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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기억의 조각
"앞으로 신의 울타리까지 굶어죽을 걱정은 없겠군."
각자의 가방이 터질만큼 꽉꽉 눌러 담아도 다 담지 못한 식량을 쳐다보며 시얀이 중얼거리자,
해리나가 자신의 가방에 보존 마법과 경량 마법, 그리고 공간 마법을 걸고서는 흡족한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은근 능력있네? 하룻밤만에 저 많은 식량을 구해오다니. 다시봤어!"
"여,역시 산은 보물창고라는 옛조상들 말씀은 하나 틀린게 없는것 같아요. 하..하핫!"
어젯밤에 만난 오크들의 정신나간 짓에 대해선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냥 뭘 잘못먹어 집단 식중독에 걸려 미쳤을수도 있고...그 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닥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어제의 사건이 정말 꿈속에 나오고도 남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것 만큼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보통 사람의 십중팔구는 이 이야기를 전해줘도 믿지 않을것이 분명한 개소리 혹은 잡소리에 속하는 말도 안돼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공포에 가득 질리다 못해 핏줄 터지기 일보직전인 눈알을 해서는 넙죽 엎드려 고개도 못들고 질질 짜는 모습이라니...정말 그냥 단체로 돈건가? 이 멍청한 오크들이 광우병 걸린 소를 잡아다 마을 잔치라도 연거 아냐? 아니면, 이 산에서 흐르는 물에 정신이상을 일으키는 독이라도 들었나?
원인에 대한 추리를 계속하면 할수록 겉잡을수 없어지는 망상력에 고개를 휘휘저으며, 결론 '이 산에서 나는 물과 음식을 조심하자' 에 이르른 내가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출발 준비로 짐을 꾸리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던 유라크가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제 시얀이 찾으러 갔었는데, 한참만에 혼자 돌아왔어요. 말은 안하지만 걱정을 많이 했는지 얼굴색이 창백했다구요."
찾으러 왔었다고? 시얀이...나를?
유라크의 말에 오늘도 역시 묵묵히 짐을 챙기는 시얀 쪽을 슬그머니 돌아보자, 출발 준비를 마친 시얀이 짐가방을 어깨에 매는것이 보였다. 어쩐지 어젯저녁부터 말 한마디 없이 할 일만 하고 돌아선다 싶었더니...걱정을 한건가?
"이제 출발하지. 지체할 시간이 더이상 없다고."
내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후적후적 걸어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걱정은 커녕 오히려 좀 쌀쌀 맞아진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내게, 역시나 남 편한 꼴이라고는 단 1초도 눈뜨고 못보는 해리나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가방을 휙하니 던져주었다.
아무래도 내가 지어야할 내 업보(?)인듯 싶어 별수 없이 커다란 가방을 힘겹게 어깨에 매는 나였다.
물론 맬 때 매더라도 없는 배짱으로 토다는 일은 절대 까먹지 않고 말이다. 억울한 것은 곧 죽어도 입밖으로 내야하는 성미니까.
"우씨!! 해리나, 치사해요!! 나도 경량마법 걸어주세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날두고 누가 지어낸 말이던가.
간이 배밖으로 나왔음을 과시하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개도 화들짝 놀라 도망갈만큼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
"니가 처배워서 쓰세요."
"........."
해리나는 말을 참 곱게 하는게 귀족집 영애 티가 팍팍난다.
누가 혹여나 귀족집 따님 아니시냐고 물을까 두려워 일부러 저리 거친 말만 골라 써주는 그녀의 주도면밀함에 오늘도 박수갈채를 보내는 바이다.
불만 가득한 내 표정에 '힘도 좋더만, 그냥 들어!' 하고 면박을 주는 해리나와 옆에서 멎적게 웃으며 그녀를 조심스레 말리는 유라크. 그들 사이에서 오늘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을 만끽하며 명줄 부지하느라 바쁜 나머지, 멀찌감치에서 말없이 내쪽을 응시하는 시얀의 불안한 시선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정체가 뭐냐...율리안.'
