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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 대민(주일낮)
사람을 끄는 사람(행20:7-12)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사람에게는 풍기는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탐욕스럽고 더러운 세상의 냄새만을 풀풀 풍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를 드러내야 합니다.
항상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자랑해야 하며, 지극히 작은 행동 하나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풍기는 냄새는 분명 생명과 의와 거룩의 하늘에 속한 냄새이지, 부도덕과 죽음의 세상에 속한 냄새는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의 빛이요 향기라는 사실을 기억해서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 사람이 저렇게 행복하게 저렇게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한 나머지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소 해서 우리를 따라 나설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39장6절에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여기서 요셉의 모습에 대하여“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요셉의 외모에서 풍기는 인품이 모두에게 호감이 간다는 뜻입니다. 얼굴의 미모만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는 보람을 느낄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역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무형의 멋, 인격 전체에서 풍기는 멋입니다.
바로 그 무형의 멋 또는 인격의 멋을 만나기가 오늘 우리 주변에서는 몹시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서 일을 처리하면서 사람을 대하고 사업을 하는 데는 재주보다도 덕성이 더욱 필요합니다. 머리보다도 인품이 중요합니다. 지능 지수보다도 삶의 바른 자세가 중요합니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불성실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신용과 덕망을 잃고 사회에서 설 땅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패배자로 전락해 버립니다.
생각만 해도 이유 없이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말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사람은 말이나 인품이 좋을 때, 즉 그의 말이 경우에 바르고 진실함과 덕스러움이 있고 그의 인품이 경건하고 선할 때, 다른 이들에게 칭찬을 듭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람들을 끄는 사람입니다.
1.들을 것이 있는 사람(7-8)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성도 된 자들이 신앙 성장의 비결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말씀 공동체입니다. 늘 모여서 이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듣던 그 말씀을 우리가 듣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듣던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듣던 그 말씀을 우리 자녀들이 들을 것이고 우리 손자들이 들을 것입니다
사도행전17장1-2절에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암비볼리"는 군사 도시로서 빌립보에서 33마일쯤(53.1084k) 떨어진 곳인데 거기서 "아볼로니아"까지는 30마일쯤(48.2803k) 더 멉니다. 그리고 아볼로니아에서 37마일쯤(59.5457k) 더 가면 "데살로니가"입니다.
"관례대로"란 말은 바울이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가리킵니다(롬 1:16).
바울이 "세 안식일"이나 걸쳐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성경을 가지고"란 말은 "성경에서"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곧, 성경에서 증거 재료들을 끌어내어 예수님의 메시야인 사실을 증명하였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구약 성경의 성취로 나타난 것이므로 바울의 설교는 성경 중심이 아닐 수 없고,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의 설교가 성경에 기준하였고 성경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책인 만큼 그리스도를 전하기만 위주하는 그가 성경으로써 설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론하며"란 말은 변론한다는 뜻이니, 바울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서로 문답하면서 변론한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에게는 들을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20-21절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나 전하고 가르쳤다고 증거 합니다.
그것은 그가 전하고 가르친 내용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물론 사람이 믿어야 할 내용과 행해야 할 내용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것은 실상 모든 성경에 관계됩니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 이는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중심 진리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나 산 죄 된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믿음', 이는 회개한 자에게는 반드시 뒤 따라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면 이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과 결부되지 않은 회개는 개과천선(改過遷善) 정도에 머무는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에서의 구원은 회개와 믿음이 병행되어야 이루어집니다.
고린도전서2장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된 그리스도만을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되풀이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 가지로 고린도에서도 인간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부활, 재림과 심판, 성령의 역사, 그리스도인의 삶 등에 대해서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대속의 죽음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의 설교의 중심으로 삼고 그것에 의거하여 다른 모든 주제들을 가리켰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 외에 다른 그 시대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말씀 선포에는 분명히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13장42절에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그들이 같은 설교를 또 듣기 원한 이유는 그들이 그 설교에서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는 잠간 있다가 없어질 이 세상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영원한 가치 있는 문제를 해결하였으니, 곧 하나님, 영생, 사죄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한 바울의 설교는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속의 은혜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은혜받기 위해 말씀 선포에 능한 설교자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듣는 자의 영적 준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바울의 강론으로도 심지어는 예수님의 설교로도 변화받지 못합니다. 말씀은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자, 즉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를 통해 삼십 배, 육십 배, 그리고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바울의 강론을 들으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이는 들을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신뢰를 주는 사람의 말을 들을 것이며, 진리를 전하는 자의 말을 들을 것이며, 행함이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을 것이며, 존경이 가는 사람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
들을것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사람을 끄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볼것이 있는 사람(9-10)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기적과 이사가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의 흐름을 역행하는 기적에서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까지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적이 나타나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야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람을 그렇게 많이 끈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을 따라 다니면 언제나 눈으로 볼 것이 많았습니다. 바울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따랐습니다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기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루마의 눈을 멀게 함(행13:10,11) 앉은뱅이를 일으킴(행 14:8-10). 귀신을 쫓아냄(행 16:18). 바울의 특별한 이적(행 19:11,12) 지진(행 16:25, 26). 독사에 물렸으나 해를 받지 아니함(행 28:5).. 보블리오의 부친의 열병을 고침(행 28:8)
바울의 이러한 기적 체험은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본문에도 유두고를 살린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3차 전도여행 중 연초의 무교절 절기가 지난 어느날 드로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일 주일을 머물며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주일예배는 주로 가정의 다락방에서 모였는데 다락방이란 1층이 주거 공간이고 주거 공간 위에 다락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윗 다락은 다락방 위의 또 다른 다락방으로서 이 윗 다락은 그리 넓지는 않은 하나의 작은 공간으로서 3층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예배 처소를 미처 마련하지 못하여 임시로 빌린 장소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도록 많이 모였습니다.
