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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을 국내에 선구적으로 소개하며 그 씨앗을 뿌려온 송순재 교수는
톨스토이의 교육철학부터 우리나라의 서당교육법까지 다양한 교육법을
소개하고
충분한 질의응답을 통해 함께 해답을 찾아가는 자리를 만들어주었는데요
“교육의 위기를 정책적 사안으로만 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을 때, 교육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학부모와 교사, 스승과 제자가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던 시간,
교육에 대한 생각의 뿌리부터 살펴보았던 시간으로 초대합니다!
러시아의
교육위기와 ‘아름다운 학교운동’
1997년부터 약 10년간 러시아에서 지속되어 온 ‘아름다운 학교운동’이 시사해주는 바가
있습니다.
러시아는 아무리 나라가 어려워도 교육예산을 줄이거나 교육을 방치한 일이 없었는데
개방정책에 따라 자유바람이 불면서 학교
재정이 삭감되어 교사는 월급도 못받고,
국가, 교사, 부모가 학교를 돌보지 못하자 아이들이 거리로 나와 데모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걸 본 선생님들이 학교로 다시 돌아와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방향으로 학교를 변화시키고,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독일의 발도로프 학교,프랑스의 프레네 교육도 있고 몬테소리 교육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선생님들은
“아름다움이란 뭐냐?”를 중심으로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의 공간, 교사, 교육을 아름답게 바꾸기 위한 논의들이 활발했습니다.
러시아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음악, 그림, 댄스를 많이 하고
학교에 올 때도 장미꽃처럼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옵니다.
제가
한 학교에 갔을 때, 학생들이 하얀 꽃을 머리에 달고 흰 블라우스를 입고 왔는데
그 모습이 너무 강렬한 빛으로 다가와서 충격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또 학교의 시설보수를 할 때도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모아 미적 감각을 발휘해,
행복하고 즐거운 맛을
느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교실에 화초가 많아서 선생님의 일과 중에 중요한 일이 화초에 물 주는 일이었어요.(웃음)
‘왜’ 교육을 하는가?
러시아 사람들의 가슴에 ‘아름다움’이란 사상을 심어주었던
위대한 사회개혁가이면서 교육사상가, 예술이론가 톨스토이는
러시아가
변하려면 교육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 도입된 의무교육제도의 모티브는 세가지였는데,
첫번째는 조국에
대한 충성스러운 시민, 두 번째는 그리스도교 신앙, 세번째는 산업발전 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조국을 산업화시킬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일반국민에 대한 교육제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었지만, 그 목적과 목표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그것은 교육이 아닌 사육이라며 어린이의 개성, 자유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는가’’에 관심이 있을 뿐,
‘왜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는 묻지 않는다. 나는 ‘왜’를 묻고 싶다.”
여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는 기본 틀
안에서 주어진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고,
'왜'라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이전의 근거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숀카, 베치카, 베로니카라는 세 아이와 대화를 나눈 이야기가 있어요.
숀카가 질문합니다.
“왜 노래를 배워요?
러시아말 배우고, 산수랑 자연과학 배우면 되지,
왜 노래를 배워요? 쓸 데도 없는데?”,
“아름다우니까 배우는 거지. 여기 보리수가
있다. 아름답지 않니? 보리수는 왜 있는 거지?”,
“가지 꺾어서 말채찍 만들려고요”,
“길어야 만드는데 다 자라지 않은 보리수는
왜 있는 거지?” 숀카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베치카가 “말 채찍을 만들기 이전에 보리수도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에요. 그림으로
그려도 멋있어요”
옆에 있는 베로니카는 동의를하는데, 숀카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는 먹고, 소유하는 실익이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정신적인 세계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죠.
“그것이 너희가 교육을
받는 이유다. 너희가 정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너희가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는 것이죠.
승자만을
키워내는 한국교육과 한국사회의 가치관
우리나라는 어떻습니다. 지금 한국의 ‘교육’은 대학가는 것 아닙니까? 그 외에는 없어요.
우리가 언제 한번 아이들의 삶에 대해서
고민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 지나친가요?
성적이 아니라, 아이들이 뭘 좋아하고 언제 행복해 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해 본 적이 있나요?
국가는 한 학교의 어느 반에 있는 조그만 아이의 삶을 위한 정책을 핀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정치적인 변혁의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죠. 하지만 민주화된 정부에서조차
교육 정책은 대동소이 했습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동여맸던 것은 국가발전이었습니다.
또
학부모들의 관심은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것에 있죠.
'대학을 잘 보내야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직장을 얻어야 사회적 신분이 보장이 되고
신분이 보장이 되어야 돈이 생기고 돈이 생겨야 명예도 생기고 힘도 생긴다.
어떻게 하면 승자가 되게 할까?'를 고민하는 거죠.
지금의 경쟁체제, 비인간화 등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관과 긴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체제에서 10년,20년 공부해서
과거에만 붙으면
신분, 권력, 돈 모든 것이 보장되던 것처럼 대학에 집중하는 거죠.