우리가 밤낮 안가리고 쉴새없이 걷기 시작한것이 벌써 열흘이 지났다.
시얀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신의 울타리 영역까진 하루가 채 남지 않은 듯 했다.
지금껏 넷이서 같이 먹고, 같이 웃고, 같이 걸으며 온 시간이 있어서 인지
나는 이제 꽤 해리나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법(=비유 맞추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겨우 이거 가지고 유세 떠는거냐고 비웃지 말라. 당해보지 않은자 논할 자격 없다고,
이것이 이 거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이다!!!
맨 땅에 주저앉아 영문모를 절규와 한탄의 용어를 웅얼대면서 가슴을 치더니 종국에는 맛간 여자처럼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는 나를 보며, 쟤가 또 독들은 버섯을 잘못먹었구만. 하고 혀를 끌끌 차던 해리나가 이윽고 화가 난 얼굴로 나를 향해 손가락짓 했다.
"율리안!! 내 말 못 들었어?"
"네? 제,제가 선천적으로 귀가 좀 안좋아서...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면 정말 잘 들을 자신 있는데요."
딴짓하다 해리나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나는, 불똥 튈새라 냉큼 그녀에게 달려가며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너 원래 이런 애였니?"
살기위해 자존심도 다 버린채 비굴하게 웃어보인 나를 힐끔 곁눈질한 해리나가 물었다.
그녀의 질문속에는 '원래 이런 간신배 같은 설정이었니?'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이 틀림 없었다.
에잇!! 이게 다 누구때문이라고 생각하는거야, 지금?! 사람 가지고 장난쳐?!
"너, 지금 속으로 내 욕하지?"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입니다. 그럴리가요."
이런 귀신 같은 여자를 봤나.
내가 등뒤로 흐르는 땀을 애써 모른척 하며 (그래도 일단 살고 봐야겠다. 이게 다 살자고 하는짓인데.)
'어머~날씨가 참 덥네요, 호호호.' 하고 딴청을 피우자, 이번엔 시얀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스러운 듯 몇초간 나를 지긋이 응시하더니 갑자기 짐이란 짐은 다 뒤져 내가 구해온 식량들을 모조리 꺼내놓고는 하나씩 꼼꼼하게 냄새며 맛을 보기 시작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이상행동에 당황한 내가 '왜,왜그래요?'하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묻자, 그제서야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말한다.
"뭘 잘못먹었길래 그런 헛소리를 하나 싶어서."
"...네에?"
...그랬다.
아무리 초봄이라지만 지금같은 꼭두 새벽이나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이른 아침에는 불을 떼지 않고서는 앉아있을수 조차 없는
...정말 진심으로 매우 추운 날씨였다.
이왕 이미지 망가진거 하루 이틀 더 이상해진다고 문제될거 있나.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열백번도 더 곱씹었을 무서운 욕들을 마구 뱉어내...아니, 생각만 한번 해보며 토라져있자 그 모습을 본 해리나가 이례적인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한번만 더 해봐. 네 명줄이 얼마나 긴지 시험해보고 싶다면."
- 움찔.
하마터면 도둑이 제 발 저려 '살려주세요!' 를 외칠뻔했다.
이건 내 추측을 빙자한 확신이건데, 분명 마귀 혹은 악마와 계약을 하면 사람 속내를 읽어내는 신비한 능력을 쓸수 있게 되나보다.
사색이 되어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내 표정따위는 관심에도 없는듯 심드렁하게 해리나가 숲 안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가까운 곳에 계곡이 있는것 같은데, 물이나 길어와."
"...물이요?"
해리나의 말에 내가 설마 저요? 라고 물으며 동그란 눈을 일부러 최대한 크게 키워 묻자,
해리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눈웃음을 지으며 아주아주 귀.엽.게. 말했다.
"왜~ 싫어? 싫으면 부디 사양치 말고 말해. 후후후. 나는 가서 관 짤 나무나 좀 구해올테니."