이때 유두고라는 청년은 예배 장소에 아마 조금 늦게 들어온 까닭에 앉을 자리가 없어서 겨우 창문턱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곳에 앉아서 깊이 졸다가 그만 창 밖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으니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자신의 몸으로 죽은 유두고의 몸을 덮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행동은 아이를 살린 엘리야와 엘리사를 떠올리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의 사도였던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렸던 것처럼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도 생명을 살린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로써 드로아 교회는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드로아 교회는 유두고를 볼 때마다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16장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믿음에는 반드시 기적이 따릅니다.
열명의 문둥이들은 믿음으로 가다가 불치병인 문둥병이 낫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그물이 찢어지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믿고 가는 길은 기적의 길입니다. 믿음은 기적의 어머니입니다.
사실 오늘날도 이러한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의 뜻을 이루어가시기 위해 자연의 법칙을 역행하시는 모습,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성도의 신실한 기도를 응답하시는 일 등이 바로 오늘날의 기적입니다.
사도행전19장7-12절에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여기서 사람들이 바울의 강론과 권면을 잘 들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을 구별하여 두 해 동안이나 잘 들은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오직 주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만이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가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만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통한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오늘날은 기적이나 보고 듣는 것을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은 위험한 신앙이요, 마귀에게 속기 쉽습니다. 말씀이 우리 신앙과 행위의 최고 표준입니다. 어떤 기적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비중을 두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성도의 신실한 기도를 응답하시는 일들이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끄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위로를 주는 사람(11-12)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이 세상에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병으로 지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한창 갈등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각종 무거운 정신적인 짐을 진 사람들도 있고 가난의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그네 삶을 사는 성도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악하고 성도는 약하며 늘 부족합니다.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많고 죄악 된 풍조의 도전이 강합니다.
성도에게는 항상 자신 속에 죄성 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악한 핍박자들도 많습니다. 성도의 길은 좁은 길, 외로운 길입니다.
시편 34편19절에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말하였습니다.
성도는 때때로 육체적 연약과 질병, 또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럴 때마다 성도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 때 만일 성도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면, 그는 낙심하고 낙망하며 혹은 자포자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연약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싸매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시시때때로, 때마다 일마다 그들을 붙드시고 위로 격려하십니다.
고린도후서1장4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하나님은 복음을 인하여 환난 중에 있는 성도를 찾아 가셔서 위로해 주십니다.
시편50편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가 환난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로써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능히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뢰(依賴)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고 그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줍니다.
“본문에서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드로아의 성도들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큰 기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주신 놀라운 사랑의 증표(證票)를 보면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대로(마 28:18-20) 자기들과 함께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말씀과 경험을 통해 확산하게 된 엄마누엘 신앙, 이것보다 더 큰 성도의 위로가 무엇이겠는가!”[카리스마 주석]
그렇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쁨과 위로보다 더 큰 기쁨과 위로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1장6절에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위로의 궁극적인 효과는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곧 위로받고 위로하게 되면, 결국 모든 고난을 우리는 넉넉히 견딜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견딘다는 말은 단순히 수용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적극적인 표현으로 승리합니다, 그리고 승리케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가 있어야 되고, 또 환난 중에도 위로받는 자기 나름의 비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재촉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계획에 대한 믿음 안에서 위로를 얻고 그 복음을 힘 있게 널리 외쳐 전하여 세상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불안해하며 고통 가운데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소외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치유해 주셨습니다(눅4:18). 특히 갈릴리는 이런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갈릴리를 주요 활동 무대로 삼으신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 역시 마땅히 복음 전파와 함께 위로와 치유의 사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위로와 치유의 사역을 풍성하게 청했던 갈릴리로 다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결코 세상에서 위로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위로해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이 사람을 이끄는 사람입니다.
1.들을 것이 있는 사람
2.볼것이 있는 사람
3.위로를 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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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도로서 사람을 이끌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앞장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