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계에는 요즘 말할 수 없으리만큼 여러 가지 희한한 교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개 교회의 목사님들은 모르는 척 눈감아 주던지 아니면 몰라서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는 점점 파괴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아 진리의 복음이 왜곡되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믿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이 갈라디아 1;8-9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아주 엄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잘못된 교리 중에 소위 <Contemplative Spirituality> (명상 영성 운동, 관상기도)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미 상당히 널리 교회에 파급되어 있고 지금도 계속 만연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소위 “Soakers' Prayer" 라는 이상한 신앙 유형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Soaker's Prayer" 란 최근에 등장한 운동인데 설교를 배격하고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면 머리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떠오르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운동에 관해서 특강을 가질 기회가 있을 줄 압니다. 오늘은 교회를 좀먹고 있는 <명상 영성 운동> 에 관해서 한 시간 동안 강의하고 저 합니다.
항상 이상한 교리는 서부 California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퍼집니다. 요즘 미국 California 주 Los Angeles 근처 아주사 대학의 Richard Foster 목사를 비롯한 많은 목사들이 정통기독교와는 다른 소위 <명상영성 운동> 을 권장하고 있어서 교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미국 내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에 여행하면서 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빗나가는 영성운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Foster 목사가 쓴 책 <Celebration of Discipline. 20th Anniversary Edition>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1998 pp.30-31) 에 보면 성도가 기도할 때는 손바닥을 위로했다 아래로 뒤접었다 하면서 (palm up palm down) 기도해야 하나님에게 상달된다는 이상한 교리를 말합니다. 기도할 때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건 땅을 향하건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불교에서나 통하는 이런 이방종교의 가르침이 지금 뻐젓이 기독교에 도입되고 있다는데 우리는 우려를 금치 못합니다.
요즘은 불교의 관행이 기독교에서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통용됩니다 불교의 사찰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십시오.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위로 향하게 했다 합니다. Foster 목사의 이 책이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주는데도 이 책은 어떤 신학교에서 강의시간에 참고 교재 목록에 올라갈 정도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참으로 요즘의 기독교는 요지경입니다.
Richard Foster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Azusa 대학교의 교수로 있는 분이면 나름대로 자기가 원하는 영성훈련을 전파하기위해서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Renovare> 라는 교회 혁신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 이라는 성경을 편집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상은 주로 <Celebration of Discipline> 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는데 그의 책은 한때 New York Times 의 best seller 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미국 복음주의 출판협회의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복음주의” 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옛날에 알고 있던 그런 개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의미의 단어로 변신했으니 “복음주의” 라는 말이 붙어 있다고 해서 모두 옛날의 복음주의 신학의 개념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명상영성 운동을 <Contemplative Formation> 이라고 하기도하고 또는 <Contemplative Spirituality> 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왜 나쁜 것이며 왜 막아야 하는지 오늘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강의하고 저 합니다.
오늘 강의의 초점은 “명상” 혹은 “묵상” 한다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느 종교에서나 중요합니다. 기독교를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하지 않고 머리를 비우고 기도하면 무아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속을 비우면 무아지경에 이릅니다. 힌두교에서 이런 방법으로 기도합니다. 힌두교를 본 받아 오늘의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그렇게 기도합니다. 앞서 언급한 Richard Foster 목사는 그가 새로 펴낸 책 <Life with God: Reading the Bible for Spiritual Transformation> 이란 책에서 이런 영성운동을 하면 <하나님의 운동선수> 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p.14). .
그가 말하는 “영성운동” 이란 <금식, 기도, 성경연구, 봉사활동, 혼자서 하는 영적인 신앙고백, 예배, 명상, 그리고 정숙> 이라고 합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들은 영성 이란 말을 명상하는 기도, 즉 명상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연관을 짓는데 이런 일들이 과연 성경적인가 보도록 합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영성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 무언으로 영성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라고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가 여부를 보자는 말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기도하는가? 이것은 힌두교에서 하는 기도방식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침묵하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비운채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기도 합니다. 이것이 명상영성운동을 하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선 구약 시편을 보도록 합시다. 왜냐 하면 시편에 구약 사람들의 기도의 모습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구약 시편은 이들 명상영성운동가들이 즐겨 인용하는 증거구절들이 많습니다. 구약의 시편기자들이 말하는 “잠잠할 지어다” 라는 말의 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관건이 됩니다. 이 구절을 명상영성운동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로 줄겨 인용하는데 이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잠잠하라” 는 말의 참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시편 제1편을 보면, “ 복 있는 자는 주야로 주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 라고 가르치며 이런 사람은 만사가 형통한다고 가르칩니다 (시 1:1-3). 또한 시편 119:15, 23 등을 보십시오. 같은 내용입니다. 묵상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면 그런 묵상한다는 말이 성경에서 어떻게 행하는 것을 가르치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침묵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묵상한다, meditate” 란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 인데 구약전체에 25번 나옵니다. “묵상 한다” 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구약에서만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신약 빌립보 4;8에 보면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라“ 란 말은 원문에서 ”로기조마이 logizomai"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명상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구약에서는 묵상을 언급할 때 필연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한다는 말이며 막연하게 조용히 앉아서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바를 명상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묵상” 은 그냥 속을 비우는 그런 묵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나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습니다. “나를 주의 목전에서 버리지 마소서 주의 영을 내게서 떠나게 마옵소서 (시 51:11) 라고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초점을 맞추고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했었다는 엄연한 진리를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에 초점을 맞춘 이런 명상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을 더했고 그들의 이런 영성운동의 태도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신앙행위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명기 28:1-68 참고).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형통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들은 한결같이 율법과 율례와 규례와 교훈과 말씀을 명상할 것을 권장했던 것입니다 (시편 1:2; 시 119:15, 23, 48, 78, 148 참고). 이스라엘 백성의 영성훈련에서 명상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본다면, 중간기에 나온 어느 외경에 보면 “너의 생각을 주의 율례에 두고 늘 그의 규례를 생각하라” 라고 말 합니다 (시라크 6:37 참고). 그러면 “명상” 이라는 히브리어 “하가” 나 “시아” 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 히브리인들이명상할 때 하나님이 침묵을 강요했는가요? 이 점에 있어서 구약의 “명상” 이라는 말의 뜻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구약을 보면 구약 어디에도 기도할 때 주관적 침묵의 의식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이방신을 믿던가 아니면 기독교에서도 신비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 몇 가지로 생각해 봅시다.
