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사람으로 '츄마 사브로(中馬三郞)'이 있습니다. 그리 잘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이고,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도와 주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 정도는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되는군요.
다음 글은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역사비평 2003년 가을호입니다. 여기서 해방 후 일본인 잔류자들에 관한 글 중에서 3번째 글을 타이핑 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약간 힘들겠군요. 우선 왕만두 10개부터 먹고... 우걱우걱...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조선식산은행에서는 야마구치와 함께 또 한명의 일본인이 잔류했는데, 이 글의 두번재 주인공 츄마 사브로가 바로 그다. 그는 1930년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은행에 입사하여 본점 계산과, 부산지점, 도쿄지점을 거쳐 본점 증권과 대리로서 8.15를 맞이했다. 그는 입사하던 해에 행우회 잡지 '회심'에 당시 일본노동당의 빈민차금지불연기법안을 소개하면서 서양과 일본 역사에서 그러한 예를 살피는 글을 싣고 있다. 조선사에서도 이런 제도가 존재했다면 가르쳐주길 바란다며 끝맺는 이글은 더러 논리의 비약이 있지만 젊은 날 그의 열정과 호기심을 느끼게 한다.
30대 후반 세 아이의 아버지로 식민지에서 패전을 맞이하여 돌아가기도 바빴을텐데, 그는 한국인 은행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46년 2월 중순까지 잔류했다. 그는 평소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동료 은행원이 대거 귀국길에 나섰던 1945년 11월 23일부터 자신이 떠나던 날까지 거의 매일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11월 23일자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1월 23일(금)
아침에 서리가 많이 내려 하얗게 덮였지만 낮에는 의외로 따뜻했다. 종일 쾌청...... 아침식사 때 도모코(둘째 딸)가 어젯밤 강도가 침입하는 꿈을 꾸었다며 울었다. 모두 얼굴을 마주보았다. 딸을 달래는 나 자신의 얼빠진 말에 화가 치밀었다. 자식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여 조용히 식사를 했지만 목이 매여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하나의 고통을 문제삼아 잔류승낙을 번복할 수는 없다. 고통은 당연히 예정되었던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나쁜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서 내림 결과이다. 이러한 때에 1인이라고 해서 부탁받고서 일을 가르쳐준다고 말하고 도망가서는 안된다. 사치코(처)나 자식들에게는 면목없지만 일본인으로서 아버지의 마지막 독단일는지 모르지만 이 행동을 허락해달라......
무엇이 그로 하여금 가족의 고통을 무릅쓰고 잔류하게 했던가. 일본인으로서 최후 독단이란 무엇인가. 8. 15가 일주일 정도 지난 뒤, 은행접수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한국인 은행원들과 '독립본부 금융반위원'이라는 사람들이 츄마를 찾아와 이렇게 제안했다. 첫째, 은행업무에 대해 자체적으로 대략 연구와 준비를 할 수 있지만 당신이 맡고 있는 증권업무는 전혀 모르니 남아서 책임자로서 지도하고 가르쳐주기 바란다. 둘때, 잔류중에 일체의 생활을 보장하며 귀국도 책임지겠다. 셋째, 만일 가족이 먼저 귀국을 희망한다면 우리 손으로 책임지겠다.
해방 당시 조선식산은행 직원은 대략 3천여 명이었는데 그중 30~40%가 한국인이었으나, 비서부, 인사주, 검사부, 특별금융부 같은 핵심부서나 전쟁 관련 부서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츄마가 임했던 증권부도 장기성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식산채권 발행을 담당하였고 전시기에는 전비 조달을 위한 국채 인수, 군수산업체의 유가증권에 대한 투자를 맡았던 중요부서인데, 1942년과 1943년 '직원명부'를 보면 창씨개명 탓으로 확실하진 않지만, 한국인 행원은 야구선수로 유명한 이영민을 비롯하여 한두명에 불과했다. 해방 이후 조선식산은행이 계속 장기산업금융기관으로서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증권업무를 반드시 익혀야 했던 것이다.
츄마는 평소 자신이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찾아가 의견을 구하였다. 잔류를 제의받은 그날 밤 은행 이사인 이시가와를 찾아갔으나 "나로서는 뭐라고 얘기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다음날은 식민지 초기에 조선으로 건너왔던 은행 동료의 아버지를 찾아가 상담했다. 그 자리에서는 "제의를 받아들이길 희망한다. 일본과 조선은 이웃 동지로 먼 옛날부터 배우거나 가르쳤던 사이이다. 이와같이 혼란할 때에 그 노고와 심로는 상상 밖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일부 조선인 중에는 일본인 이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 있다. 나는 많은 실례를 체험했다. 이러한 때야말로 일본인으로서 기상을 보여주라."는 격려를 받았다. 그 다음에 조선 식산은행 이사였으며 당시 불이흥업 사장이었던 야나베를 방문하여서는, "언젠가 일본과 조선은 사이 좋게 될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한 사석이 된다는 기분."으로 결심하라는 격려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처와 상의했는데 이별은 절대 안된다고 하여 가족과 함께 잔류를 결정했다. 츄마가 이런 결심을 은행에 말했을 때 당연히 한국인 행원들은 박수를 쳤으며, 일본인 행원 중에서는 불쾌한 말을 하거나 자중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래도 대부분은 격려를 보냈다.