그 음산한 눈웃음이 나를 한겨울 시벌리아 벌판의 얼음동상으로 만들었고(그녀가 웃을때 뒤에서 나타나는 그 악귀와도 같은 오오라는 내눈에만 보이나보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는 고개를 엄청난 속도로 가로저으며 물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재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시얀은 아마 또 내가 길을 잃을것이라 생각했는지 자신이 대신 가는것이 낫겠다며 물통을 들었지만, 뒷통수로 해리나의 분노를 느낀 나는 그것 마저 빛의 속도로 빼앗아 들고는 혹여나 누가 쫓아올새라 미친듯이 뛰었다.
내가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고 뛰었건만. 역시나 동물적 감각이 요즘 들어(도망다니랴 눈치보랴)급성장을 한것인지
왠일로 길을 헤메이지 않고 제대로 계곡에 당도한듯, 눈앞에는 산꼭대기에서 부터 졸졸 흘러내려온 맑은 물이 펼쳐졌다.
해리나의 눈초리에 질겁을 하고 뛴 탓인가 갑작스레 덥쳐오는 타는 듯한 갈증이 내 목구멍을 간질였고, 나는 급히 계곡물에 고개를 처박고 배가 빵빵해 질때까지 차디찬 얼음 물을 들이켰다. 간신히 목마름을 달랜후 고개를 처들었을 때는 이미 눈알부터 혓바닥까지 몽땅 얼어붙은 후였지만 말이다. 가끔 나 스스로도 어째서 이렇게 미련한 짓을 일삼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했지만 남이면 모를까 나인걸 어쩌나. 그냥 천성이려니 하련다.
-꺄악~꺅~
-꺄르륵~
그 때 였다.
어디선가 나를 비웃는 꼬맹이의 모습을 한 벌레들의...아니.
꼬맹이였다. 정말. 작고. 하마터면 언 동태눈깔로 캐치하지 못할 뻔한. 날아다니는.
응? ' 날 아 다 니 는 ? '
"으-으아아아아악!!!!!!!!!!!!!!!!!!!!!!!!!!!!!!!"
서서서,설마 파리 모기 날벌레 등등의 진화체는 아니겠지?!
- 끼야악~~~!!!!
- 꺄악!! 꺄악!! 꺄오-!!!!!!!
- 끄왁! 왁왁왁!!
뭐야, 이것들은!!!!!!!!!!!!!!!!!!!!!!!!
이 이상한 날파리들은 하루살이보다 쬐끔 더 큰것들이 (이때 당시에 내 소견으론 그랬다.)
내 주위를 정신사납도록 날아다니며 내 비명에 지들이 더 놀란듯 통통한 볼에 손을 가져다 대고 오도방정을 떨어댔다.
그래 손. 이 날파리들에겐 손이란게 붙어있었다. 물론 손을 갖다붙이고 놀랄 입과 통통한 볼살도.
"볼살...?????"
이 아주 짧은 시간(=순식간)에 날파리들의 구석구석을 잘도 포착해낸 내가 이것들이 날파리의 한종류가 아닐것이라는데에 한표를 던지는데까지 걸린 시간.
약 3.79 초.
왜 이렇게 애매하냐고?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렇거든.
나는 지금껏 이렇게 날개 달리고 작고 통통한 볼을 가진 푸른 생명체를 본적이 없었다. 특히나 말까지 하는것들은 말이다.
'정령학술서' 라는 책에서 본것을 제외하면 그랬다. 그렇다면, 즉. 이것들의 정체는...
"물의 정령, 우,운디네?!"
- 뿌우~!!! 맞았지만, 틀렸어요!
- 미워미워!! 운디네지만 운디네가 아닌걸!
...뭐라는거야. 맞다는거야 틀리다는거야. 정령들이 반어법을 쓴다는 소리는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처음에는 한마리였던 것이 두마리가 되고, 세마리가 되고, 네...다섯...열...스물...
