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방의 왕들
다니엘 시대의 왕들
다니엘이 바벨론제국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 바벨론에 있던 그 시대의 왕들은 모두 일곱 명입니다. 1, 나보폴라살왕의 아들 느브갓네살왕(B.C. 605~B.C. 562년) 그는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격파하고 수리아와 팔레스틴을 정복하여 지배권을 넓혔습니다. 2, 에윌므로닥왕(B.C. 562년~B.C. 560년)까지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통치 기간 중에 여호야긴을 옥에서 풀어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3, 까지 다스린 네르살사레셀 왕(B.C. 560년~B.C. 556년)예레미야선지자를 옥에서 석방시켰던 자입니다. 4, 라바시말둑(B.C. 556년, 9개월 만)에 제사장들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5, 나보니두스(B.C. 556년~B.C. 539년) 그는 기록에 의하면 신바벨론제국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다니엘 5장과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B.C. 539년 메대.바사에 의해 나라가 망하기까지 나보니두스는 그의 아들 벨사살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6, 벨사살왕(B.C. 539년) 메대 왕 다리오(Darius)가 바벨론 성을 점령했던 시기에 갈대아지방을 통치한 나보니두스의 아들이며 공동 통치자였습니다. 다니엘서에서는 느브갓네살이 벨사살의 아버지로 칭해지지만 그것은 느브갓네살의 자손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벨사살이라는 이름은 ‘벨 신이 왕을 보호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나보니두스는 B.C. 550년 경 벨사살을 섭정(대리 통치자)과 바벨론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중앙 아라비아에 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벨사살은 그의 부왕이 돌아올 때까지 10년간 바벨론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는 메대 사람 다리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7 고레스(B.C 539~B.C530) 그는 바벨론제국을 무너뜨리고 바사 제국을 설립한 자. 메대를 병합하여 메대. 바사 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는 즉위하면서 유대 백성을 포로에서 해방시키는 조서를 발표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리오라는 이름은 당시 그 지역에 흔한 이름으로서 역사에 여러번 나타납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 외에도 B.C. 521년에 대 바사(페르시아)의 왕으로 선언한 히스다페스의 아들로서 역사상 대 전략가 중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와 헬라(그리스)의 전쟁으로 헬라를 정복하려던 계략이 마라톤 전쟁의 패전으로 실패하여 세계사에 기록된 유명한 인물입니다. 바로 이 다리오가 다스리는 기간에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고향 가나안에서 성전 중수공사를 하였음을 스가랴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왕입니다. 그의 다른 이름은 크세르크세스입니다. 그런가하면 B.C. 330년에 마케도냐의 알렉산더대왕에게 패망한 페르시아의 마지막왕 다리오가 있습니다.
앗 수 르(아시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은 계속되는 배교 속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북왕국 10지파를 자신들의 제국내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이주 시켰는데 이때부터 북이스라엘 열 지파는 흩어지게 된다.
<북 이스라엘 멸망당하는 과정> 1.디글랏빌레셀왕(대상5:26):르우벤인과 갓인과 므낫세 반 지파를 끌고 가서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으로 데려감. 2. 살만에셀5세(왕하17:6):이스라엘백성을 끌고 가서 고산 강 곁에 있는 할라,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으로 데려감. 3.살곤2세(왕하17:24):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인들은 사마리아에 이주시킴. 이방인들은 자기 종교와 관습을 가지고 왔고(왕하17:29-31) 이들이 이스라엘의 잔존 주민들과 섞여 살며 나중에 사마리아인들로 불림.
