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민우의 시시각각] '통신사의 MBC' 꿈꾸는 KT
중앙일보
입력 2023.03.14 01:06
최민우 기자중앙일보 정치부장
#1. 2019년 12월, 신임 회장 선발을 위해 KT 이사회가 열렸다. 최종 후보 2명을 두고 투표한 결과 박윤영 5표, 구현모 4표였다. 예상을 깨고 박윤영 부문장이 CEO로 선출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몇몇 이사가 난색을 표하면서 “지금은 확정이 아니라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이라고 말을 바꿨다. “말귀 참 못 알아듣네…”라는 협박성 하소연도 나왔다. 결국 재투표 끝에 구현모 5표, 박윤영 4표로 결과는 뒤바뀌었다.
이달말 예정된 KT 정기 주주 총회에서 윤경림 부문장의 차기 대표이사 확정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KT 사옥의 모습. 연합뉴스
#2. 2021년 말 구현모 대표 경영평가를 이사회 내 ‘평가보상위원회’가 진행했다. 당시 구 대표는 ‘상품권깡’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국회의원에게 후원한 혐의(횡령 및 정치자금법 위반)로 재판 중이었다. 평가보상위는 이를 감점 요인으로 간주해 ‘중간’ 등급 판정을 내렸다. 등급이 중요한 건 성과금이 달라져서다. 이에 사외이사 한 명이 이의를 제기했고, 이사회는 평가보상위 결정을 뒤집고 등급을 상향시켰다. 이로 인해 구 대표는 그해 성과금 9억4600만원 포함해 연봉 15억2200만원을 받았다. 당시 이사회 회의에서 평가보상위 성태윤 위원장(연세대 교수)과 박찬희 위원(중앙대 교수)은 등급 상향에 동의할 수 없다며 기권표를 던졌는데, 둘은 이듬해 3월 나란히 이사 연임에서 탈락했다.
#3. 2022년 3월 박종욱 공동대표의 사내이사 연임 여부가 논란거리였다. 당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한국ㆍ베트남에서 공무원에게 부당한 대가를 제공해 해외부패방지법(FCPA)을 위반했다며 KT에 거액의 과징금(75억원)을 부과했다. 그러자 “‘쪼개기 후원’에 연루된 박 이사에게 75억원 구상권을 행사해야 할 판인데 연임이라니 가당키나 하냐”는 성토가 빗발쳤지만, KT 이사회는 이를 모른 척했다.
구현모 KT 대표가 지난 1월 18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정치자금법위반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12년 만에 KT 출신 CEO를 배출해 “관치 탈피”라며 자부하던 ‘구현모 체제’에서 벌어졌던 일들이다. 그리고 이제 KT는 구현모 체제 존속을 위해 현 여권과 일전을 불사하고 있다.
당초 구 대표는 지난해 말 연임을 시도했다. ‘연임 우선’이라는 KT 이사회만의 규정이 무기였다. 하지만 기류가 심상치 않자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일단 ‘KT 숨은 실세’로 불린 이강철 전 노무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1월 사외이사직에서 물러났다. 2월엔 구 대표가 연임 포기를 선언하고 공모에 들어가 전ㆍ현직 임원 4명이 차기 CEO 후보로 압축됐다. 정당성 확보를 위한 치밀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때 여권이 공개적인 압박에 나섰다. 박성중 의원 등은 4명 후보를 두고 “KT 사장 돌려막기다. 이권 카르텔 인선 중단하라”고 했고, 대통령실도 “모럴 해저드”라며 가세했다. 하지만 느닷없어 보이는 여권의 공세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민간기업 인사에 개입해도 되냐”는 역공의 빌미가 됐다.
7일 KT 이사회에서 대표이사 후보로 선임된 윤경림 트랜스포메이션부문장(사장). 연합뉴스
여론이 유리해지자 KT 이사회는 지난 7일 여당이 ‘구현모 아바타’로 꼽았던 윤경림 부문장을 차기 대표로 선임하는 강수를 뒀다. 대신 윤석열 캠프 경제특보였던 임승태씨를 KT 사외이사로, 윤 대통령 충암고 4년 선배인 윤정식씨를 자회사인 KT스카이라이프 대표로 내정했다. ‘앞으로도 대통령 측근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 우리 몫은 건들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하지만 두 사람 공히 “방패막이가 될 수 없다”며 사의를 표하면서 양측의 긴장감은 더 팽팽해졌다.
향후 변수는 검찰 수사와 이달 말 주주총회다. 특히 주총에서 국민연금 등 대주주는 윤경림 반대 기류지만, KT는 소액주주 결집에 나서고 있다. KT 노조(제1노조)도 경영진의 지원군이다. 무엇보다 거수기 전락, 셀프 추천 등 주인 없는 지배구조를 둘러싼 숱한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KT 경영진과 이사회가 이번 여권과의 전면전을 버텨낸다면 진정한 아성(牙城)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통신사의 MBC’가 이제 KT엔 꿈이 아니다.
최민우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