정말 내가 지금...뭐랄까, 날파리들의 모체가 된 느낌이었다. 아아. 이대로 날아가고 싶어라. 자유를 찾아서. (언제나 그렇듯 짐작하는 바 그대로, 원인은 해리나다.) 이 시끄럽게 왱왱대는 푸른색의 꼬마 아가씨들은(단정은 못짓겠으나, 우선은)자신들의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 푸른색의 허리까지오는 머리카락을 마치 물속에 있다는 착각이 들정도로 사륵 혹은 찰랑이는 효과를 연출해내며 잔뜩 부어터진 볼따구를 내 눈앞에 과시하기 시작했다.
"도,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거야!"
도저히 요 손가락 한마디도 안되는 발칙한 것들의 속내를 읽을수 없던 나는, 정말 이 순간만큼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해리나의 '넘의 속 읽기' 스킬을 훔쳐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짜증 섞인 불만을 내뱉었다. 그러자, 움찔하고 잠시 날개짓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건 또 무슨 눈물 바람인지 벌써 수십에서 수백 마리가 되어버린 '운디네'들이 꺼이꺼이 그 커다란 눈에서 맑은 물을 뚝뚝 떨구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물의 정령들이 울어버린 바람에 내 양동이는 계곡물에 얼굴 한번 못담가 보고 벌써 포화상태로 울컥 울컥 맑은 물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의심쩍은 얼굴로 그 양동이의 물을 검지로 살짝 찍어 맛을 본 나는 자동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속으로 만쉐! 를 외쳤다.
오오! 이거 손안대고 코 푼 느낌인데? 얘네가 일명 그 효자손이라는 애들인가.
아까는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이 차디찬 얼음물에 고개를 처박았다지만, 한번의 경험 탓에 유감스럽게도 이 계곡물의 쓴맛을 알게된 나는 어떻게 손 안시리게 양동이에 물을 담으면 잘 담았다고 소문이 날까 하고 고민하던 찰나였다. 게다가 계곡물이 그닥 깊지 않아, 아무 도구 없이 한번에 가득 물을 푸려면 적어도 가장자리보다는 깊은 중간 지점까지는 몸소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말이다. 정말로. 마법이라는 것을 글로 배운 나였다.
예상치 못한 정령들의 쓸모(라고 쓰고 '구원의 손길'이라 읽는다)에 다소 눈을 빛내며 테일러 학사의 마음으로 그들을 유심히 관찰해본다.
정령이란, 인간에게는 좀처럼 생길수 없는 자연친화력이란 것이 드래곤처럼 타고 나야지만이 만날 수 있는 자연의 일부이다.
-by. 정령학술서-
더욱이 어떠한 루트를 통한 마력을 바탕으로 한 계약 이외의 자연 자체에서 정령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볼수 있는것은 인간에겐 있을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나는 마력을 바탕으로 '이것'들과 계약은 커녕, 계곡에 들어가지 않고 양동이에 물을 어떻게 담을까를 고뇌중인 '마법지식(밖에 없는)인' 이었다.
그러한 시대, 학술, 자연, 섭리적 까닭에 정령들이 왜 나타난 것인지 영문을 모른채 머리만 긁어대는 나였다.
- ...안 님! 꺄륵~
- 율리안 님! 꺄아! 꺄앗~
"잠깐!!! 너희, 지금 뭐라고?"
- 율리안 님~~
- 우리는 운디네지만, 율리안 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잖아요!
- 맞아! 그거 아니야! 아니야아~
- 그거 싫어! 율리안 님, 그거 아니에요~
- 다른거 다른거!
"하,한명씩 말해. 뭐라는 거야."
이 날파리때들이. 확 다 한손에 눌러쥐어다 저 계곡물 속에 박아버릴까보다.
- 꺄악~~~~~~~~!
- .......흐꾹.