Ⅰ. 앗수르 건설 (BC1350-612) • BC1350년경 앗수르 발리트1세에 의해 건설됨. • 니므롯과 나느웨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 • 노아의 아들 셈의 아들인 앗수르를 조상으로(창10:22)하고 있으며, 창10:11,12에는 앗수르의 도시들이 함의 손자인 니므롯의 영향아래 존재함을 나타냄(미5:6). • 앗수르는 바벨론 카시트왕조와 힛타이트, 이집트제국의 몰락을 계기로 제국으로 성장하여 메디아(메데)로부터 소아시아의 할리스강과 남부 이집트까지 확장. • 지리학적으로 메소파타미아 북부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하면서 BC19세기까지 남부 메소포타이아 왕들의 지배를 받았으나 독립과 세계제패를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여 살곤1세와 삼시-아다드1세 때에는 소아시아와 시리아까지 세력을 확장. • 그 후 호리족의 나라인 미탄니와 헷족속의 나라인 힛타이트 제국과 생존을 위해 각축하면서 마침내 아다드-니나리 1세 투쿨티-니누르타1세 등의 위세로 대제국의 기틀을 놓는다. • 아수르 바니팔2세(BC884-859)를 시작으로 세계 정복 전쟁을 하여 지중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Ⅱ. 성경과 관련된 역대 앗수르 왕들
1. 살만에셀 3세(BC859-825) •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과 예후와 동시대 왕. • 세부원정시기인 BC853년에는 시리아의 연합군들과도 접전했는데 이때 아합이 이끄는 이스라엘도 연합군을 이룬 나라 중 하나였다. • 12년 후에는 예후가 싸움을 포기하고 살만에셀에게 조공을 바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 살만에셀의 흑색방첨비에 새겨져있다. 2. 아다드-니나리 3세(BC810-782) • 서부원정에 나서 힛타이트, 다메섹, 두로, 시돈, 에돔, 블레셋 등을 복종시킴. • 이스라엘 요아스(BC798-782)에게서 조공 받음. (그 후 국세가 어느 정도 기울 때) •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BC793-753)는 강력한 국방정책과 경제부흥을 꾀하여 국력을 회복하기도 함(왕하 14:23-26). 이때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가서 경고함. 3. 디글랏빌레셀 3세(BC745-727) • 앗수르 최대의 왕 가운데 하나로 앗수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적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다. • 바벨론을 점령하고 스스로 바벨론 왕이 되어 “불”이라는 이름으로 통치, 디글랏빌레셀(왕하15:29), 불(대상5:26) • 북이스라엘 므나헴에게 조공 받음. • 베가왕 때에 이스라엘을 다시 침략하여 가자, 갈릴리, 요단동편의 이스라엘 영토를 앗수르의 3개의 주로 편성했는데 갈릴리 지방은 므깃도 주가 되 고 서쪽은 돌 주가 되었다. • 백성들 이산 정책 폄(대상5:26, 왕하15:29) • 왕하16:7-9 : 유다왕 아하스의 긴급요청으로 BC732년에 다메섹을 점령하고 아람왕 르신을 죽였으며(사7:8) • 이스라엘 왕 베가를 물리치고 호세아(BC732-722)를 왕으로 올림. • BC738년에는 하맛, 두로, 비블로스, 다메섹, 아람, 팔레스타인 대부분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음(유다왕 아하스, 이스라엘 왕 호세아도 조공국이 됨). 4. 살만에셀 5세(BC726-722) 왕하17:4 이집트소왕과 북이스라엘 호세아가 반역을 꾀하자 호세아가 통치하고 남아 있던 이스라엘 땅(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지역, 사마리아 남쪽)을 모두 점령하고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한 끝에 BC722년 그가 죽기 직전 함락하여 이스라엘 멸망시킴(왕하17:1-6).
