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익스피어의 비극 [맥베드]에서, 던컨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맥베드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불안해한다. 그는 마녀들에게 자신의 앞날에 대해 묻는다. 마녀들은 여자의 자궁 속에서 나온 사람은 절대 맥베드를 죽일 수 없다고 그를 안심시킨다. 그런데 맥베드는 해산달이 차기 전에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나온 맥더프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저궁 속에서 나오지 않아도 결국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자식이다. 어머니. 이 지상에서 발음되어지는 가장 위대한 단어이다.
한국의 어머니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이미지가 우리들 머리 속에는 형성되어 있다. 자식들에게 헌신적으로 무한한 사랑을 퍼부어주는 어머니의 존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처를 겪는 자식들에게는 항상 마지막으로 돌아가 외로 받을 수 있는 따뜻함 그 자체다. 그러나 요즘은 비정의 어머니들에 대한 기사가 자주 뉴스에 등장하기도 한다. 반포 서래마을의 프랑스인 영아 살해사건은 범인이 외국인이었지만 이와 비슷한 사건이 우리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자신의 동료를 살해한 조폭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품고 그의 시골집을 찾아갔지만, 복수해야할 대상의 어머니에게서 모정을 느끼는 어느 조폭의 이야기가 [열혈남아]다. 신인 이정범 감독의 데뷔작인 [열혈남아]는 배우들의 영화이기도 하다. 내러티브 전개는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배우들의 위대한 연기가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복수를 꿈꾸는 조폭으로 설경구가, 그리고 그가 살해해야 할 조폭 대식의 어머니 역으로 나문희가 등장한다.
나문희가 맡은 점심이라는 배역은 두 아들을 길렀지만 큰 아들은 조폭이 되어서 어쩌다 집에 들리고, 둘째 아들은 원양어선을 타지만 남극 근처에서 행방불명되어 시신도 못 찾고 있다. 점심은 둘째 아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 [자식에게서 무슨 일이 생기면 당연히 어머니의 마음이 불편하거나 무엇을 느끼는 법인데 지금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만약 둘째가 죽었다면 절대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열혈남아]는 90년대 중반 이후 수없이 만들어진 조폭 소재의 영화다. 그동안 조폭 영화들은 [조폭마누라][달마야 놀자][두사부일체]로 대표되는 영화들에서 보듯, 일반인들이 가까이 갈 수 없는 신비한 존재며 두려움의 대상인 그들을 희화화시켜 웃음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권위의 소멸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현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조폭 영화의 또 한 조류는 느와르 영화다. [게임의 법칙][친구][초록물고기] 등의 영화들은 신분상승을 꿈꾸거나 사랑에 목말라하는 결함 있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욕망으로 가득 찬 그들이 결국 비극적으로 파멸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열혈남아]는 조폭이라는 장르에 어머니를 충돌시키면서 새로운 충격과 전혀 색다른 긴장감을 형성하면서 우리들을 사로 잡는다.
[열혈남아]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나문희는, 올해 65살의 노배우다. 창덕여고를 졸업한 나문희는 1961년 MBC 라디오 공채 성우 1기로 출발한다. 그러나 그 이후 개국한 TV 방송국의 연기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자, 여운계 등 동료 성우 출신들의 연기자 겸업 대열에 뛰어들면서 나문희도 자연스럽게 연기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나문희가 지금까지 TV에서 맡은 배역도 대부분 어머니였다. 그러나 나문희는 [열혈남아]를 위해 5달이나 TV 출연을 하지 않았다. 오직 영화에만 힘을 집중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너는 내 운명]으로 지난해 대종상 여우조연상과 부산영평상 여우조연상을 수상이 자리잡고 있다. 영화계에서 주는 큰 상을 맏은 그녀는 아무래도 무엇인가 보답해야겠다는 느낌이 있었고, 연기자들이 상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은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 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영화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연기가 늘었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나문희가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년)에서부터다. 산장을 경영하는 가족들의 어머니 역할이었다. 가족 코미디 영화 [하면 된다](2000년)에서는 친척 가족 역으로 까메오 출연했고, 배두나 주연의 [굳세어라 금순이](2002년)에서는 교인의 할머니 역으로 등장했었다. [영어완전정복](2003년)에서는 장혁이 맡은 문수의 어머니 조여사 역으로 등장했다. [여선생 여제자](2004년)에서는 염정아가 맡은 주인공 여미옥의 어머니로, [S 다이어리](2004년)에서는 김선아가 맡은 지니의 어머니 역으로 등장했다.
그 이후로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에서는 못난 손주 상환(류승범)을 위해 경기장 차가운 의자에 앉아 몰래 지켜보는 할머니 역으로 등장했지만, 그 역할은 뜨거운 모성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너는 내 운명]에서는 못난 아들 석중(황정민)을 위해 눈물짓는 어머니 역을 맡았었다. 이렇게 그녀가 지금까지 맡은 배역들을 훑어만 봐도 나문희의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 속 배역들의 비중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경구 같은 배우가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박하사탕] 때부터 쭉 보아왔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열심히 한다]라고 나문희에게서 연기에 임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받은 [열혈남아]의 주인공 설경구는, [나문희 선생님은 40년이 넘게 연기를 하셨는데도 신인 같고 소녀 같으시다. 하도 연습을 해서 시나리오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다. 촬영하는 동안 매일 우리 모두의 진짜 엄마처럼 배우와 스태프들을 거둬 먹이셨다. [열혈남아]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대식이가 그런 거 아니지?’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압권이다. 모든 아들을 끌어안는 엄마의 모습이었다]라고 말했다. 나문희가 얼마나 프로 근성으로 작품에 임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다.
나문희에게 오랜 연기생활을 통해 생긴 버릇은,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극중 인물이 되어 연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상당히 게으른 편이어서 집에서는 고쟁이만 입고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꼬라지가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해도 잘 어울리고 저렇게 해도 잘 어울려서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내는 것 같습니다]라고 그녀는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 속에서 그녀는 정형화 된 연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연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나문희는 매우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왕년의 미모를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얼굴도 아니다. 입 부분은 조금 돌출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의 이런 모습이 누구에게나 친근감 가는 인상을 만들어준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삶에서 체험한 진정성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전달하는 데서 형성된다. 가끔 파격적 변신이 그리워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갈데없는 우리들의 어머니다. 한국 영화에서 어머니가 필요하는 한, 나문희는 우리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