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매일 쫓기며 살까?
어떤 사람이 평소에는 마음에 들다가
어느 한 순간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저쪽에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내 쪽에서 먼저 일으키는 현상입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이를 직시할 여유를 주자는 말입니다.
사람은 슬픈 모습을 지을 때고 있고,
사람은 기쁜 모습을 띨 때도 있습니다.
같은 인물의 똑 같은 얼굴인데,
기분을 좋을 때 보면 얼굴이 환하지만
삐쳤을 때의 얼굴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사실 세상이라는 스크린에 비친 그냥 그것일 뿐입니다.
한 법우님이 어느 날,
아만我慢으로 가득 찬 자신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어두운 생활을 청산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간단하지만 멋진 방식을 시도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사람씩 떠올려 가면서
90도 각도로 절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보면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허공에다가 절을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효자로 행세하지만
속마음은 앙금이 가득 쌓인 아버지께,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하는 일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목에 힘을 주며 무시하던 부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범위는 자꾸 확대되었습니다.
사업할 때 돈을 떼어 먹고 달아난 동업자와 같이
서운했던 사람도 떠올리며 “감사합니다!”한 인사를 하다 보니,
어느 날 동업자가
꿈에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고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공연히 나쁜 쪽만 받아들여
꽉 움켜잡고 살아왔더군요.
그러니 원망하는 마음으로 항상 자신을 괴롭혔던 것이지요.”
곳곳에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이 법우님은 감사한 마음을 수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콜라나 사이다의 병마개를 따면 거품이 올라옵니다.
공장에서 병속에다가 탄산가스를 주입하였기 때문인데,
그렇게 하면 내용물의 양이 늘어날까요?
그래도 입니다.
그런데도 뚜껑을 열면 거품이 나온다는 것은
물분자分子와 물분자 사이에 무슨 틈이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탄산가스가 비집고 들어갈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 틈이 없는 게 아닙니다.
엄청난 탄산가스를 주입해도
그 물의 양은 까딱도 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탄산가스를 주입했는데 똑 같은 양인걸
눈으로 직접 보면서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과 사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생명이 개입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자기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거나
또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지내고 있을 뿐입니다.
법당도 사실은 공간에다가
우리가 ‘이곳은 법당’이라고 자리매김을 했을 뿐입니다.
같은 공간일지라도
다른 목적으로 쓰이면 그 때는 법당이 아닙니다.
쓰는 사람이 어떤 생명 내용을 갖고 쓰느냐에 따라서
공간은 규정되는 것이므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도 그렇습니다.
싫은 사람하고 5분 지내는 것은 소름이 돋지만,
좋은 사람과는 5시간도 후딱 지나갑니다.
시간도 고정 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생명이 개입됩니다.
생명이 개입되면 그 시간은 살아납니다.
자신의 생명을 투여한 만큼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존재합니다.
없던 게 아니라,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 속에서 살아지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너’를 발견합니다.
이때 비로소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무한한 생명력은 누구의 소유가 되는 게 아니라,
모두의 근원이 됩니다.
이제 자신의 근원을 잘 찾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여유를 먼저 주는 것입니다.
조건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그리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쫓기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오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차시기 바랍니다.
2024년 01월 26일 오전 07;10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운월야인雲月野人 진각珍覺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