5. 살곤 2세(BC722-705) • 북이스라엘 민족을 멀리 국외로 추방했으며 코르사밧에 새로운 궁전을 세우는 한편 반역한 국가들은 가차 없이 징벌(사20:1). 깃딤, 에그론, 아스돗 등을 점령하여 앗수르의 아스돗 주로 편성시킴. • 왕하17:24 여러 해에 걸쳐 바벨론, 하맛등의 지방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그곳에 다시 정착 시켰는데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와 관습을 가지고와 이스라엘의 잔존주민들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이 나중에 사마리아인들로 불리게 됨. 6. 산헤립(BC704-681) • 살곤 2세의 아들 • 각처의 반역을 무자비하게 대처하여 BC689년에는 바벨론성을 짓밟았다. • BC701년 서부원정을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왕들을 징벌하고 반역을 주도한 유다왕 히스기야를 치기위해 우선 요새인 라기스를 비롯하여 유다도시 유린(왕하18:13-16). 이때 히스기야는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게 된다(왕하18:14-16). • 후에 산헤립은 다시 유다를 침공하여 끝장내려고 예루살렘까지 접근했으나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주의 천사가 18만 5천의 군사를 죽임으로 인해 퇴각하고 말았다. • 앗수르 수도 니느웨에서 발견된 비석에서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발견됨(왕하19장, 대하32장, 사37장). • 후에 그는 본국에서 아들들에게 살해되었다(사37:38, 왕하19"36-37). 7. 에살핫돈(BC681-669) • 아버지를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은 산헤립의 아들로 왕위에 올라(사37:38) BC675년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최대의 영토를 확장. • 대하 33:11-13 : 므낫세를 데리고 바벨론으로 데리고 간 왕 8. 아수르바니팔(BC669-627) • 앗수르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최후의 위대한 왕 • 스 4:10에서 오스납발로 불림. • 스 3:9,10 : 많은 이방인들을 강제로 사마리아에 정착시킴. • 고대 세계 최대의 왕립도서관을 세워 고대의 각종 문헌을 수집하여 소장한 것으로 유명. 1853년 12월 20일 밤 영국사람 라삼에 의해 니느웨가 확인되고 이 도서관이 발굴. 기곳에 소장된 고대 바벨론과 앗수르 문헌 가운데 성경 창세기의 창조와 홍수이야기와 흡사한 점토판들이 발견.
Ⅲ. 앗수르의 최후 아수르바니팔 대왕 이후 점점 쇠퇴의 길. BC62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아버지 나보폴리살의 영도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도전 • BC 614년 메데로 시악사레스의 영도아래 앗수르성 함락 시킴. • BC 612년 바벨론, 메데, 스구시아 연합군에 의해 수도 니느웨가 3개월 포위 끝에 스바냐(습2:13-15), 나훔(나3:1-3) 선지자 예언대로 함락. •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버텨보려던 신-사르-이슈쿤(BC626-612)왕도 함께 죽었다. • 니느웨 함락 후 앗수르 유민들은 앗수르 최후의 통치자인 아수르-우발릿 2세(BC612-609)의 지도아래 유브라데를 건너 하란을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 지원 받으며 재기 노림. • BC 610년 나보폴리살은 동맹국 스구디아의 지원을 받으며 또 다시 하란을 점령했으며 BC609년 앗수르는 멸망당한다
. 바벨론 왕들 바벨론 제국은 유다를 멸망시킨 나라로서 선지자들의 예언(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등)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 세계사에서는 이 바벨론을 구분하기 위해 ①함무라비시대 : 고대바벨론 ②나보폴라살(느부갓네살)시대: 신바벨론(바빌로니아)로 부른다(BC625-539). 1. 나보폴라살과 느부갓네살 나보폴라살은 BC625년에 바벨론 왕이 되면서 갈데아 왕조를 세운다. 앗수르 군대를 패배시킴으로(BC609년) 대제국의 주인이 된다. 그는 일찍이 통치 초기에 왕궁수리와 더불어 아들 느부갓네살에게 왕권을 선포. 이 둘은 앗수르 왕이 하란에서 항복하던 시기에 함께 있었고 여기서 나보폴라살은 바벨론으로 갔고 느부갓네살은 3개월 동안 성을 약탈, 불 지르면서 전쟁의 선봉에 섰다. 이때 앗수르 멸망과 더불어 이집트 왕 바로느고는 자기의 세력을 위해 갈그미스로 올라와 느부갓네살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다 왕 요시아가 바로느고와 싸우러 나갔다가 므깃도에서 죽게 된다.(대하35:20-24) 이로 인해, 유다는 잠시 이집트의 영향아래 들어가게 되며 바로느고는 요시아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시켜 이집트로 잡아가고 그의 형제 여호야김(=엘리야김)을 왕위에 앉힌다.(대하36:1-4) 2. 바벨론의 왕성(BC605-562년) 초대 왕 나보폴라살의 뒤를 이은 그 아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예언한 금 머리처럼 그의 43년간의 통치기간은 황금시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세력을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일소해버리고 오리엔트 상업의 이권을 차지하였다. 