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가 신미대사에게
“내가 왕이 된 것은 오직 대사의 공”
순행(巡行) 후 서로 있는 곳이 멀어지니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인사드리는 일도 이제
아득해졌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고 번거로움도 많다보니 제 몸의 조화가 깨지고 일도
늦어집니다. 그렇다고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항상 부처님께 기도를 해주시고 사람을 보내어 자주 안부를 물어주시니 다만 황감할
뿐입니다. 행여 이로 인해 제가 멀리서 수행에 전념하고 계신 스님에게 폐를 끼치고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원각사의 일은 널리 들으신 바와 같고
끝까지 서술하기는 곤란합니다. 저의 지극한 정성에 부흥해 스스로 편안하게 머무르시기를
바라옵니다.
금을 보내드리오니 좋은 곳에 쓰시기를 바라며, 불개(佛盖)와 전액(殿額) 그리고 향촉 등
물건을 아울러 받들어 올립니다.
심신의 병 치유해 준
스승으로 섬기며
불교 외호신장 자임
세조(1417~1468)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불교 옹호정책을 실시한 임금
이었다. 간경도감을 세워 수많은 경전을 배포했으며, 각종 불교행사를 열어 스님들의
위상을 높이는데 앞장섰다. 또 원각사 및 비구니 사찰 정업원 등을 창건하고 심지어 일본
불교의 부흥을 위해 사찰중수금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불교를 억누르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공세를 펼치던 사대부에 기꺼이 맞서는 방파제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나라에서 불교도임을 당당히 밝혔던 세조. 이러한 배경에는
자신이 그토록 존경했던 스승 혜각존자 신미 스님(1405?~1489?)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는지도 모른다. 실제 세조는 자신의 수기에서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존자를 만났고
그 분으로 인해 늘 깨끗한 마음을 품고 어둠에 물들지 않았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모두 대사의 공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세조 10년(1464)에 쓰인 이 편지에서도 신미 스님을 향한 세조의 지극한 마음은 잘
나타나고 있다. 사실 이 순행은 세조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뿌리 깊은 죄책감을 복천암에서 극복할 수 있었고, 신미의 권유로 오대산
상원사 중창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신미도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통해
“우리 성상(聖上)이 천명을 받들어 만백성을 편안케 하시니 속인이나 승려나 누가 그
은혜를 갚사오리까”라는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세조의 상원사 지원사업은 다음해 불사 회향의 참석으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세조는 문수
동자를 만나 그 오랜 고질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게 된다. 이렇듯 신미는 세조에 있어
자신의 몸과 마음의 병을 낫게 해준 은인일 뿐 아니라 자신이 성군의 길을 가도록 격려와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선지식이기도 했다.
범어를 비롯한 인도문자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두루 해박했던 신미.
그는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23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집을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신미는 쉬운
한글경전의 간행과 사찰 불사 등으로 불교가 민중 깊숙이 스며들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려 애썼다.
그러나 신미의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이나 법문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이름을 남기기보다 일을 앞 세웠던 그의 고결한 인품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을 듯싶다.
이 편지는 1970년대 처음 발견돼 단국대 이호영 교수에 의해 학계에 소개됐다.
법보신문에서
첫댓글 그랬군요 ! 성군에게 선지식이 불법은 편안을 주는 메시지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