첫째, 구약 사람들이 명상할 때 그 명상이 항상 “하나님의 율법” 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말은 성경적 명상은 기도할 때 한 마디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며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 명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명상하는 일이 생각을 비우는 침묵을 유도하는 일, 다시 말하면 John Locke 가 말하는 “tabula rasa”(백지 상태) 상태에 들어간다고 가정합시다, 여기서 <tabula rasa> 라는 것은 우리 생각을 백지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백지를 만들어서 무엇이든 외부에서 들어오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명상을 통해서 시편기자가 의미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성도가 기도할 때 심성이 tabula rasa 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 한다면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요? (시편 19:14).
둘째, “명상‘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하가” 라는 말에는 “침묵” 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그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보면, “명상” 이라는 단어는 사자가 “으르렁 거린다” 는 의미로 쓰이는데 가령 이사야 31:4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언의 침묵” 과는 정반대가 되는 말입니다.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가 침묵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둘은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Richard Foster 나 그와 같은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이 성경구정를 저들의 증거구절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셋째, 어떤 성경구절에 보면, “명상” 이란 “입”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기를 “이 율법 책을 너의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켜 행하도록 할지니 그리하면 너의 길이 형통할 것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8). 이 성경구절에서 “입” 과 "묵상“ 과의 관계를 주목해 보십시오. 시편 19편에서 시편기자는 ”내 입의 말씀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랍되기를 원 하나이다“ 라고했습니다 (시 19:14). 여기서도 시편기자는 ”말씀“ 과 ”묵상“ 을 병행하고 있는데 즉 “내 마음의 묵상” 과 ”내 입의 말씀“ 은 함께 병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기자는 시편 19편 14절에서 그가 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명상“ 이라는 개념을 침묵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의 명상 이란 ”불교 신자처럼 또는 신비주의자들처럼 “침묵” 해야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명상할 때 성경을 나지막한 소리로 읽거나 암송했습니다. 즉 말씀이 없는 명상이란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넷째로, 구약에 보면, 명상한다는 말은 생각하고 무엇인가 계획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가령 시편 2편을 보십시오, 시편 2편은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라고 시작 됩니다 (시 2:1). 재미있는 것은 영문 성경 (KJV) 에는 “imagine' 이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이는 계획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명상한다는 것은 단지 말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생각하고 무엇인가 계획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성경에는 “민족들이 허사를 명상 하는고”라고 번역하기도합니다. (ASV 는 Peoples meditate a vain thing" 이라고 시 2:1을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이방들은 허사를 계획하며 명상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인 야웨 없이도 메시아 왕국을 건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2편에 보면, 명상한다는 말은 마음의 상태에 여유가 생겨서 하나님을 대적할 생각을 품게 된다는 말입니다 (창 6:5; 창 11:6; 렘 17:9 등 참고). 그런 악한 명상이 속을 비운 침묵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힌두교에서 하는 것 같은 머리를 비우면서 명상한다는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이런 점에 관해서 칼빈 선생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허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언의 명상을 해서 영성운동을 행하라고 교훈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명상 영성운동은 성경에 위배되며 사람이 만들어낸 생각에 불과하며 바꾸어 말하면, 이방종교에서 도입한 비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고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므로 배척해야하며 따르면 죄가 됩니다.
기도할 때 말씀에 집중하지 않으면 명상은 곧 바로 신령주의 (Spiritism) 로 빠질 소지가 많습니다. 신접자 들의 명상이나 또 중얼거림에 대해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히 경고하기를, 이사야 8:19절에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에게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여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처다 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암혹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암흑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이사야 8:19-22) 라고 이사야가 말합니다.