이때의 유다도 이집트의 영향아래 있다가 바벨론으로 넘어가 마침내 느부갓네살에게 멸망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이에 이집트는 두로 시돈 등 유다주위의 여러 나라를 원조하여 동맹을 맺게 하고 바벨론에 대항케 했으나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집트의 국경선까지 세력을 확정 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BC 568년 이집트를 침략하고 그리고 대항한 여러 약소국들은 점령되어 엄벌을 받았으며 지형적으로 견딜 수 있었던 두로만이 포위 13년 만에 종주권을 인정받았을 뿐 이집트조차도 나일 강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 BC585년 : 메데인과 리디아인 사이에 휴전을 중재함 2) 두로 13년간 포위 3) BC568년 이집트 침략 바벨론을 1세기도 못되어 당시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느부갓네살은 군소국가의 정복과 상업독점으로부터 들어오는 막강한 재정으로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다. 당시 느부갓네살은 수도인 바벨론에 신전과 제단을 쌓았는데 신들의 여와인 이시타르를 위한 제단을180곳에 세웠으며 고대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세우기도 했다. 3. 느부갓네살과 예루살렘 파괴(BC605-262년, 43년간 통치) 갈그미스 전투는 느부갓네살이 이집트 세력을 꺾고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대규모적인 전쟁에서 이집트는 크게 패배.(BC605) 이 과정에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백성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때 선지자 다니엘도 잡혀간다. 느부갓네살은 이집트까지 진군해 가기 원하지만 나보폴라살의 죽음으로 회군하여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이미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서편에 통치권을 쥐고 있었으며 아버지 죽음으로 제국 전체의 주인이 된다. 그 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는데 여호야 김도 바벨론에 반역하였기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이스라엘 포로(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이때부터 공식적인 유대인들의 국가는 더 이상 없게 되며 이것이 예레미야 예언에 따른 “황폐함”이다(렘25:11). 느부갓네살은 고대 바벨론을 위대하게 재건했으며 43년간 통치하다가 BC56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4. 느부갓네살 이후의 왕들과 바벨론 멸망 (1) 에윌므로닥(렘52:31-34, 왕하25:27-30) ①유다 왕 여호야긴을 석방시켜준 왕 ②2년을 치리한 후 느부갓네살 사위 네리그릿살의 주축이 된 모반자들에게 죽임당함. (2) 네리그릿살 4년을 치리한 후 BC556년 전쟁에서 죽음 (3) 라보로소 알코드 네리그릿살 아들(저능아) 1년도 못되어 맞아 죽는다. (4) 나보니두스 ①느부갓네살의 또 다른 사위로서 왕위 찬탈 ②네리그릿살의 아내와 결혼하여 바벨론 멸망(BC555-538)까지 치리한다. (5) 벨사살왕(바벨론 마지막 왕) 주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들로 술잔치를 벌일 때 하나님의 손이 나와 멸망을 기록 했으며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당했고 바벨론은 멸망했다.(단5장)(BC539년 멸망) 나보니두스는 전쟁터(페르시아와 전쟁)에 나가 있었고 벨사살은 왕궁에 있으면서 대규모 연회를 가진 그날 밤 바벨론 도성은 이미 포위된 상태. 고레스는 바벨론 성읍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차단함으로 그 성을 무너뜨렸다. 세속 역사 속에는 나보니두스가 마지막 왕으로 되어 있고 벨사살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버지 나보니두스와 공동통치) 5.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느부갓네살은 유대인을 바벨론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썼다.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놔두고 그들을 잡아 가기만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사람들은 유프라테스 강 상 하류 지역에 폭넓게 위치. 에스겔 : 그발강가(겔1:3, 3:15)→ 하볼강과 동일하게 추측 다니엘 : 바벨론의 수도 바벨론 페르시아시대에는 이미 유대인들이 바벨론 왕국의 각 지방들에 산재하고 있었다(에3:8).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70년이 찬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포로이후 새롭게 생긴 종교적 중심지인 회당에서 종교적 역할을 함. 이 회당들은 신약교회가 세워지는 한 역할을 감당. 성경연구와 필사에 참여(성전파괴이후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못 드림으로) <바벨론 포로 70년> 포로70년을 신학자들 간에 다르게 계산한다. ①1차포로~1차포로 귀환까지 BC606~536 예루살렘 1차침공과 1차포로 시점 ~ 유대인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재건 명령한 고레스 왕 제1칙령까지 ② 성전중심의 종교적 계산으로 포로 70년 나옴. BC 587~516 성전파괴 ~ 성전재건 중심의 종교적 계산으로 포로 70년 나옴.