과연. 내 속을 읽을 수 있는 것은 해리나뿐이 아니었는지, 정령들은 진심으로 짜증 돋는 내 표정에 일제히 입을 다물고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며 결혼을 앞둔 새색시 마냥 다소곳하게 내 무릎위로 내려 앉았다.
그렇군. 해리나도 이런 느낌이었겠어. 왠지모를 묘한 쾌감에 입꼬리를 씨익 말아올린다.
- 네이리.
- 네이리~ 자~ 율리안 님, 해봐요~
- 네이리~~
- 네이리이이~~
이것들이 잠깐 조용해졌나 싶더니, 이젠 단체로 제창을...!
"아,알았어! 한다구. 하면 되잖아."
결국 이 쬐그만 것들의 성화에 못이겨(사실 정말로 귀엽기도 했다. 콱 깨물어 아그작 아그작 소리나게 씹어 먹어버리고 싶을 만큼)불러 주겠다고 했고 어떻게 이것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따위의 의문은 '남의 속도 읽는데 그거야 당연히 알겠지'라는 말도 안돼는 납득 속에 던져버린채 어느새 이상하리 만치 따뜻해진 주변과 체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네이리."
- ...안 님이다!
- 님이다!
- 오셨다. 사실었어.
- 요 쪼꼬맣고 푸른 악마들이 거짓말을 한줄 알았지.
- 어서 알려, 어서 우리의 왕께!
- 꺄르륵~ 율리안 님!!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것일까. (물론 행복한 부분을 다 포함하여도 해리나 덕에 악몽으로 판명 나겠지만) 내 눈앞에는 지금 상식을 넘어선 일들이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내 어벙한 얼굴에 싸다구를 날려주는 중이었다.
말도 안돼. '네이리'라는 단어 하나 입 밖으로 뱉어낸 것일 뿐인데, 마치 그것으로 인해 가려졌던 시야가 확트인 대지의 그것처럼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와 동시에 내 곁에서 여전히 재잘거리는 물의 정령들을 포함해 땅의 정령인 노움, 바람의 정령 실프, 불의 정령 샐러맨더-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번 헛것을 보고 있는지에 대한 진위여부 확인을 위하여 내 뺨을 사정없이 쥐어뜯었고, 시간차 공격으로 들어오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아프잖아아!!!!!!!!!!!!!!!!!"
지볼따구 지가 잡아뜯어놓고 갖은 신경질을 다 내며 아픔으로 인해 흐르는 눈물, 콧물, 침 등의 분비물을 말없이 손등으로 스윽 닦아내는 나를 '정신적으로 아주 많이 힘드신가봐' 하는 동점심 가득한 테레사 신녀님의 표정으로 씁쓸히 바라보는 정령들.
그러나, 누군가의 '율리안 님, 혹시 음주 하셨니?'라는 조심스런 목소리에 약 몇초간의 침묵이 흘렀고, 이윽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녀석들이었다.
이것들이 진짜. 누굴 음주소녀로 보나. 왜저래? 마치 잘못걸렸다는 표정으로.
영문을 알수 없는 나만 덩그러니 남아 가득찬 양동이 위에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됐다. 내가 언제는 뭘 제대로 기억했다고. 그냥 혼나기 전에 물이나 나르자."
이미 자포자기 상태로 한숨만 푹푹 쉬며 물이 가득찬 양동이를 힘겹게 양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아까 물의 정령들이 쏟아낸 투명한 물들이 출렁이며 춤추듯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정한 물세례를 맛보게 해주었다.
그랬다. 이건 분명...
"이 쪼꼬만 악마들이!!!!!!!!!!!!!!!"
- 꺄르르륵~~~~~~~
- 까륵! 꺄하아!!
- 운디네! 너네 미쳤어? 그러다 정령왕님께 혼나도 모른다!
- 노움은 땅으로 꺼졋!! 꺄하하!
-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율리안님께 장난을 쳐보겠어~
- 이런 못된 녀석들~ 율리안님! 저희가 말려드릴게요.