이 말씀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기도나 명상하는 사람은 성경에서 금하는 밀교의 경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구절입니다 (신명기 18:9-14). Richard Foster 목사 자신도 이런 위험을 아는 듯 “무언의 명상” 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나는 경고하고 저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으로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영적 세계에 들어가는데 가끔 초자연적인 인도를 받을 때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다. 영계에는 여러 가지 다른 현상이 있는데 어떤 영적인 현상은 분명히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다” 라고 Richard Foster, Prayer, Finding the Heart's True Home (San Francisco: Harper Collins Publishers, 1992) 157면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Richard Foster 도 이런 위험성을 알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위험성이 있으면 성경에서 그런 명상을 하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니 안 하면 그만입니다. 위험성을 무릅쓰고 무언의 명상을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계속-
소위 "명상 영성 훈련, 관상기도" 의 허구 (2) 최종회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Richard Foster 목사가 이렇게 경계하는 것은 성경적인 명상이나 기도를 할 때는 왜 반드시 성경을 보고 성경의 말씀을 듣는 일이 병행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인성으로서의 예수님을 마귀가 시험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광야에서 고독과 배고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시험을 당할 때 예수님은 무언의 기도로 일관한 것이 아니고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어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마태복음 4:4, 7,10 절 참고). 마태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 사건을 기록하면서 세 번이나 “대답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하시는 동안 혼자 고독하게 계신 적이 여러 번 있지만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의 사역에서 침묵의 명상을 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항상 말씀으로 기도하셨고 (요 17)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무언의 명상으로 일관하는 것은 불교나 힌두교의 관습이거나 신비주의자들의 관행입니다.
명상한다는 것은 내가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꿈꾸는 것 같은 그런 피상적 잠재의식적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상은 자기가 명상하는 주제에 마음을 집중하는 행위인데 그 주제는 성경이며, 성경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환상은 머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어 ?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신비주의는 명상을 설명하기를 개인의 생각은 덮어두고 이성적인 생각을 초월하며 어떤 알지 못할 황홀경으로 인도되어 극치의 신앙의 체험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명상이나 묵상은 시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Alan Richardson 이 편집한 A Theological Word Book of the Bible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0) 라는 책 142면에 기고한 James S. McEwen 의 "Meditate," 라는 글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묵상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의 묵상은 말을 하지 않고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Thomas Merton 같은 뉴에이지 운동가의 말은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묵상한다는 히브리어 (하가) 라는 말은 무언으로 묵상한다는 말이 아니라고 앞서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이미 우리가 보았거니와 구약에서의 “묵상” 이라는 말은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과 규례와 법도를 생각하면서 말을 하는 의식 있는 (conscious) 기도 행위를 말한다는 점을 아주 분명히 강조 하고저 합니다.
이렇듯, 묵상은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입니다. 묵상은 내가 행하는 능동적 해위이며 남에게 지배를 받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영향을 받으려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 묵상은 항상 의식적이며 (conscious), 뉴 에이지 운동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무아지경에 들어간 무의식적인 행위 (unconscious activity) 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명상은 조용하게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기도하고 소리 내어 말합니다. 심지어 사무엘 상 에 나오는 한나도 들릴듯 말듯하는 작은 소리로 기도했지만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을 엘리 제사장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 내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명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서 오래 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모두 비우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를 어떻게 비웁니까? 묵상하는 대상이 하나님인데 머리를 비운다면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흔히 목사님들 특히 신학이 약한 부흥강사들은 설교할 때 가끔 말하기를, “여러분은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tu야 합니다” 소리 지르는데 이는 비성경적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고 묵상에 잠기면 온갖 상념이 찾아오고 시편 1편의 말씀에서 가르쳐주는 묵상은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항상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San Francisco 남방 50 마일 근처에는 태평양 연안 경치 좋은 숲속에 Esalen Institute 라는 <뉴에이지 운동 훈련원> 이 있습니다. 여기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인데 (human potential development). 강사들이 거기서 가르치는 것은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심령을 외계에 전적으로 맡기면 초자연적인 능력이 들어오게 되고 신과 같이 된다고 힘 주어 가르칩니다.
물론 이들이 기도하는 기도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외계의 절대적 존재입니다. 그들은 천지에 있는 외계의 신에게 기도하는데 그들의 생각은 우주와 인간과 우주안의 모든 것은 모두 신의 일부라는 범신론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니고 따라서 기도하는 것도 우리처럼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핵심은 누구에게 기도하건 머리를 비우면 온간 이상안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머리를 비워놓으면 여러 가지 이상한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고 이상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 능력을 극치로 개발하여 신과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실제로 신이 된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placebo (의약, 약이 아닌데 약의 효과를 내는 것)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 미국의 IBM AT&T GM 등 큰 회사들이 New Age 의 운동가들을 초청하여 회사원들의 작업의 능률을 향상하기위해서 행하는 세미나로 실제 상품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Human Potential Development Movement 라고 합니다. John Ankerberg 와 John Weldon 의 Encyclopedia of New Age Movement 참고, 또한 Taxe Marrs 의 America Shattered (Austin, Tx: Living Truth 출판사) 참고,
요즘에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는 책들은 대개 성경을 외면하고 인간 자신에게 눈을 돌리도록 하는 인간 “잠재의식 개발” 이니 “적극적 사고방식 개발” “자존심 개발” 이니 하는 심리학에 성경을 예속시키는 서적 일색이라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읽으면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아마 그 대표적인 책이 Joel Osteen 의 “긍정의 힘” 이라는 책일 것이며 Bruce Wilkinson 의 “야베스의 기도” 라는 책일 것입니다 이런 책들이 날개가 돋힌 듯 팔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성경을 떠난다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교리를 가르치는가 보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변해 버릴 것을 딤후 4장에 예언하고 있고 딤전 4장에서도 예언하고 있으며 또한 딤후 3장에서도 예언합니다. 오늘의 소위 Unidentified Flying Object (UFO, 미확인 비행물체) 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됩니다. 무서운 속임수 (a great deception) 이 성행하면서 우리를 성경을 믿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촛점을 주님에게 맞추라고 가르칩니다. 빌립보 2:5에 “너희 속에 이 마을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마태복음 16장24절에서는 “주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고 명령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이런 뉴에이지를 권장하는 책들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현세에서 십자가를 피하고 현세중심으로 “성공”하며 “행복하게” 살자는 세속신학 뿐입니다. 요즘 중학생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는 The Secret 이라는 책도 그런 맥락입니다. 사람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모두 이런 서적을 탐독하기를 좋아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일을 기피합니다. 기독교를 마치 개인의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무속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모르거나 일부러 파괴하려는 사탄의 사역을 따라갑니다.
