국을 지지하느냐, 소련을 지지하느냐의 큰 틀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죠. 즉, 미국과 소련 입장에서 중요한것은 어느편에 서야하는가를 고민하고있는 주변 국가들을 자신의 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치국면에서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미국이 선택한 방법은 균형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발표한 전략방위구상에대해 군비경쟁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전쟁의 위험이 있다고 모두가 반대를 했지만, 세계가 언제까지고 핵미사일로 균형을 유지할 수는 없을거라고도 생각했을 겁니다. 벽에 부딪힌 인류가 항상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왔듯이 말이죠. 미국은 적대국가에 대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고안했고, 개발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전 핵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계획을 말이죠.
1960년대 소련이 ICBM발사를 성공하면서 미국을 위기감에 빠뜨렸다면, 1980년대 미국은 그에대한 방어책을 제시하며 소련을 위기감에 빠뜨립니다
4. 미국의 독일 지지. KAL 007 격추사건
1979년 나토 회의에서 미사일 배치가 결의된후, 1980년부터 3년간에 걸친 반핵운동이 있었지만 소련의 미사일 압박하에 있던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퍼싱 II 미사일 배치 결정을 고수합니다. 하지만 모든 나토 회원국들이 자국에 미사일을 배치하는것은 원치 않았죠. 이때 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인 나라가 독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변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는데 미국은 서독의 통일을 지지하고 지원해줬기 때문이죠. 1983년 6월,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게 10억 마르크 차관에 대한 보증을 섰습니다. 이 차관에 대한 조건은 국경지역의 여행규제 완화, 총격사살 금지 및 자동발사장치 제거, 교류확대, 회담 재개 등이었죠. 미국의 지원으로 독일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싶어했고, 미국은 그 대가로 독일에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합니다.
1983년 9월, 미국과 소련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은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국을 출발해 대한민국을 향하던 KAL-007편 대한항공 비행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하였고, 소련군 전투기에 격추당하는 KAL 007 격추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음모론이 제시되었습니다. 밝혀지지 않은 점도 있는 것 같고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소련이 격추한 비행기가 민간 항공기라는 것입니다. (전투기 조종사의 후일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에 민간항공기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에는 부인했습니다.) 소련군에게는 민간 항공기라는 사실이 군사적 목적을 띄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고 안보가 최우선이던 시기에 격추가 적절한 결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점은 군이 민간 항공기를 격추한 것이 처음이었고, 이는 소련에 대한 세계의 인식을 바꾸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같은해 3월, 이미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소련은 이 사건을 통해 민간 항공기를 격추할만큼 정말로 잔인한 국가가 된거죠.
5. Able Archer (11/2 - 11/11)
1983년 11월 2일, 나토는 데프콘1(5단계중 최고 단계의 상황으로 핵전쟁 임박 상황)의 핵전쟁을 가정한 Able Archer작전을 실시합니다. 소련은 Able Archer작전을 미국이 실제 핵공격을 하기위해 훈련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동독과 폴란드에 계엄을 선포함과 동시에 핵미사일 발사 대기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러한 대응방안은 2년전인 1981년, 소련의 작전회의로부터 시작됩니다. (81년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뛰어든 2년째 해이고, 미국이 이란과의 분쟁을 해결한 다음 해입니다.) 당시 서기장과 군 간부들이 모인 회의에서 미국이 비밀 핵공격 준비를 하고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그 대응책으로 RYaN 작전이 시행됩니다. 적국의 핵전력 시설, 미사일 발사 책임자, 기술자 등을 요원을 통해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핵공격 의도를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미연에 차단하는거죠. 당시 소련측 지도자들의 발언이나 이후의 보고서(The Soviet War Scare. 1990년 작성)를 보면 RYaN작전은 정보에 기반하여 시작됐다기보다 미국의 대응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본능적으로 실시한 작전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PSYOP(Psychological Operation)이라는 영국과 북유럽 주변 해양에서의 비밀 해상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는데요, 군함과 전투기등을 띄워서 소련의 레이더 탐지범위를 파악하고 핵전력 활용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작전이었죠.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4월에 실시한 작전은 40척 규모의 함대와 항공기 300대를 동반할 정도였으니, 소련이 위협을 느꼈을만 합니다. 또한 1983년 10월에는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소련의 미사일경보 시스템에 오류가 있어서 미국으로부터 하나의 미사일이 발사됐다는 경보가 울린거죠. 다행히도 당시 당직사관이 컴퓨터 오류로 인지해서 소련측에서 핵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소련은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중이었고 중국과는 반목했으며 경제적으로 하락하는 추세였으며 리더십의 부재를 겪고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있는 반면,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벗어나 이란과의 불화를 잘 넘기고 중국과 협력하고 경제적으로 상승세를 탔으며 새로운 기술을 발표했고 위와같이 소련에게 직접적인 군사 압박을 가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토군은 핵전쟁을 가정한 Able Archer작전을 시행한거죠. 소련은 세가지 측면에서 실제 공격을 위한 가장이라는 판단을 합니다. 첫째,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와 서독 총리 헬무트 콜 그리고 미국 대통령 레이건과 부통령 부시 등 국가의 수반이 작전에 참여한다는점. 둘째, 영국과 미국 사이에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암호화된 통신이 오고갔다는점. 셋째, 나토군이 핵 공격 상황을 가정한 데프콘 전단계를 대비한 훈련을 시행한다는 점(데프콘 1단계에서는 언제든 전쟁에 돌입할 수 있는 준비를 합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살길은 맞대응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 소련은 동독과 폴란드에 계엄을 선포하고 핵미사일 발사 준비 태세에 돌입합니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핵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첩보의 힘과 지도자의 역량이 드러납니다.