꺄악 거리며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띄운채 공중을 휘저어대는 내 손에 안잡히려 도망다니는 네이리들.
그리고 그런 장난기 가득한 물방울 요정들에게 갖은 질타의 시선으로 그만둘것을 요청하는 땅의 정령들과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 추운 날씨에 홀딱 젖어버린 내 옷에 달라붙어 그들의 열기로 순식간에 바짝 말려주는 불의 정령들이었다.
그리고 바람의 정령들은 이미 엎질러진 물을 계곡에서 길어 양동이에 도로 가득 채운 후, 대신 들어주는 센스와 배려를 감행했다.
"아...고마워."
- 이힛.
- 괜찮으세요?
고맙다는 내말에 부끄러운 듯이 제자리를 빙그르르 돌며 붉어진 얼굴을 가리는 불의 정령.
이녀석들은 아마도 큰 마력의 계약을 필요로 하지않은 자연체에 가장 가까운 하급 정령들임에 틀림없었다.
요 작은 생명체들의 재롱에 그저 영문 모를 뿐인 인간 하나가 사이에 끼어 당황해 하자, 어느새 다가온 실프 정령 한마리가 내 얼굴에 대고 훅하고 바람을 불었다.
손가락 한마디뿐이 안되는 작은 체구인데도 어디서 저런 강력한 강풍이 나오는지.
하마터면 스타킹 뒤집어 쓴 강도의 불썽사나운 몰골을 보일뻔한 나는 얼른 바람을 두손으로 막아내었다.
처음에는 그저 강풍인줄로만 알았던 바람이 마치 내 몸의 일부인양 기다란 속눈썹을 지나, 귀를 간지럽히고는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흩어놓으면서 체내로 흡수되듯 온몸을 휘감으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내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가슴이 먹먹한 과거의 기억을 보아야만 했다.
따뜻한 봄 햇살이 내리쬐는 풀 밭에 앉아 반짝이는 한 여자와 그녀의 은보라빛 머리카락에 장난스럽게 매달려있는 물의 정령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을 귀찮다는 듯이 떨어뜨려내면서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나잖아...'
나였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였다.
장난기 가득한 물의 정령들 이외에도 땅속에서 마치 연기 솟아 오르듯 고개를 빼꼼히 내민 땅의 정령들.
그들의 생김새는 책에서 본것과는 달리, 얼핏 보면 황토색 눈동자 색의 그을린 피부를 가진 통통한 남자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네가지 원소의 정령들 중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기전에 딱 한번이라도 봤으면 하는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인의 대표 상, 바람의 정령. 아름다운 정령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바람처럼 흩날리는 연초록 머리카락이 쏙 들어간 허리 부근에서 찰랑거리는 것이 인상적인 이들이었다.
불의 정령들은 불같은 성질머리가 한 몫하는 듯, 그들의 붉고 짧은 머리카락은 물의 정령들이 장난기를 발동시킬때 마다 화르륵 타오르며 그 성미를 보여주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탄탄해 보이는 작은 체구가 영락없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한번 화가나면 완벽하게 타오르는 시뻘건 불덩어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화를 돋구지 않는것이 좋아 보였다. 주로 그 화는 물의 정령들이 돋구었다.
정령들과 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듯이, 아무런 위화감도 없는 평화와 여유를 온 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이 작은 생명체들은 정령왕에게 혼난 이야기며 숲에 놀러온 인간들이 한 괘씸한 짓 등에 대해 깨알같이 내게 털어놓았고,
오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 그 재잘거림에도 나는 아무말 없이 입가의 미소를 유지한 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운디네, 노움, 실프, 샐러맨더. 이것이 책에 쓰여진 정령들의 이름이었지만, 나는 결코 그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과거의...기억 속의 나는 그 작은 요정들을 '네이리, 아스, 윈디, 카논.'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 사륵...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
그 인기척 소리 또한 익숙한 이의 것인듯 나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은채 그의 물음에 대답한다.