목상도 성경적 묵상에서 변질되어 갑니다.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 즉 말씀을 묵상하는 교리를 버리고 힌두교나 불교 등 이방신을 믿는 종교들의 관행을 따라가며 기독교의 독특성을 파괴하여 (obliterate) 결국은 어느 것이 진리이고 어느 것이 비 진리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하나의 종교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운동이 오늘날 색깔이 분명한 개혁주의 목회자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영의 눈이 어두운 일반 교인들은 그것을 모른 채 Brian McLaren 이나 Tony Jones 나 Doug Paggit 나 Rick Warren 등의 책을 탐독하며 비판 없이 따라갑니다. 아마도 앞으로 10년 후에는 “Emergent Church 운동을 지지하느냐?” 여부로 기독교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질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신학교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신학교 자체가 타락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간혹 좋은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학창시절에는 좋은 성적을 위해서 가르침에 순응하는체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모두 자기 편한 길로 가버리는 것이 오늘의 실태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믿음은 자기가 지켜나가야 하며 교회나 신학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의 교계는 점점 “Emergent Church 운동" 편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Emergent Church Movement 는 Brian McLaren 이나 Doug Paggit 같은 사람이 지도자로 있지요만 기독교를 ”재해석“ 하자는 것이며 기독교에 ”변화가 필요하다“ 는 것입니다. ”교리는 필요 없다“ 는 것입니다. 타종교과 야합하려면 기독교의 ”편협한“ 교리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성경에서 다른 복음을 따라가지 말라고 고후 11장에서 여러 번 하나님이 경고해도 죄악에 물든 세대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갑니다. 바로 경계하고 인도하는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심한 핍박을 받거나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4장에서 말하는 ”대 환란, The Great Tribulation"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대 환난 시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거짓 복음은 만연하고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떠나 귓맛 좋은 말만 좋아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으니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 거짓 선지자들은 우후죽순 처럼 도처에 창궐하여 이상한 가르침으로 교인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있는데도 교계 지도자들은 대부분 “교회의 숫자적 성장”. 만을 염두에 두고 교리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기독교의 현주소입니다. 오늘 진리의 복음, 개혁주의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은 설 땅이 없습니다..
성도가 성경말씀에 초점을 맞출 때, 명상은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만 아니라 전 인간이 명상에 참예하고 반응을 보이는데 몸으로는 말씀을 듣고 말하므로, 영적으로는 말씀을 인식하고 느끼고 순종하므로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는 행위가 되어야 참다운 “묵상” 의 구실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이란 본인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 사역, 기적, 법도, 그리고 그의 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을 말하는데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읽어보십시오. 시편 1:2; 시 63:6; 시편 77:11-14; 시편 119: 15, 23, 27, 48 78; 시편 148; 시편 143:5, 시편 145:5 등을 참고할 것.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명상영성 훈련> 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묵상은 성경적인 명상이 아닌 것이 분명함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언으로 기도한다고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자동적으로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영성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만을 생각하고 외우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나아갈 수 있게 됨을 성경이 가르쳐 줍니다. 성경을 지적으로 연구하고 순종하면 그것이 곧 명상행위 인 것입니다. 머리를 비운다던지 무언으로 기도한다든지 한다고 해서 성경적 명상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령의 지배를 받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할 때 참다운 성경적 묵상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Contemplative Spirituality 운동에 속지 맙시다.
에베소 4:14-15에 보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휼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속지 맙시다. 오늘 이런 <명상 영성 운동> 은 전 세계에 펴져 있건만 성도들은 아무런 성경지식이나 신학이 없으므로 맹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계합시다 주님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고 마태복음 24장에 말씀 하십니다. Contemplative Formation 명상 영성운동, 이것은 가장 비성경적인 신앙운동으로 동양 신비주의와 연합하여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살하려는 운동임이 분명합니다. Richard Foster 와 Thomas Merton (뉴에이지 운동가) 으로 대표되는 이 운동은 요즘 한국에서는 이름만 대면 모두 알수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중에도 이 운동에 가담하여 성경을 떠나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요즘의 특징은 옛날 한 때 한 때 성경에 충실하던 목사나 신학교 교수들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성경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영이 하나님에게 속했는가 보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어려운 때 살고 잇습니다. 이는 또한 주님 재림의 징조 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계에는 요즘 말할 수 없으리만큼 여러 가지 희한한 교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개 교회의 목사님들은 모르는 척 눈감아 주던지 아니면 몰라서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는 점점 파괴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아 진리의 복음이 왜곡되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믿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이 갈라디아 1;8-9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아주 엄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잘못된 교리 중에 소위 <Contemplative Spirituality> (명상 영성 운동, 관상기도)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미 상당히 널리 교회에 파급되어 있고 지금도 계속 만연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소위 “Soakers' Prayer" 라는 이상한 신앙 유형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Soaker's Prayer" 란 최근에 등장한 운동인데 설교를 배격하고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면 머리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떠오르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운동에 관해서 특강을 가질 기회가 있을 줄 압니다. 오늘은 교회를 좀먹고 있는 <명상 영성 운동> 에 관해서 한 시간 동안 강의하고 저 합니다.