당시 영국주재 KGB 지국장이었던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는 1974년부터 영국 정보부에서 활동하던 간첩이었는데요. 그는 소련 지도부가 핵전쟁이 일어날거라는 위협을 느끼고 실제 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에게 보고합니다. 마가렛 대처 수상은 미 대통령 레이건에게 미국의 정책과 군사행동이 소련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지는 현 상황과, 이러한 상황이 이어진다면 나토 회원국들 모두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위협을 헤치고 다시 부상하기 시작한 나라인 미국을 이끌어가는 패기넘치는 대통령인 레이건과, 몇년에 걸친 미사일 대치 논의와 핵전력 배치 반대 시위를 근처에서 직접 접한 마가렛 대처 수상의 견해에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다행히도 영미 두 국가간에 이어져오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미국측은 영국측의 정보를 받아들여 소련과의 협상에서 이전의 강경대응보다는 완화된 형태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측은 소련이 실질적으로 미국의 군사력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스스로 소련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해 정말 위험한 상황까지 갔었지만, 결국 강경하게만 대응하던 소련의 속마음을 알고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는 결과를 얻어낸거죠. 하지만 긴밀한 동맹국인 영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 3차 세계대전 혹은 인류 종말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영국이 첩보활동을 통해 얻어낸 정보가 없었다면 미국이 긴장을 더 조성했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소련이 먼저 반응했을수도 있기 때문이죠. 반대로 소련 지도자들의 위협을 한계치까지 분석하고 기다리는 정신력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만약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있었다면 먼저 전쟁을 시작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이번주는 19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들어가는 세계의 흐름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의 모습도 이 시대의 틀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각자의 편가르기를 하고있죠. 과거에 핵전력을 서로 개발하고 제한했듯이, 이제는 전략방위구상이 미사일 방어 시스템으로 발전하여 각국이 관련 전력을 개발하고 서로 제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최근 시리아 내전이나 남중국해 분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국가간에 입장 표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에 앞서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되어야 한다는 것을 1983년 영국과 미국의 문제 해결 논의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간 관계의 큰 양상이 편가르기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이도저도 아니라면 양측에서 공격받을 수 있는 입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합니다.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가 당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의견을 듣고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집권 권력이 국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합니다. 민주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이 미얀마의 긴 군사정권 독재를 끝내고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국민들의 뜻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승리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부는 국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 있었던 민중총궐기 집회의 내용으로 제기된 항목들에 대한 뉴스는 찾아볼 수 없고 폭력집회로 번졌다는 일방적인 보도만 나오고 있습니다. 허무하고 힘이 빠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는 없습니다.
그래봤자 바뀌는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것이 부패한 권력을 가진 소수가 원하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 빠지는 때일수록 파이팅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이번주 글은 아웅산 수치 여사의 연설인 'Freedom from Fear'의 첫 구절을 전하며 마무리 하겠습니다.
백탄 드림. Copyright © 2015.11.15. 백탄 All Rights Reserved.
"It is not power that corrupts but fear. Fear of losing power corrupts those who wield it and fear of the scourge of power corrupts those who are subject to it." - Aung San Suu Kyi
첫댓글 Welcome 이다! ㅋㅋ
재밌네요 ㅋㅋ 잘읽고갑니다
어서옵쇼! 글 잘읽고 갑니다
와 일목요연한 정리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잀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