페르시아 왕들
키루스 1세 [Cyrus I] ?~? BC 7세기말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테이스페스의 큰 아들이며, 키루스 2세의 할아버지이다. 안샨(엘람에 있는 수사의 북동부)을 지배했으며, BC 7세기 후반에는 동쪽으로 파르수마슈까지 세력을 뻗친 듯하다. 그는 아시리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바빌론의 샤마시 슘 우킨에게 지원을 보냈으나(BC 651),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에게 엘람을 정복당한 뒤로는 아시리아의 종주권을 인정해야만 했다(BC 639경). 키루스는 큰아들 아루쿠를, 공물과 함께 볼모로 아시리아의 니네베로 보냈다. 키루스 2세 (재위 BC 559~BC 529, 30년간) < 페르시아제국의 건설자 > 1. 캄비세스 1세의 아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고레스왕이라고도 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어머니는 메디아왕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인데, 생후 곧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BC 559년 안샨왕이 되었으며, BC 550년 아스티아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에크바타나로 수도를 옮겼다. BC 546년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를 함락시켜, 소아시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다시 또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등 동방의 여러 지역도 평정하여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굳혔고, 이번에는 바빌로니아로 전진하여 BC 538년 나보니도스를 무찔러 칼데아(신 바빌로니아)를 멸하였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에는 파사르가다이로 도읍을 옮겼다.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마사게타이를 토벌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2. 캄비세스 2세 (재위 BC 529~522, 7년간) BC 525년 이집트를 정복했다. 키루스 2세 대왕과 아케메네스 가문의 딸 카산다네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왕(父王)이 생존시에 캄비세스는 바빌로니아에 대한 업무를 관장했다. 그는 BC 538년 신년행사에서 바빌로니아 왕의 의례 진행을 맡았으며, 부왕이 마지막 원정에 착수하기 전인 BC 530년에는 바빌론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집트의 정복은 키루스 때부터 계획되었지만, 캄비세스가 이룬 주요한 업적이다. 정벌은 이집트의 프삼티크 3세 때 이루어졌다. 캄비세스는 이 원정에서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또한 이집트군에 있었던 그리스의 장군 파네스로부터 귀중한 군사정보를 얻었고, 아랍족으로부터도 시나이 사막을 횡단할 때 식수를 공급받았다. 나일 삼각주에서 있었던 펠루시움 전투(BC 525)에서 캄비세스가 승리하고 헬리오폴리스와 멤피스를 함락하자, 이집트의 저항은 끝났다.이집트에 머물면서 캄비세스는 에티오피아와 아몬의 오아시스, 그리고 카르타고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다. 캄비세스는 직접 에티오피아 원정에 나서, 에티오피아 북부 지방을 합병했지만, 보급품 부족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테베에서 출발한 파견부대는 알하리자(하르가) 오아시스를 정복했지만, 아몬의 오아시스에 도착하기 전 모래폭풍에 휘말려 전멸했으며, 카르타고는 공격해보지도 못했다. BC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가 이집트에서 벌인 잔학행위를 미친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측 사료에 따르면, 그러한 비난은 대부분 근거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캄비세스는 적어도 그의 통치 초반기에는 화해정책을 추구했다. 후대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 대왕이 남긴 비문을 보면, 캄비세스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기 전에 그의 아우 바르디야를 남몰래 죽였는데(헤로도토스는 그의 아우를 스메르디스라고 불렀음), 그후 마기의 제사(祭司) 가우마타가 살해된 왕자로 분장해, BC 522년 3월 반란을 일으켜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캄비세스는 시리아에서 이 반란소식을 듣고, 이집트에 수비대를 남겨둔 채 황급히 귀국하던 도중, 시리아에서 BC 522년 여름 사고로 죽었는데,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3. 다리우스 1세[대왕] (재위 BC 522~BC 486, 36년간) 페르시아명 다리야바우시. 흔히 다리우스 대왕이라고 한다. 