항상 이상한 교리는 서부 California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퍼집니다. 요즘 미국 California 주 Los Angeles 근처 아주사 대학의 Richard Foster 목사를 비롯한 많은 목사들이 정통기독교와는 다른 소위 <명상영성 운동> 을 권장하고 있어서 교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미국 내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에 여행하면서 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빗나가는 영성운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Foster 목사가 쓴 책 <Celebration of Discipline. 20th Anniversary Edition>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1998 pp.30-31) 에 보면 성도가 기도할 때는 손바닥을 위로했다 아래로 뒤접었다 하면서 (palm up palm down) 기도해야 하나님에게 상달된다는 이상한 교리를 말합니다. 기도할 때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건 땅을 향하건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불교에서나 통하는 이런 이방종교의 가르침이 지금 뻐젓이 기독교에 도입되고 있다는데 우리는 우려를 금치 못합니다.
요즘은 불교의 관행이 기독교에서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통용됩니다 불교의 사찰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십시오.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위로 향하게 했다 합니다. Foster 목사의 이 책이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주는데도 이 책은 어떤 신학교에서 강의시간에 참고 교재 목록에 올라갈 정도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참으로 요즘의 기독교는 요지경입니다.
Richard Foster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Azusa 대학교의 교수로 있는 분이면 나름대로 자기가 원하는 영성훈련을 전파하기위해서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Renovare> 라는 교회 혁신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 이라는 성경을 편집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상은 주로 <Celebration of Discipline> 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는데 그의 책은 한때 New York Times 의 best seller 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미국 복음주의 출판협회의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복음주의” 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옛날에 알고 있던 그런 개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의미의 단어로 변신했으니 “복음주의” 라는 말이 붙어 있다고 해서 모두 옛날의 복음주의 신학의 개념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명상영성 운동을 <Contemplative Formation> 이라고 하기도하고 또는 <Contemplative Spirituality> 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왜 나쁜 것이며 왜 막아야 하는지 오늘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강의하고 저 합니다.
오늘 강의의 초점은 “명상” 혹은 “묵상” 한다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느 종교에서나 중요합니다. 기독교를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하지 않고 머리를 비우고 기도하면 무아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속을 비우면 무아지경에 이릅니다. 힌두교에서 이런 방법으로 기도합니다. 힌두교를 본 받아 오늘의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그렇게 기도합니다. 앞서 언급한 Richard Foster 목사는 그가 새로 펴낸 책 <Life with God: Reading the Bible for Spiritual Transformation> 이란 책에서 이런 영성운동을 하면 <하나님의 운동선수> 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p.14). .
그가 말하는 “영성운동” 이란 <금식, 기도, 성경연구, 봉사활동, 혼자서 하는 영적인 신앙고백, 예배, 명상, 그리고 정숙> 이라고 합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들은 영성 이란 말을 명상하는 기도, 즉 명상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연관을 짓는데 이런 일들이 과연 성경적인가 보도록 합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영성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 무언으로 영성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라고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가 여부를 보자는 말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기도하는가? 이것은 힌두교에서 하는 기도방식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침묵하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비운채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기도 합니다. 이것이 명상영성운동을 하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선 구약 시편을 보도록 합시다. 왜냐 하면 시편에 구약 사람들의 기도의 모습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구약 시편은 이들 명상영성운동가들이 즐겨 인용하는 증거구절들이 많습니다. 구약의 시편기자들이 말하는 “잠잠할 지어다” 라는 말의 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관건이 됩니다. 이 구절을 명상영성운동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로 줄겨 인용하는데 이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잠잠하라” 는 말의 참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시편 제1편을 보면, “ 복 있는 자는 주야로 주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 라고 가르치며 이런 사람은 만사가 형통한다고 가르칩니다 (시 1:1-3). 또한 시편 119:15, 23 등을 보십시오. 같은 내용입니다. 묵상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면 그런 묵상한다는 말이 성경에서 어떻게 행하는 것을 가르치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침묵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묵상한다, meditate” 란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 인데 구약전체에 25번 나옵니다. “묵상 한다” 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구약에서만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신약 빌립보 4;8에 보면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라“ 란 말은 원문에서 ”로기조마이 logizomai"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명상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구약에서는 묵상을 언급할 때 필연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한다는 말이며 막연하게 조용히 앉아서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바를 명상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묵상” 은 그냥 속을 비우는 그런 묵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나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습니다. “나를 주의 목전에서 버리지 마소서 주의 영을 내게서 떠나게 마옵소서 (시 51:11) 라고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초점을 맞추고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했었다는 엄연한 진리를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에 초점을 맞춘 이런 명상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을 더했고 그들의 이런 영성운동의 태도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신앙행위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명기 28:1-68 참고).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형통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들은 한결같이 율법과 율례와 규례와 교훈과 말씀을 명상할 것을 권장했던 것입니다 (시편 1:2; 시 119:15, 23, 48, 78, 148 참고). 이스라엘 백성의 영성훈련에서 명상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본다면, 중간기에 나온 어느 외경에 보면 “너의 생각을 주의 율례에 두고 늘 그의 규례를 생각하라” 라고 말 합니다 (시라크 6:37 참고). 그러면 “명상” 이라는 히브리어 “하가” 나 “시아” 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 히브리인들이명상할 때 하나님이 침묵을 강요했는가요? 이 점에 있어서 구약의 “명상” 이라는 말의 뜻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구약을 보면 구약 어디에도 기도할 때 주관적 침묵의 의식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이방신을 믿던가 아니면 기독교에서도 신비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 몇 가지로 생각해 봅시다.
