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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선생의 언론사적 평가와
친일논란에 대한 비판적 접근
정 대 수
(前 경남대학교 교수)
1. 문제의 제기
역사청산 작업은 단순명쾌하게, 또는 칼로 얽인 실타래 베듯이 자의적으로, 더구나 마녀 사냥하듯 할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다. 특히 역사청산 작업에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할 경우 그 과제는 더욱 어렵게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독재정권이든지, 또는 혁명 후 탄생한 정권은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서 역사 다시 쓰기를 한 사례가 적지 않은 만큼 잘못된 역사의 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되는 정치적 재단을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겉으로는 올바른 역사 재평가라고 내세울지라도 정치권력이 잘못된 역사청산을 주도할 경우 정치적 의도가 개입할 가능성이 내재하는 만큼 기본적으로 역사 재평가 과제는 역사학자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올바른 조치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실시된 친일인사 명단의 발표는 정부여당의 주도 아래 정치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을 추진하는 가운데 사회단체에서 나온 것이어서 미묘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는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 보다 현실적으로 친일인사 명단 발표를 전후해서 전개된 일련의 사태를 둘러싸고 나타난 문제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선 언론계의 선각자로서 나라를 잃은데 대한 울분을 토한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명 논설을 쓴 위암 장지연 선생을 친일 인사로 규정한 사실에 대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그 동안의 과정을 보면 그를 쉽게 친일명단에 포함시키기에는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차 명단에 서둘러 포함시킨 것은 친일여부를 자의로 재단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예컨대 한국 언론사 전공 교수의 반론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이지는 아니었다 해도 일부반론이 있어 왔고, 위암 선생에 대한 사회 각계의 평가가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한 단체가 일방적으로 친일 인사라고 발표한 것은 성급한 감이 없지 않다. 거기다가 일부 신문과 시민단체가 언론학계나 언론계의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마치 서둘러 단죄하듯이 해온 태도는 올바른 역사 재평가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말하자면 친일규정 문제야 말로 어느 과제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절차와 과정을 소홀히 한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언론계나 언론학계가 소극적으로 대처하거나 아예 무 대응으로 나와서 장지연 선생에 대한 친일논란을 둘러싼 여론형성 과정에 일방적 의제구성 효과를 가져 오게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남대학에 부임한 후 15년 동안 신문의 날이면 신문학 교육의 하나로서 인근에 있는 장지연 선생 묘소 참배와 함께 산상토론회를 통해 언론학도들에게 언론의 정도를 가르쳐 온 연구자로서 본인의 교육이 하루아침에 민족적 과오를 범한 것인 양 폄하될 위기에 놓이게 됨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평생 신문학 교육의 본보기로 여겼던 ‘시일야방성대곡’의 정신이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평가되기도 전에 일부 시민사회단체와 신문에 의해 역사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절하 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연구자는 장지연 선생의 친일관련 판단 결과에 따라 중고교 교과서를 수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어림잡아 1953년 휴전이후 정규교육이 정착되고부터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청소년의 가치관 형성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쳐 온 것으로 볼 수 있는 “시일야방성대곡‘의 민족정신까지 훼손하게 되는 중대한 문제에 주목하여 친일논란에 대해 비판적인 접근을 해 보고자 한다.
2. 연구문제
앞에서 제기한 문제에 따라 연구자는 다음과 같은 연구문제를 설정하여 장지연 선생의 친일규정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1) 경남일보의 친일 경향 보도가 장지연 선생의 직접 책임인가?
2) 매일신보에 게재된 장지연 선생의 기사는 친일을 입증하는가?
3) 한일합방 전에도 친일기사를 썼다는 보도는 사실인가?
4) 장지연 선생의 친일기사라고 하는 것은 당장에 단죄할만한 강경조치를 해야 할 것인가?
5) 이 문제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6) 장지연 선생에 대한 친일규정 움직임은 일방적 여론몰이식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3. 장지연 선생의 언론사적 평가와 친일논란과 관련한 쟁점
1) 장지연 선생에 대한 평가
(1) 언론사적 평가
♤한국언론연구회는 위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 발표 100주년을 기념해 4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시일야방성대곡 100주년의 역사적 의미―위암 장지연의 항일언론활동과 사상적 변모’를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주제 발표에서 “황성신문에 게재된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과 을사늑약의 전말을 다룬 기사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은 을사늑약이 고종의 허락을 받지 않아 무효라고 지적한 최초의 글”이라고 언론사적 의의를 밝혔다. 정 교수는 이어 “ ‘시일야방성대곡’의 전문은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와 또 다른 영국인이 일본 고베에서 만들던 ‘저팬 크로니클’이 영문으로 번역 게재해 해외에 알려졌다”며 “‘시일야방성대곡’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는 기폭제가 됐다”고 장지연의 업적을 강조했다.(동아, 2005, 4, 4)
♤한국언론사 전공인 정진석 명예교수는 “장지연이 언론인의 사표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기개와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이다. 그는 일본의 군대가 궁성까지 진입, 총과 칼로 대신들을 위협하여 치욕의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던 살벌한 상황에서 이 글을 썼다.”고 평가했다.(경향신문, 2005, 4, 8)
♤장지연이 주필로 있던 경남일보는 1920년 한일합방을 당하고 난후 10월11일자에 梅泉(매천) 黃玹(황현)의 「絶命詩(절명시)」를 게재하였다가 열흘 동안 정간당하는 탄압을 겪었다. 「절명시」의 말미에 張志淵은 황현을 애도하는 글을 실을 만큼 抗日의지는 살아 있었다.