제사(祭司) 가우마타는, 선왕인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아(스메르디스)를 죽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르디아라고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선왕은 이집트로 원정을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죽었으므로, 그와 동행했던 다리우스가 귀국하여 여러 제후와 함께 제사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크테시아스가 그의 즉위에 관해 쓴 글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분명히 비문을 따른 글이지만, 전설과 결합된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다리우스와 공모자들이 그들 중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그들의 말[馬]에게 맡겨 결정하기로 했을 때, 다리우스는 그의 마부가 속임수를 쓴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가우마타를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오인한 제후들은, 다리우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2년간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다리우스는 이를 평정하여 제국의 기초를 확립한 뒤, 정벌의 상세한 기록을 비시툰의 산길 절벽에 새기게 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BC 518년~BC 510년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정벌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도 평정하였으며, 국토의 북변을 자주 침범한 스키타이인(人)도 몰아냈다. 또 두 번에 걸쳐 그리스 본토에 원정하였는데, 첫번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중도에서 실패하였고,두 번째는 마라톤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무장보다는 행정 조직가로서 후세에 명성을 남겼다. 광대한 영토를 20(23, 24, 28이라고도 한다)의 행정구인 사트라피(주 또는 방백령)로 구분하고, 총독에는 왕이 친히 임명하는 사트라프(방백)를 두어, 지방의 군사와 내정을 관장하게 하여 일정한 공물과 세금을 거둬들였다.또한 중앙집화의 수단으로서 교통로를 건설하여 군용 및 통상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 역전제(驛傳制)와 사트라프 제도는 그 이후 오랫동안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통치제도로 답습하였다. 그리고 파르수아에 페르세폴리스를, 엘람 지방에 수사를 조영(造營)하여 여름과 겨울의 수도로 삼았는데, 규모의 광대함은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4.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1세 (재위 BC 486~BC 465, 21년간)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이라고도 한다. 선왕 때부터 끌어 온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재위 3년째 되는 BC 483년부터, 아토스곶[岬]의 지협(地峽)에 운하를 만들고, 또 다르다넬스해협에 선교(船橋)를 가설하는 등 그리스 원정(제3차 페르시아 전쟁) 준비를 하였다. 재위 6년째 되는 BC 480년 봄, 육해군을 이끌고 사르디스를 출발하여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살라미스의 해전에서 그리스군에 패배하자 급거 귀국하였다. 재위 7년째인 이듬해 BC 479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플라타이아이전투에서 대패하고, 나아가 미카레에서도 패배하였으나 페르시아 영토 그 자체는 손해를 입지 않아 국위는 여전히 융성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결과, 이때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때의 패배를 아케메네스 왕조 몰락의 시작으로 간주하지만, 당시로서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와의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에 불쾌해진 크세르크세스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에 틀어박혀, 이때부터 일찍이 무거운 과세로 긁어모은 막대한 자원과 부를, 그는 방대한 건설계획을 추진함으로써 국력을 더욱 소모시켰다. ***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의 재위 기간(1장 1절, 8장 9절)은 헤로도투스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데,이것은 페르시아 왕들의 역사에서는 유레가 없는 일이다. 또한 아하수에로 제3년에 열린 대연회(1장 3절)의 기록도, 헤로도투스가 그의 책에, 페르시아 왕이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했다고 기록한 그 날짜와 시각이 일치한다. 수산궁에 관한 묘사도(1장 6절) 고고학에 의하여 그 사실성이 입증되었다. 아하수에로 왕이 제7년에 새 왕비를 맞아들인 사실도(2:16), '아하수에로가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아에 후궁(後宮 harlem)의 환락에 빠졌다'고 전하는 헤로도투스의 보고와 일치한다. 