첫째, 구약 사람들이 명상할 때 그 명상이 항상 “하나님의 율법” 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말은 성경적 명상은 기도할 때 한 마디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며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 명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명상하는 일이 생각을 비우는 침묵을 유도하는 일, 다시 말하면 John Locke 가 말하는 “tabula rasa”(백지 상태) 상태에 들어간다고 가정합시다, 여기서 <tabula rasa> 라는 것은 우리 생각을 백지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백지를 만들어서 무엇이든 외부에서 들어오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명상을 통해서 시편기자가 의미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성도가 기도할 때 심성이 tabula rasa 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 한다면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요? (시편 19:14).
둘째, “명상‘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하가” 라는 말에는 “침묵” 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그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보면, “명상” 이라는 단어는 사자가 “으르렁 거린다” 는 의미로 쓰이는데 가령 이사야 31:4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언의 침묵” 과는 정반대가 되는 말입니다.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가 침묵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둘은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Richard Foster 나 그와 같은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이 성경구정를 저들의 증거구절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셋째, 어떤 성경구절에 보면, “명상” 이란 “입”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기를 “이 율법 책을 너의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켜 행하도록 할지니 그리하면 너의 길이 형통할 것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8). 이 성경구절에서 “입” 과 "묵상“ 과의 관계를 주목해 보십시오. 시편 19편에서 시편기자는 ”내 입의 말씀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랍되기를 원 하나이다“ 라고했습니다 (시 19:14). 여기서도 시편기자는 ”말씀“ 과 ”묵상“ 을 병행하고 있는데 즉 “내 마음의 묵상” 과 ”내 입의 말씀“ 은 함께 병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기자는 시편 19편 14절에서 그가 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명상“ 이라는 개념을 침묵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의 명상 이란 ”불교 신자처럼 또는 신비주의자들처럼 “침묵” 해야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명상할 때 성경을 나지막한 소리로 읽거나 암송했습니다. 즉 말씀이 없는 명상이란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넷째로, 구약에 보면, 명상한다는 말은 생각하고 무엇인가 계획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가령 시편 2편을 보십시오, 시편 2편은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라고 시작 됩니다 (시 2:1). 재미있는 것은 영문 성경 (KJV) 에는 “imagine' 이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이는 계획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명상한다는 것은 단지 말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생각하고 무엇인가 계획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성경에는 “민족들이 허사를 명상 하는고”라고 번역하기도합니다. (ASV 는 Peoples meditate a vain thing" 이라고 시 2:1을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이방들은 허사를 계획하며 명상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인 야웨 없이도 메시아 왕국을 건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2편에 보면, 명상한다는 말은 마음의 상태에 여유가 생겨서 하나님을 대적할 생각을 품게 된다는 말입니다 (창 6:5; 창 11:6; 렘 17:9 등 참고). 그런 악한 명상이 속을 비운 침묵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힌두교에서 하는 것 같은 머리를 비우면서 명상한다는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이런 점에 관해서 칼빈 선생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허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언의 명상을 해서 영성운동을 행하라고 교훈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명상 영성운동은 성경에 위배되며 사람이 만들어낸 생각에 불과하며 바꾸어 말하면, 이방종교에서 도입한 비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고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므로 배척해야하며 따르면 죄가 됩니다.
기도할 때 말씀에 집중하지 않으면 명상은 곧 바로 신령주의 (Spiritism) 로 빠질 소지가 많습니다. 신접자 들의 명상이나 또 중얼거림에 대해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히 경고하기를, 이사야 8:19절에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에게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여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처다 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암혹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암흑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이사야 8:19-22) 라고 이사야가 말합니다.