그와 함께온 늑대의 형상을 한 물의 상급 정령이 나의 팔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와 마치 키우던 강아지마냥 꼬리를 흔들어댔다.
"율리안님. 이런 곳에서 저희 아이들과 수다나 떠실때가 아닙니다."
"왔어?"
"운디네. 율리안님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은 안된다고 했을텐데."
- 아이,참! 알았어요~
- 꺄르륵~~ 정령왕님은 율리안님 편만 든다니까!
"이녀석들. 당분간 여기 못오게 한다?"
"그냥 둬. 난 괜찮아."
누굴까. 기억 속 내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탓에 끄끝내 나는 그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없었다.
다만 어렴풋이 들려오는 차분하고 고운 음성과 눈물이 울컥 쏟아질듯한 그리움만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을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은 딱 여기까지였다. 이 뒤는 더이상 기억해낼수 없었지만, 이것마저 진짜인지 알길이 없어 혼돈스러워졌다.
.
.
.
눈을 뜨자, 이미 정령들은 모두 사라진 후였고 나는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는 낯익은 모습에 '우와악-!'하고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율리안!!"
"와악-! 깜짝이야!!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음 어떡해요, 시얀! 간떨어질 뻔했네."
"아주 물을 땅을 파서 길어오려나 보다고 해리나가 투덜대기 시작했어."
"그거 큰일이군요."
해리나의 안달에 못이겨 나를 찾아나선 시얀. 그러나 그 과정이 꽤나 힘이 들었던 것인지 그의 잘생긴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시얀도 더우면 저 계곡물에 얼굴 한번 박아보세요. 순식간에 다시 뛰고 싶어지실거에요.
내가 멎적게 웃으며 계곡 쪽을 가리키자 그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내 얼굴을 응시하던 시얀의 뜨거운 손가락이 갑작스레 내 볼에 닿았다.
"으악!"
"...설마 울었냐?"
"네? 아니, 그게..."
아까부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것은 이 눈물 자국 때문이었는지 그의 열기를 품은 손가락이 차가운 내 볼을 한번 스윽 훑고 지나간다.
이런데서 자면 입돌아간다. 여자애가 입돌아가면 흉해.
피식하고 묘한 웃음을 뱉어내며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한쪽 손에 양동이를 들려준다.
이건 뭐 친절한 건지 짓궂은건지.
"뭐해. 안와? 빨리 따라오면, 침흘리며 자고 있던거 해리나에겐 비밀로 해주지. 농땡이부린걸 알면 뭐라고 하려나."
"왁왁왁-!!!!!!!!!!!!!!! 가요, 간다구요!!"
우씨!! 침인줄 안거야?
반쯤 억울했지만 깜빡 잠이든 것은 사실이기에 찰랑이는 양동이가 무거운 줄도 모르고 부리나케 뛰는 나였다.
이 생활을 계속 했다가는 정말 왠만한 노가다 정도는 식은 죽 먹기로 할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어찌되었건, 어느샌가 찰랑이는 내 양동이 안에서 수영을 해대며 신나하는 네이리들과 시얀 몰래 양동이를 받혀주며 무게를 절감해주는 윈디들이 있었다는 것은...
이들을 볼수 없는 시얀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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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용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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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 가시어요♥ 인소닷 연재홍보방 입니다아.
첫댓글 재밌어요
1등인 당신♥ 쵝오 입니다아 ㅋㅅㅋ
2등이에요 ㅎㅎ 재밌게 읽고 가요~~
린배님 감사합니다 :D 당신은 둘도 없는 소중한 2등 이십니다아♥
재밌어용!!
감사합니다, 이뻐님 :) 열심히 쓰겠습니다아♥
댓글을안다수가없네ㅠㅠㅠㅠㅠㅠ흐어재밋어요
꼬박꼬박 댓글까지 달아주시고 수고하십니다아 XD♥ ㅋㅋㅋ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아낌없는 댓글 스릉흡니다_♥
감사합니다.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