만년에는 왕궁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하렘의 음모에 휘말려, 465년 그 자신이 장남과 함께, 그의 대신(大臣) 아르타바누스가 포함된 궁전의 살인집단에 의해 쓰러졌다. 다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5. 아르타 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다] 1세 (재위 BC 465~BC 425, 40년간) 크세르크세스 l세의 아들. 부왕을 암살한 아르타바누스에 의하여 제위에 올랐으나, 얼마 후 그를 죽이고, 이집트와 박트리아 등의 난을 평정하였다. 재위 17년째인 BC 448년, 칼리아스협약을 성립시켜 아테네와의 화평에 힘썼다. 헤로도토스와 데모크리토스가 당시의 제국을 여행하여 그 지식을 그리스인에게 전하고, 또한 그리스 미술의 양식을 동방으로 전하기도 하여, 동서 문화교류로 왕의 치세는 고대 페르시아제국 융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기였다. 그러나 같은 해 BC 448년[재위 17년째] 키프로스섬 앞바다에서, 키몬이 거느리는 아테네 해군에 패하여 트라키아 등지에서 세력을 상실하여, 그 이후에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여 가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오른팔이 왼팔보다 길어 ‘롱기마누스(긴 팔)’라는 별명이 있다. 6. 다리우스 2세 (재위 BC 423~404, 19년간)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1세와 그의 첩(妾) 바빌로니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원래 이름은 오쿠스였다. 히르카니아 지방 사트라프(총독)를 지내다가 ,이복 형 세키디아누스(또는 소그디아누스)의 왕위를 빼앗고 그를 처형했다. 노투스(서자)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는 다리우스라는 이름을 썼다. 그의 치세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궁정은 음모와 부패로 가득 차 있었으며, 왕은 잔인하고 야심만만한 아내이자 이복 누이인 파리사티스와 환관들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히르카니아와 메디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 당했다. 다리우스 2세는 BC 413년에 시라쿠사에서 아테네군을 무찌른 후, BC 448년부터 아테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해안 도시들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소아시아 지방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와 파르나바주스를 시켜 밀린 공물을 거두어들였고, 아테네와 맞서기 위해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아테네와 전쟁을 한 후 이오니아 지방을 대부분 되찾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스파르타군에게 제한된 지원만을 했던 티사페르네스의 정책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BC 407년 다리우스 2세는 스파르타군을 아낌없이 지원하기로 결정해, 티사페르네스 대신 자기 아들 소(小) 키루스를 소아시아 지역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파르타 함대 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아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 아테네는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얼마 후 다리우스는 병으로 죽었다. 7.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재위 BC 404~BC 358, 46년간) 교양이 높고 기억력이 뛰어나서, 그리스사람은 그를 무네몬(기억이 좋다)이라고 불렀다. 다리우스 2세의 장자이다. 치정 초기에 동생 키루스(小)가 그리스인 용병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은 쿠낙사 전투에서 동생을 죽이고 그리스 용병을 패주시켰다. 이것이 그리스 용병 l만 명의 퇴각이라 하여,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Anabasis>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 원정에는 실패하여, 유프라테스강 이서의 땅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소아시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국내가 동요하고 궁정 안에서도 암살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이 불안 중에 아내와 자식이 잇달아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죽었다. 8. 