고등학교에 연중행사로 붙는 플랜카드에
‘사법시험 합격, 행정고시 합격’ 은 있어도
‘농사 지으러 갔다, 교사가 되었다’ 이런 건 없잖아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특화된
형태의 시민교육이 필요합니다.
30년 평준화제도, 혁명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보통 말하기를 우리나라 교육은 어디까지 손을 대야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에는 일치합니다.
하지만 바꿀 수 있는 만큼 바꿨고
혁명적인 전환이 없인 더이상의 변화도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평준화제도가 30여 년간
지속되었지만 도시중심이고, 수로 보면 50% 밖에 안 됩니다.
어디는 평준화고 어디는 아니고, 또 돈 있는 학교만 자유를 주고
대학은 평준화가 안 되어 있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면 기능을 못하죠.
전체로 확산을 시키거나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대로라면 실패할 수 밖에 없어요.
지금 새 정부에서는 학교에 자유를 줘서 다양한 교육이 가능하게 하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기대할수가 없어요. 그것 역시 어떤 특정한 학교에만 자유가 부여 되기 때문이죠.
혁명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국립대학 평준화제도와 평생교육체제를 과감하게 도입해서 문호를 넓히는 겁니다.
문제는
서울대학교가 하나만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리고 유수한 사립대학이 많아지면 완화시킬 수가 있죠.
현재는 평생교육법에 따라 방송통신대
등에서 일정한 학점을 받으면
대학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학사 졸업증이 나옵니다.
제 생각엔 대학에서 평생교육체제를 운영할 경우, 그
대학의 졸업장을 주면 좋겠어요.
평생교육기관과 대학이 서로 교차수강을 가능하게 하고, 서로 협동과 경쟁을 하게 하면서
주기적인
평가를 통해 질을 높이고요.
대학생들도 본 대학에서 하지 못하는 실질적인 내용을 평생교육원에서 배울 수 있으니 좋죠.
그리고
한국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 다른 전공의 대학공부를 하려면 수능을 다시 봐야 합니다.
유럽대학은 평생교육체제를 통해 언제든지 다시
돌아가서 원하는 공부를 유연하게 할 수 있어요.
사람 인생이 10년, 20년인데, 대학 4년에만 묶어두지 않고 배우고 싶을 때 얼마든지
배울 수 있게 해야죠.
사실 유럽에서 평준화된 대학제도가 가능한 이유는
어느 대학을 나오든 사회에서 똑같은 대우를 받기 때문입니다.
실업 계통에
있는 사람들도 남 부럽지않은 사회적 권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소위 소득격차가 계층간에 크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은
자유롭게 대학을 가는 구조가 가능하지만,
우리나라는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사회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바로 이 전근대적인
의식을 바꿔내야 하는 겁니다.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에요.
천지개벽같은 변화가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죠.
국내의 제도적인 개혁만 된다고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 경쟁체제는 대만과 일본, 심지어는 중국과 북한에도
있습니다.
동아시아 전체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안교육 10년
한국의 대안교육이 1995년쯤 처음 발화가 되었는데,
10년 만에 전국에 100여 개의 학교가 생겼습니다. 세계에 유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좀 특별해요. 대단히 열심히 일합니다.(웃음)
세계적으로 유수한 대안교육의 유형인 발도로프, 몬테소리,
프랑스의 프레네, 아까 얘기한 톨스토이,
독일의 페터 페터젠교회학교까지 우리나라에 다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산성지학교처럼
서당을 모델로 한 토착적인 대안학교들도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좀 더 넓어지고 깊어져야 하겠지만 대안교육은 아직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됩니다.
지금 대안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을 양성하는
특별한 전문대학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의까지 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교사양성과정에도 문제가 많기 때문에 대안학교 교사양성 과정뿐만 아니라
기존의 교사양성과정을 극복하는 것까지 고려하며 논의 중인
단계입니다.
또 최근의 ‘마을 살리기운동’과의 접점에서 생겨나고 있는 학교들도 긍정적으로 봅니다.
1930-40년대 덴마크가 산업화되면서
정부제도가 중앙집권화되고
지역문화와 농촌이 황폐화 되어갈 때 폐교되는 농촌 학교를 기회로 보고 들어간
젊은 사람들이 집 짓고
가정을 세우면서 자유학교들을 발전시켰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의식을 가지고 귀농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혼하고,
아기를 낫고 집을 짓고 가정이 생기는 자유학교들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운동이 10-20년 더 심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들이 있어야
우리 아이들도 살고 학교도 산다고 봅니다.
가정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변화
어떤 사람은 "교육을 바꿔내려면 한국이 망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는 이 꿈을 포기할 수가 없죠.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얘기를 해야죠.
'가정'에서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정은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정신과 제도의 변혁’을 일궈내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단위가 가정이라는
겁니다.
전 현재의 제도적, 정신적인 혼란이 가정붕괴에서 오는 것이란 결론을 얻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다시 살고 다시 일으키는
것, 아버지, 어머니들이 생각을 하고
교육다운 교육을 고민하고 가정끼리 연대하고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예를 들면 핀란드와
일본에서는 가정에서 책을 모여서 읽는 등 가정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집에 손님초대도 안하고 대게 외식을 많이
하죠.