이 말씀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기도나 명상하는 사람은 성경에서 금하는 밀교의 경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구절입니다 (신명기 18:9-14). Richard Foster 목사 자신도 이런 위험을 아는 듯 “무언의 명상” 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나는 경고하고 저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으로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영적 세계에 들어가는데 가끔 초자연적인 인도를 받을 때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다. 영계에는 여러 가지 다른 현상이 있는데 어떤 영적인 현상은 분명히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다” 라고 Richard Foster, Prayer, Finding the Heart's True Home (San Francisco: Harper Collins Publishers, 1992) 157면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Richard Foster 도 이런 위험성을 알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위험성이 있으면 성경에서 그런 명상을 하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니 안 하면 그만입니다. 위험성을 무릅쓰고 무언의 명상을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계속-
소위 "명상 영성 훈련, 관상기도" 의 허구 (2) 최종회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Richard Foster 목사가 이렇게 경계하는 것은 성경적인 명상이나 기도를 할 때는 왜 반드시 성경을 보고 성경의 말씀을 듣는 일이 병행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인성으로서의 예수님을 마귀가 시험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광야에서 고독과 배고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시험을 당할 때 예수님은 무언의 기도로 일관한 것이 아니고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어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마태복음 4:4, 7,10 절 참고). 마태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 사건을 기록하면서 세 번이나 “대답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하시는 동안 혼자 고독하게 계신 적이 여러 번 있지만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의 사역에서 침묵의 명상을 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항상 말씀으로 기도하셨고 (요 17)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무언의 명상으로 일관하는 것은 불교나 힌두교의 관습이거나 신비주의자들의 관행입니다.
명상한다는 것은 내가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꿈꾸는 것 같은 그런 피상적 잠재의식적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상은 자기가 명상하는 주제에 마음을 집중하는 행위인데 그 주제는 성경이며, 성경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환상은 머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어 ?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신비주의는 명상을 설명하기를 개인의 생각은 덮어두고 이성적인 생각을 초월하며 어떤 알지 못할 황홀경으로 인도되어 극치의 신앙의 체험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명상이나 묵상은 시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Alan Richardson 이 편집한 A Theological Word Book of the Bible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0) 라는 책 142면에 기고한 James S. McEwen 의 "Meditate," 라는 글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묵상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의 묵상은 말을 하지 않고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Thomas Merton 같은 뉴에이지 운동가의 말은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묵상한다는 히브리어 (하가) 라는 말은 무언으로 묵상한다는 말이 아니라고 앞서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이미 우리가 보았거니와 구약에서의 “묵상” 이라는 말은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과 규례와 법도를 생각하면서 말을 하는 의식 있는 (conscious) 기도 행위를 말한다는 점을 아주 분명히 강조 하고저 합니다.
이렇듯, 묵상은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입니다. 묵상은 내가 행하는 능동적 해위이며 남에게 지배를 받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영향을 받으려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 묵상은 항상 의식적이며 (conscious), 뉴 에이지 운동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무아지경에 들어간 무의식적인 행위 (unconscious activity) 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명상은 조용하게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기도하고 소리 내어 말합니다. 심지어 사무엘 상 에 나오는 한나도 들릴듯 말듯하는 작은 소리로 기도했지만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을 엘리 제사장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 내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명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서 오래 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모두 비우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를 어떻게 비웁니까? 묵상하는 대상이 하나님인데 머리를 비운다면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흔히 목사님들 특히 신학이 약한 부흥강사들은 설교할 때 가끔 말하기를, “여러분은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tu야 합니다” 소리 지르는데 이는 비성경적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고 묵상에 잠기면 온갖 상념이 찾아오고 시편 1편의 말씀에서 가르쳐주는 묵상은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항상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San Francisco 남방 50 마일 근처에는 태평양 연안 경치 좋은 숲속에 Esalen Institute 라는 <뉴에이지 운동 훈련원> 이 있습니다. 여기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인데 (human potential development). 강사들이 거기서 가르치는 것은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심령을 외계에 전적으로 맡기면 초자연적인 능력이 들어오게 되고 신과 같이 된다고 힘 주어 가르칩니다.
물론 이들이 기도하는 기도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외계의 절대적 존재입니다. 그들은 천지에 있는 외계의 신에게 기도하는데 그들의 생각은 우주와 인간과 우주안의 모든 것은 모두 신의 일부라는 범신론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니고 따라서 기도하는 것도 우리처럼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핵심은 누구에게 기도하건 머리를 비우면 온간 이상안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머리를 비워놓으면 여러 가지 이상한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고 이상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 능력을 극치로 개발하여 신과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실제로 신이 된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placebo (의약, 약이 아닌데 약의 효과를 내는 것)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 미국의 IBM AT&T GM 등 큰 회사들이 New Age 의 운동가들을 초청하여 회사원들의 작업의 능률을 향상하기위해서 행하는 세미나로 실제 상품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Human Potential Development Movement 라고 합니다. John Ankerberg 와 John Weldon 의 Encyclopedia of New Age Movement 참고, 또한 Taxe Marrs 의 America Shattered (Austin, Tx: Living Truth 출판사) 참고,
요즘에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는 책들은 대개 성경을 외면하고 인간 자신에게 눈을 돌리도록 하는 인간 “잠재의식 개발” 이니 “적극적 사고방식 개발” “자존심 개발” 이니 하는 심리학에 성경을 예속시키는 서적 일색이라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읽으면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아마 그 대표적인 책이 Joel Osteen 의 “긍정의 힘” 이라는 책일 것이며 Bruce Wilkinson 의 “야베스의 기도” 라는 책일 것입니다 이런 책들이 날개가 돋힌 듯 팔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성경을 떠난다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교리를 가르치는가 보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변해 버릴 것을 딤후 4장에 예언하고 있고 딤전 4장에서도 예언하고 있으며 또한 딤후 3장에서도 예언합니다. 오늘의 소위 Unidentified Flying Object (UFO, 미확인 비행물체) 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됩니다. 무서운 속임수 (a great deception) 이 성행하면서 우리를 성경을 믿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촛점을 주님에게 맞추라고 가르칩니다. 빌립보 2:5에 “너희 속에 이 마을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마태복음 16장24절에서는 “주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고 명령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이런 뉴에이지를 권장하는 책들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현세에서 십자가를 피하고 현세중심으로 “성공”하며 “행복하게” 살자는 세속신학 뿐입니다. 요즘 중학생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는 The Secret 이라는 책도 그런 맥락입니다. 사람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모두 이런 서적을 탐독하기를 좋아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일을 기피합니다. 기독교를 마치 개인의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무속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모르거나 일부러 파괴하려는 사탄의 사역을 따라갑니다.
