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가 진에게 선양한 것이 265년의 일인데, 이해에 사마염의 나이가 30세였습니다. 사마염의 통치는 총 25년으로, 자신의 시대에 중국통합의 사업을 마무리지은 것이 치적으로 꼽힙니다. 대신 실정이 매우 많은 황제입니다.
황제 자신의 능력은 모자라다거나 그렇다고 분에 넘쳐 주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간언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선악을 구별하는데에도 혜안을 지녔던 인물입니다. 문제는 위정자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실천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 위나라는 금고정책으로 황족들이 자신의 봉토에서 벗어나는 것을 금지하고 조정의 일에 참여하는 것도 막았는데, 이로 인해 왕공대신들의 자리를 호족들이 차지하고 결국 그들의 새로운 나라인 진에게 황위가 옮겨가게 됩니다. 앞선 폐해를 막고자 일가의 가장이 되는 이들에게 여기저기 봉토를 나누어주었는데, 문제는 그들이 통수권자였으며 지나치게 많아 나중에 8왕의 난을 일으킬 수 있는 기반을 주게 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현명했고 훗날 2대 황제의 국사가 될 수 있었던 친동생 사마유는 조야의 신망을 너무 많이 얻고 있다는 이유로 중앙에서 내보내고 엄격하게 대하는 바람에 분사하게 만듭니다.
2. 재위 초년, 산기상시 부현이 조정의 기강이 헤이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조서를 올렸으나 실질적인 대처를 하지 않아 결국은 사치스럽고 부패한 조정으로 가는 것을 방치합니다. 이것은 사마염 시대의 최대 실세였던 가충과도 연관됩니다.
3. 사마소는 차남인 사마유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으나, 가충, 순욱등의 무리가 세자인 사마염을 위해 힘썼기 때문에 그가 진왕이 되고 황제에도 오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사마염은 대체로 이 파벌이 하는 일에 손을 대지 않는데 통치기 내내 이들의 전횡으로 나라가 멍들고 있다는 조서가 이어지지만 결국은 손대지 않습니다.
4. 오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통일전쟁도 실상은 가충이 반대해서 늦어진 사건입니다.
5. 오나라 손호의 투항을 받은 자는 왕준이었는데, 왕혼이 그의 상사로서 공적을 가로챈 것을 묵비합니다. 이 일에 대해 진수가 직접나서 황제에게 잘못됨을 이르지만 보국대장군이 되는 것으로 논공행상이 그칩니다. 전공에서는 1위였으나 대접은 그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왕준은 이를 죽을 때까지 한스럽게 여깁니다.
6. 위무제 조조 이후로 형명사상이 통치의 기초를 이루었는데, 무제시기에는 총 3천가지의 법령이 새로 생겨나게 됩니다. 두예가 이를 두고 법령을 세밀히 하는 것은 절차를 복잡하게 하여 부패의 온상이 될 수 있으며, 인사를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임용한 자리에서의 실적을 두고 평가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묵인합니다.
7. 또한 사마염은 의심이 매우 많았는데, 수춘에서 10여년을 회남지방을 위무한 대사마 석포를 탄핵하자 그를 토벌하려 합니다. 다행히 손삭과 여음왕 사마준이 의심을 풀어주나 병권은 회수되고 작위만 가진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8. 최대 실정중에 하나로, 태자인 사마충의 비를 가충의 딸을 데려와 세웠다는 것입니다. 가황후의 전횡은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의 단서가 되며 진나라 패망의 촉매제 역활을 합니다. 본래 사마염은 위관의 딸을 염두했으나 순욱, 풍담등이 아첨하여 뜻을 바꾸게 됩니다.
[ 처음에, 황제는 위관의 딸을 태자비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는데, 가충의 처 곽괴가 양황후의 주위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황후로 하여금 황제에게 그의 딸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게 하엿다.
황제가 말하였다.
" 위공의 딸은 다섯가지 좋은 점을 갖고 있고 가공의 딸은 다섯가지 취해서 안 될 것을 갖고 있소. 위씨의 집안은 현명하고 아들을 많이 낳으며 아름답고 키가 크며 피부가 흰 것이오. 가씨의 집안은 질투가 심하고 아들이 적으며, 추하게 생겼고, 키가 작으며 피부가 검은 것이오."
황후가 굳게 청하였고, 순의와 순욱, 풍담이 모두 가충의 딸이 아주 미인이고, 재덕을 갖추었다고 칭찬하자 황제는 드디어 이 말을 좇았다. ]
9. 가충이 외척이 되자 권력을 오로지 하기 위해 붕당을 조성하는데, 애초에 사마염은 가충과 임개(반가충당의 거수)를 불러 화합하기를 명령하지만, 가충이 임개를 조당에서 물러나는 인사조처로 접촉을 줄이고 자신의 파벌인 순욱과 풍담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합니다. 해서 폐출됩니다.
10. 양호는 왕융이라는 자가 풍속을 훼손할 사람이라 여겨 그를 군법으로 죽이려 했는데, 이에 유감을 품은 왕융과 그의 사촌동생인 왕연이 자주 양호를 훼방놓아 오나라 정벌을 어렵게 만듭니다. 여기에 더해 가충등도 양호를 시기하여 옳은 일도 아니라고 우겼는데 사마염은 이를 방기합니다.