다리우스3세 (재위 BC 336~330, 6년간) 왕가에서 갈라져 나온 먼 친척이었지만, 전왕(前王)인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3세와 아르세스를 독살한 환관 바고아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 3세가 환관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자, 바고아스는 그마저 죽이려 했으나 도리어 왕에게 사약을 받았다. BC 337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고 있는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코린트 동맹을 결성하고, BC 336년초 소아시아에 선발대를 보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7월에 다리우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암살당했다. BC 334년 봄,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대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페르시아는 전쟁 태세를 전혀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라니코스 강에서 패배했다. 알렉산더는 이듬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한 후, 킬리키아까지 진격했다. 마침내 다리우스가 직접 출전했지만, BC 333년 가을 이소스에서 패배해, 어머니·아내·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 후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에게 화해하자는 편지를 2번 보냈는데, 2번째 편지에서 동맹을 맺어준다면 자기 가족의 몸값으로 막대한 재물을 주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 영토를 마케도니아에게 모두 넘겨주겠으며, 자기 딸을 바치겠다고 제의했다. 알렉산더가 이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자, 다리우스는 그가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을 건너게 내버려둔 다음 ,지금의 모술 동쪽에 있는 가우가멜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BC 331. 10. 1). 그는 싸우고 있는 부하들을 버려둔 채 엑바타나로 달아났고, 알렉산더가 쫓아오자 다시 박트리아로 도망갔지만,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베소스에게 폐위당한 후 살해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제국은 멸망하였다. (단 5: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세였더라』 (단 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다리오왕(벨사살을 죽인 왕)은 고레스의 삼촌 정도라고 보여 집니다.. (단 9: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는 여기 다리오 왕을 말하는 것 같다. 다리오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은 왕. 사자 굴에 들어간 다니엘 총독의 나이는 약 80세 정도로 추정. 왜냐하면 바벨론 제국을 거쳐서 메대와 바사제국으로 들어가는 지점이기 때문. 바벨론 제국이 약 50년에서 60년을 통치했다. 그리고 다니엘은 10대 때부터 쭉 바벨론을 지켜봐 왔다. 느부갓네살 왕만 43년 통치를 했다.
<간추린 페르시아 역대 왕들> 키루스 1세 [Cyrus I] 고레스의 아버지 BC 7세기말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1. 고레스 (키루스 2세) (주전 539-530 치리기간 : 30년)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캄비세스 1세의 아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고레스왕이라고도 한다. 이때에 1차 포로귀환. 세스바살을 포함한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 입니다.. 2. 캄비세스 2세(주전 529-522 치리기간 : 7년) 고레스의 아들 이집트를 정복함.. 3. 바르디야(6개월), 고레스의 동생이자 캄비세스2세의 동생으로, 실질적으로는 가우마타가 통치함. 4. 다리우스 1세[대왕] 히스타페스(주전 522-486 35년) 페르시아명 다리야바우시. 흔히 다리우스 대왕이라고 한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에 의한 성전재건 BC520~515(<다리우스 2년~6년 아달월>스 5:2~6:18)]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스 5:1) 5.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1세(주전 485-465; 20년), 에스더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 약 BC 477년도에 일어난 일 입니다.. 에스더 왕후 책봉 사건년도 입니다.. 6.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주전 464-424; 40년) 2차 에스라 포로귀환 , 3차 느헤미야 포로귀환을 시킨 왕입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왕 입니다.. 7. 다리우스 2세(주전 423-405; 18년) 8.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므네몬 (주전 404-359; 45년) 9.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오쿠스 (주전 358-338; 20년) 10. 아르세스(주전 337-336; 1년) 11. 다리우스 3세(주전 335-331; 4년) 이후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함으로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 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