1946년 2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츄마가 한 일은 대략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중심이 되었던 일은 각종 업무지침서 작성이었다. '금고내 정리 요항', '식산채권 원리상환 해설', '식산채권 해설', '증권사무 교본' 등을 작성하여 관련 직원들에게 설명했다. 두번째는 기획에 관련된 것으로 '장기자금 조달에 관한 의견서' 작성이 이에 해당한다. 세번째는 은행의 현안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부동자금 회수를 위한 복권발행, 권업증권 주식회사에 대한 채권관계 정리등을 기안하고 처리했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한국인 중역의 부탁을 받아 미국정청에 가서 복권 발행을 위한 설명까지 했다. 네번째는 각종 문제에 관한 자문거 처리이다. 식산채권의 원리금 지불과 결산의 관계를 해결해주기 바라는 계리부의 요청을 비롯하여 여러 부서들과 지점, 금융조합으로부터 많은 문의가 들어왔으며, 이에 대한 답변과 지도가 그의 주요 일과였다. 특히 1946년 1월 말 그의 귀환이 결정되고 나자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한국인 행원으로부터 각종 질문이 매일 쏟아졌고, 그의 응답과 해설, 지도는 부산행 귀환열차가 출발하기 전날까지 계속되었다.
교육효과는 빨리 나타났다. 츄마가 쓴 지침서는 주로 홍승희가 번역을 맡았따. 11월 30일자 일기에는 "홍군이 조선어 번역을 개시하다. 홍군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았으므로 가르치는데 꽤 손이 많이 갔다. 그러나 성실하고 열심인 청년이므로 기분이 좋았다." 12월 4일자 일기에는 "홍군이 식산채권 원리상환 해설을 번역하기 시작했지만, 홍군은 증권사무 경험이 얕아 번번히 질문을 해온다...... 충분히 설명하면 가득 메모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1946년 1월에 복간된 행우회 잡지 '무궁' 창간호에는 홍승희가 12우러 15일에 쓴 '해방조선과 식은이 당면한 제문제의 일 고찰'이란 글이 실려있다. 그는 이 글에서 은행의 발전을 위해 개척해야 될 부분의 하나로 일원적 증권정책을 꼽았으며, 국가의 재정확보, 산업자금의 유통, 대중자본 동원, 팽화통창의 수축책 등에서 증권업무의 중요성을 정확히 말하면 증권업무에 대한 한국인의 경험을 거의 없었고, 해방 이후 일본인에게 과외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추가> 일본인이 우리나라에서 어이없게 한 일
일본인이 조선인의 물건 훔쳐도 무죄, 강간해도 무죄, 살인해도 무죄, 기타 범죄를 저질러도 무죄(또는 훈방조치)
1년 내내 조선인들이 일궈낸 쌀같은 농산물, 헐값(거의 공짜)에 사서 일본으로 빼돌리기......덕분에 조선인들은 다 깡통을 차며 살았다.
자원 약탈, 농산품뿐만 아니라 철이나 나무같은 자원도 다 빼앗아갔다. 한국이 자원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은게 이 때문.
조선인들 너무 부려먹었다. 그러면서도 임금은 아주 조금 준다. 노조 파업 일으키면, 경찰이나 야쿠자를 동원해서 전부 죽여버린다.
태평양 전쟁땐, 남자는 가미가제(자살 특공대)를 비롯해서 전쟁에 징병(군인으로) 징용(노동자로, 울 할아버지도 끌려가셨다.)에 끌고 가서 개죽음을 당하게 내버려뒀다.
여자는 전쟁에 지친 군인들의 성욕을 해결해주는 위안부(쉽게 말해 군대 창녀)로 끌고가서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임신하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남자 4~5명당 여자 1명이다.
교육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고구려를 싸구려로, 백제를 배째로, 신라를 쉴라로 만들어 버렸다. 엉터리 역사에, 엉터리 가치관, 엉터리 말을 심어놨다. 아직까지 청산 안된게 한스러울 뿐이다.
참......어이가없어서....자기나라사람이면 다른나라사람 죽여도된다는건가....;;;
첫댓글 아 역시 세상은 나쁜사람은없는듯
지금의 모모씨하곤 딴판이군
어떤나라 사람이든 어떤 국적을 가지고 있든 인간성이 된 사람은 국적나이 불문하고 전부 좋아함...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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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 그게 가장 중요한것 같아요..
6666 요것이 진리
7777 진리~~~
8888 인생의진리!
10101010 진리입니다.
1111111111111111111111 제발 내 주위엔 인간성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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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1414141414진리임ㅠㅠㅠ일본인이건 아니건 인간성이 문제임ㅠㅠㅠㅠㅠㅠ일본인이라고 무조건 싫은게 아님
151515 객관적인 시각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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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17 맞아요.
그래도 난 일본은....정이...하아
하아 이런 일본인들만 있었으면 반일감정이 조금이나마 약하지않을까라는 생각이
개천에서 용낫네
좋은글인데....................왕만두만 안먹었으면 진짜 좋은글인데....
22...우걱우걱...우걱우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쨋든 자신의 조국을 뒤로하고 조선을 도와줬다니 멋진분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