11. 사마염이 방기한 것중에 중국역사를 바꾸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 있는데, 북방 이민족들의 투항과 융화를 계속해서 좌시한 것입니다. 더구나 통일이 된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병력의 규모를 줄이고, 한족이 살지 않는 땅에는 이민족의 고을이 생기도록 장려했는데 이것이 오호의 대두에 영향을 줍니다. 남방의 경우 운남등이 있던 영주를 폐지하여 이민족의 거처로 완전히 환원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훗날 진나라를 직접 멸망시키는 흉노족을 국경 안에 살게 허락한 일입니다.
12. 죽음에 이르러 그의 황후의 일족인 양준이 제멋대로 조서를 남발하고 조정을 제 사람으로 채웠는데 이를 보고 함부로 이래도 되느냐고 호통하지만 벌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그가 죽은 뒤에 외척이 발호하여 팔왕의 난으로 이어집니다.
13. 중국이 통일되기 전의 일화인데, 낙릉공 석포의 아들 석숭과 황실의 외척의 지친인 왕개가 서로 재산을 두고 경쟁했는데, 사마염이 뒤에서 왕개를 지원합니다. 태자 사마충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밥을 먹지 못하고 굻어죽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밥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정치가 어디까지 타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첫댓글 통일한거 빼곤 제대로 한게 별로 없군요-_-;
새로운 왕조가 번창하기 위해선 사상의 통합과 국방력의 증대(황제중심의 권력강화)가 필수입니다. 사마염이 통일후 이 두가지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체 능력없는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이 난세를 더욱 길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의 반란을 막기위해 지방군권을 줄여버리고 친왕들에게 군권및 많은 권력을 나누어주었죠. 이후 이민족의 침략을 제대로 막기 힘들었고, 설상가상 그 친왕들의 난(8왕의 난)으로 나라를 거덜내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사상의 통합면에 있어선 삼국시대를 지나면서 유교에 대항한 새로운 사조들을 통합하지 못한것을 예로 들수 있을듯.. (요부분은 저도 잘.. ^^;;;;)
Louis Gehrig님의 글 항상 잘보며 해박한 지식에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저역시 자치통감(번역본)정도만 겉?기 식으로 읽은 경험 정도라... ^^;;; 삼국시대를 볼때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다름 아닌 여포에 대한 겁니다. 삼국지연의의 내용에선 무식하고 힘만센 망나니정도의 평가를 받는데요, 과연 그정도의 인물임에도 조조가 연주를 비웠을때 반란의 수장으로 추대되었다는 점... 유비에게 서주를 빼앗은 후 많은 지방호족(연의에선 산적들이라 합니다만...)의 합세로 군세를 불렸다는 점과 여포에 대한 민란등에 대한 사료가 거의없다는 점... 여포에 대한 님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본문과 상이한 이야기를 길게 적게 될 것 같아 제 리플은 우선 지웠다가 따로이 글로 올리겠습니다.
예...항상 좋은 정보를 주시고 덕분에 많이 배우는 입장에서 본글에 대한 내용과는 다른 이야기 전개가 된점 사과드립니다. 저역시 지우겠습니다. 다음 글 기대합니다. ^^
언제나 잘보고 있습니다..삼국지 왕 좋아하는데.. 좋은 정보 항상 감사드립니다
저도 항상 잘보고있습니다 ^ ^ 궁금한게 중국어를 약간 할줄알아서 그러는데 이런것들 보통 원서로 보나여? 한번 중국어로 읽고싶어지네여,(어렵겠지만;;;) 루게릭님은 보통 원문에 자신의 생각을 더해서 댓글쪽에서 다양한 설명을 해주시는것같고, 예전 레드보이스님은 할머니 동화들려주듯이 재밌게 썰을 푸는 차이점이 있더군여, 두분다 너무 좋습니다. 다만 요즘 레드보이스님은 안들어오시는것같다란T T
원서로 찾아 읽기도 하지만, 한문실력이 짧습니다. 대강의 해석만 하고 번한된 원문을 두고 해석을 제 멋대로 달리 하는 정도입니다. 여기에 적는 것은 그런 아마추어적인 것은 아니고, 출판사에서 번역한 글을 옮기는 것이고요. 본래 말을 푸는게 현학적이라 동화같이 적지는 못하겠네요. 제 글은 보기 좋은 건 버리고, 어투가 고대풍으로 느껴지도록 많이 유도합니다. 레드보이스님은 제 알기로 군대 가셨던 것 같습니다.
동화같이 적어달라는게 아니라 Louis Gehrig님 글은 마치 네이버 오픈지식 보는것처럼 정리가 잘되어있어서 보기 참 좋아여, 답변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남겨주세여 ^ ^
사마유를 중앙에서 내쫒아 제왕에 봉해버린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고 봅니다. 너무 심한 처사라 비판하던 이들은 면직되었다고 하고...
사마염이 앓아누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조정 중신들중 일부가 사마유가 그 다음을 이어야 한다고 수근대는 게 귀에 들어갑니다. 본래 사마염의 모친인 태후가 죽기전에 유명으로 동생을 아끼라고 신신당부합니다만, 저 위에서 이름이 가장 많이 나온 가충, 순욱등이 이간하고 모략하여 중앙에서 내쳐집니다. // 사마유가 제왕으로 봉해진 것과 실각은 다른 의미입니다. 이미 황위에 오를 때 사마유는 봉국을 가진 신분이었습니다. 직접 가서 통치를 하지 않은 것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