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사람들이 평소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자를 나쁘게 욕할 때 “화냥년”,
그리고 버릇없는 못된 사람 주로 남자를 말할 때 “호로자식”이란 욕을 하는
경우를 들을 수 있다.
그 욕들의 역사적인 유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 丙子胡亂 1636년 12월~1637년 1월30일
정묘약조(1627년)에 따라 조선은 후금의 요구대로 세폐(歲幣)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으나 후금은 1636년에 약정한 조선과의 '兄弟관계'를 폐기하고 새로 君臣관계로 개약(改約)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1만 냥, 전마(戰馬) 3천필(匹)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폐와 정병(精兵) 3만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했다. 이때 후금은 이미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明)의 북경 주변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요구를 조선이 거부하자 後金은 (1636년 4월) 국호를 淸으로 바꾸고 황제로 등극한 청태종은 12만 군사를 직접 이끌고 그 해 1636년(병자) 12월에 조선을 침략하였다.(병자호란)
大軍에 밀린 朝鮮軍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仁祖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淸과 君臣(군신)의 義(의)를 맺는 한편,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斥和論(척화론)을 펼치던 '3학사'(홍익한,오달제,윤집) 등도 淸으로 끌려갔다. 뿐만 아니라 청군들은 철수하면서 상당히 많은 조선인들을 끌고갔다.( 여러 사료를 참고하면 공히 50만명 추산)
▶ 화냥년
仁祖의 항복으로(1637년1월30일) 전쟁이 끝났다고 온 백성들이 좋아하다 보니 며칠후 백성들이 궁궐 앞에 모여들어 淸나라에 끌려간 딸과 며느리는 물론 아내를 구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仁祖는 淸에 끌려간 인원을 조사해보니 대부분 婦女子들로서, 그수가 50만 명이나 됨으로 淸에 사신을 보내어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淸나라는 끌려간 사람들을 등급을 매겨놓고 엄청난 돈을 요구하므로 仁祖는 하는 수 없이 백성들이 각자 재산을 팔아서 그 돈으로 청나라에 가서 데려오도록 하여 상당수의 女子들이 (많은 돈을 주고서)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女人들을 還鄕女(환향녀)라 부르면서 온 동네에서는 고생하고 돌아왔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반면 어떤 경우에는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려지지 않아 이혼문제가 발생함으로서 정치,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還鄕女들은 淸나라에 끌려가서 청군들에게 못된 변태적 성관계를 배워와서 온 동네 남자들을 모두 해치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女子들이 사회문제화되고 있으나 국가에서 묘한 방법이 없으므로 그대책을 각 가정(또는 문중)에서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각 가정에서는 老人들이 밤낮으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부녀자들의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였음은 물론, 부득이 외출을 할 때도 치마 같은 것을 뒤집어 쓴 후 눈만 내놓고 다니게 하고 게다가 감시자를 동행케 하였다.
※ 이때부터「환향녀」를 화냥년이라고 하며 멸시의 대상이되었다.
▶ 호로(胡虜)자식
이들 환향녀들은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로 즉 오랑케 자식이라 하여사회에서 냉대하였다. 애비없는 자식 혹은 애비가 누군지 모를 자식이란 이야기 입니다.
▶ 역사적 의의
환향녀나 호로자식들은 멸시의 대상이 아닌 피해자들이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왕(인조)이 평소에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지 못했고 또한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으며. 전쟁이 나자 왕 밑에 신하들은 왕을 홀로 두고 도망가기 바빴다. 또한 남자들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결국 나약한 여성들만 끌려가서 청군들의 노리개가 되어 처참한 성적노예생활을 하다 돌아왔는데 조선에서는 전쟁에 대해 책임지는 자가 없이 모든 것을 온갖 모진 성학대를 받고온 불쌍한 여자들에게만 죄를 뒤집어씌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위의 글은 중국의 수천년에 걸친 우리민족 침탈의 한 단면 입니다.
일본이 침탈한것의 수천배는 더 오랫동안 더 많이 더 잔인하게 우리 민족을 침탈했지요.
일본이 우리민족을 침탈한건 두고두고 일본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면서 중국에 당한건 병신도 그런 상병신이 없을정도로 아무말 못하는게 정상은 아닐진데 중국에 사는 교민들까지 중국찬양을 하고 있는 골빈 현실이 통탄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국이 찬양할만하고 중국을 배워 되도 않은 자신의 가난 합리화용 미래를 외치기 이전에 민족의 자존심은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가난할수도 부유할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공수래 공수거 아니겠습니까?
박삼중 스님이 저승갈때 뭘 가지고 가냐 라고 화두를 던지기도 했고요. 저승갈때 무슨 김밥하고 쥬스 그리고 돈가지구 가는건 아닙니다.
가난해도 좋습니다. 가난이 천하고 비굴해 보이는건 자존심마저 잃는 경우입니다.
가난해도 바르고 정직하게 그리고 자존심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한다면 그 사람의 가난을 탓할이는 아무도 없을것이고 그런 사람은 당연 성실하게 살터이니 그 가난은 언젠가 청산될것 입니다.
내위치알려면 네 이름부터 밝혀라 그래도 생각해볼까 말까인데 ㅉㅉㅉ 왜 네 자존심에 상처 받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