가정에 모여서 공예를 한다든지 대화를 한다든가 그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어요.
부모가 아이와 함께 금주에는 무엇을 하고
다음주에는 무엇을 하고
한달 뒤에는 무엇을 하는 등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는 가정을 찾기가 힘들어요.
제가 가정을 살려야 된다고
하는 것은 거기서 정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죠.
가정은 정신문화를 바꿀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제도를 바꿀 수 있는
기회입니다.
현단계에서는 하나의 열쇠 같아요.
강의 후 진지하고 활기찬 질의응답이 이어졌고
송순재교수는 좋은 교육을 꿈꾸는 학교선생님들이 실천해볼 수 있는
전통문화 속
교육방법과 교육태도에 대해 전하면서
좋은 교육을 꿈꾸고 만들어가는 모두에게 힘찬 응원을 보냈습니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문화 안에 엄청난 보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서당교육에서 말하는 스승상, 가르치는 방법, 삶의 태도 등은
조금만 현대화 시키면 매력적이거든요. 유학이라고만 보지 말고 동양에서 존재했던
공부하는 삶으로 보고 ‘현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송두리째 무너진 것을 다시 살펴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전통교육방식 중에 ‘여유학습’이란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10개
정도 공부할 힘이 있으면, 15-20개까지 하라고 하죠.
그때는 10개 정도의 힘이 있으면 5개까지만 시켰습니다.
한가한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맞더라고요. 일본에서도 도입하고 있죠.
여유를 두면 힘이 안 드니까 반복하면서 음미하게 됩니다. 그러면 즐거움이
생기고 더 하고 싶어지죠.
처음에는 10개 할 수 있는 힘이었다가 20개로, 30개로 늘어납니다.
10개 하는 사람에게 20개를
시키면, 처음엔 해낼지 몰라도 결국 7-8개로 줄고 병들고, 자살합니다.”
“그 다음에 ‘자학’하는 태도. 자기를 학대하라는 것이 아니고(웃음)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교육’이란 말은 철저하게 교육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맹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得天下英才之 敎育之 三樂也 득천하
영재지 교육지 삼락야 ; 천하의 영재를 얻어가지고 교육한다)
사실 맹자에 자주 나오는 말은 ‘교학’입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서로 배운다는 뜻입니다.
공부는 스스로 공부하고 자기 발로 서는 것이기에 서로 배우는 관계인 ‘교학’이라고 하는 것이죠.
전라북도 필암서원에 계신 김민우선생은 평생 관직에 안 나가고 공부하면서
후학들을 길러냈습니다. ‘교학상장’이란 말처럼
선생이지만 선생인체 안 하고 늘 겸손하게 함께 공부해오신 거죠.
쌀 한되만 가지고 와도 재워주고 가르쳐주었다고 해요.
학원강사의 연봉이 몇 억씩 하는 요즘 같은 때 다시 돌아볼 분이죠.
비노바 바베(Vinoba Bhave, 나이탈림(신교육)운동
발표자)같은 인도의 성현도
“가르치는 사람은 돈 받지 마라, 노동을 해서 자기가 벌어 먹고 힘이 남으면 가르쳐라.
난 하루에
8시간을 노동을 한다. 그러면 다시 8시간 정신노동을 할 수 있고 그때 가르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머리에 돌덩이를 딱 맞은 것 같았어요.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빛이고, 올바르게 하는 길이고 우리를 사람답게 하는 길이죠.
오래된 동양의 지혜입니다. 이리로 가야 하는 것이죠.”
“생활교육을 시도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아이들, 대학을 졸업해도 어떻게 나아갈지 모릅니다. 날아갈 때가 되었는데도 날아가질 못해요. 결혼을 시켜놔도 여전히 어린애에요. 밥할 줄도 모르고 어른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요. 남이 해주는 밥을 얻어 먹는 식으로 사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인격이 절름발이가 되는 거 같아요. 이전의 교육은 생활교육이었습니다. 생활에 기초와 기본을 두고 생활에서 단서를 찾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은 생활과 지식이 구분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생활과 지식은 같이 묶어야 되는 것이죠.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일상생활에서 구하라. 거기에 답이 있다.” 는 말처럼요. 제가 볼 때는 공립학교에서도 지식을 생활과 관련해서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교육개혁 사상가들도 했던 것이고요. 음악과 과학과 인문학에서 생활과 관련된 것을 찾아내면서 빛이 나고 역동적이 되고,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 힘으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선생님들이 지금 같은 세계화 속 교육에 바쁘게 나아가기보다는 전통의 지혜에 늘 우리를 비춰볼 수 있어야 합니다. 대화하고
공부할 때 우리가 받은 교사 양성구조의 협소함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눔문화 홈페이지를 둘러보고싶은신 분들을▶http://www.nanum.com/zb/view.php?id=forum_1&no=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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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필암서원은 전남 장성에 위치한 하서 김인후 선생님을 모신 서원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러시아 교육의 모색...이게 우리나라에서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