목상도 성경적 묵상에서 변질되어 갑니다.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 즉 말씀을 묵상하는 교리를 버리고 힌두교나 불교 등 이방신을 믿는 종교들의 관행을 따라가며 기독교의 독특성을 파괴하여 (obliterate) 결국은 어느 것이 진리이고 어느 것이 비 진리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하나의 종교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운동이 오늘날 색깔이 분명한 개혁주의 목회자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영의 눈이 어두운 일반 교인들은 그것을 모른 채 Brian McLaren 이나 Tony Jones 나 Doug Paggit 나 Rick Warren 등의 책을 탐독하며 비판 없이 따라갑니다. 아마도 앞으로 10년 후에는 “Emergent Church 운동을 지지하느냐?” 여부로 기독교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질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신학교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신학교 자체가 타락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간혹 좋은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학창시절에는 좋은 성적을 위해서 가르침에 순응하는체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모두 자기 편한 길로 가버리는 것이 오늘의 실태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믿음은 자기가 지켜나가야 하며 교회나 신학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의 교계는 점점 “Emergent Church 운동" 편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Emergent Church Movement 는 Brian McLaren 이나 Doug Paggit 같은 사람이 지도자로 있지요만 기독교를 ”재해석“ 하자는 것이며 기독교에 ”변화가 필요하다“ 는 것입니다. ”교리는 필요 없다“ 는 것입니다. 타종교과 야합하려면 기독교의 ”편협한“ 교리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성경에서 다른 복음을 따라가지 말라고 고후 11장에서 여러 번 하나님이 경고해도 죄악에 물든 세대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갑니다. 바로 경계하고 인도하는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심한 핍박을 받거나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4장에서 말하는 ”대 환란, The Great Tribulation"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대 환난 시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거짓 복음은 만연하고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떠나 귓맛 좋은 말만 좋아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으니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 거짓 선지자들은 우후죽순 처럼 도처에 창궐하여 이상한 가르침으로 교인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있는데도 교계 지도자들은 대부분 “교회의 숫자적 성장”. 만을 염두에 두고 교리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기독교의 현주소입니다. 오늘 진리의 복음, 개혁주의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은 설 땅이 없습니다..
성도가 성경말씀에 초점을 맞출 때, 명상은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만 아니라 전 인간이 명상에 참예하고 반응을 보이는데 몸으로는 말씀을 듣고 말하므로, 영적으로는 말씀을 인식하고 느끼고 순종하므로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는 행위가 되어야 참다운 “묵상” 의 구실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이란 본인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 사역, 기적, 법도, 그리고 그의 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을 말하는데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읽어보십시오. 시편 1:2; 시 63:6; 시편 77:11-14; 시편 119: 15, 23, 27, 48 78; 시편 148; 시편 143:5, 시편 145:5 등을 참고할 것.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명상영성 훈련> 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묵상은 성경적인 명상이 아닌 것이 분명함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언으로 기도한다고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자동적으로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영성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만을 생각하고 외우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나아갈 수 있게 됨을 성경이 가르쳐 줍니다. 성경을 지적으로 연구하고 순종하면 그것이 곧 명상행위 인 것입니다. 머리를 비운다던지 무언으로 기도한다든지 한다고 해서 성경적 명상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령의 지배를 받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할 때 참다운 성경적 묵상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Contemplative Spirituality 운동에 속지 맙시다.
에베소 4:14-15에 보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휼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속지 맙시다. 오늘 이런 <명상 영성 운동> 은 전 세계에 펴져 있건만 성도들은 아무런 성경지식이나 신학이 없으므로 맹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계합시다 주님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고 마태복음 24장에 말씀 하십니다. Contemplative Formation 명상 영성운동, 이것은 가장 비성경적인 신앙운동으로 동양 신비주의와 연합하여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살하려는 운동임이 분명합니다. Richard Foster 와 Thomas Merton (뉴에이지 운동가) 으로 대표되는 이 운동은 요즘 한국에서는 이름만 대면 모두 알수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중에도 이 운동에 가담하여 성경을 떠나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요즘의 특징은 옛날 한 때 한 때 성경에 충실하던 목사나 신학교 교수들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성경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영이 하나님에게 속했는가 보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어려운 때 살고 잇습니다. 이는 또한 주님 재림의 징조 이기도 합니다.
첫댓글 주님께 영광!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