♤장지연기념사업회를 설립, 기념상을 비롯 각종 문화사업을 실시함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장지연 선생 을사오적 회유 뿌리쳐" 보도(연합뉴스, 2005, 5, 6)
♤1907년 일제에 의해 황제 없는 양위식이 강행되자 장지연(張志淵) 등이 주동이 된 대한자강회가 나서서 격렬한 양위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한 달 만에 일본에 의해 해산됐다(동아, <책 갈피속의 오늘>, 2005, 7, 20)
♤대한언론인회(회장 이정석)는 24일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를 1차 헌정자 장지연을 포함한 7명을 선정했다.(조선, 2004, 3, 24)
♤장지연기념사업회-장지연 서간집 발간(경향신문, 2004, 4, 26)
(2) 문화적 평가
♤오는 10월중 개관을 목표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갈 문학관에는 마산에서 출생했거나 마산에서 활동한 장지연 선생 등의 작품과 유품 등이 전시된다고 보도(경남신문, 2005, 5, 21).
♤마산문학관 개관준비위원회가 마산문학관에 전시할 문학인에 장지연을 포함하여 22명이 잠정적으로 확정됐다고 보도(경남신문, 2005, 7, 8)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 대상을 기존 부동산에서 문화·예술·생활 분야 등 동산개념의 근대문화유산까지 범위를 확대함에 따라 “문신 조각품·장지연 저서… ‘등록문화재’ 지정 가능성 높다”고 보도(경남신문, 2005, 8, 4)
♤마산문학관 내달까지 첫 특별기획전. 장지연, 김형윤 선생은 언론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제외했다고 보도(경남신문, 200, 9 14)
(3)독립운동사적 평가
♤국가보훈처는 29일 을사조약 체결을 비판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1864∼1920·사진)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동아, 2004,10,29)
♤독립기념관은 오는 11월20일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100돌을 기념해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비’ 건립을 추진. 최근 위암의 친일행적이 드러나자 ‘건립’에서 ‘신중 검토’ 쪽으로 방향을 선회.(경향, 2005, 3, 4)
♤광문회는 정신적 항일투쟁과 신문화건설본부로 3·1독립운동을 모의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곳이다. 박은식, 주시경, 김두봉, 장지연, 홍명희, 변영만, 정인보, 한용운, 오세창, 이광수, 안재홍, 현제명, 안창호 등 제제다사들이 모여 우국의 열정으로 시국담론·민족자결결의를 다진 한국근대정신 발원지이기도 하다.(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슬프다, 광문회’ 기고, 조선, 2004, 9, 5)
(4)교육적 평가
♤중고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청소년 교육에 중요한 의의를 지님.
♤대학 언론관련 학과에서 ‘시일야방성대곡’을 애국적인 명논설로 가르침
2)친일논란과 관련한 쟁점
(1) 연구문제 1)경남일보의 친일 경향 보도가 장지연 선생의 직접 책임인가와 관련한 쟁점
♤1911년 11월 2일자에 실린 일왕 찬양 한시의 집필 문제
경남일보는 11월 2일자에 일왕의 성수무강을 기리는 천장절 축하 기념 한시를 실었다
이에 앞서 장지연은 1909년 11월5일자에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 역에서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글까지 게재한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 축시는 장지연이 썼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는 주장이 있는 한편 그렇지 않다 해도 당시 주필이었던 만큼 크게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편 정진석 교수는 △천장절 전후 장지연은 숭양산인(崇陽山人)이란 필명으로 한시를 자주 실었는데 문제의 한시는 무기명인 데다 당시 경남일보 주변에 한시에 능통한 이들이 많아 그가 지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고 △경남일보는 경영과 편집체계를 갖추어 지역 유지들이 초빙한 주필은 편집권이 없었으며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던 시기에 경영이 어려웠던 지방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연합뉴스, 한국언론연구회 심포지움, 2005, 4, 4)
경남도민일보는 이에 대해 현재로서는 장지연이 이 한시를 지었다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명이 아닌데다 장지연이 썼다는 기록을 어디서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이 한시가 빼어나다는 말도 장지연이 썼다는 증거가 되기 어렵다. 장지연 한시의 구체적인 특징과 이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문제의 한시가 졸렬하다는 평가도 공존하기 때문이다.(경남도민일보, 장지연 일왕 찬양 한시 진위 논란 사실일까?, 기명 아닌데다 썼다는 기록도 없어, 2005, 3, 10)
♤경남일보의 친일 보도에 대한 책임문제
경남일보는 1910년 11월2일자에 일본왕 명치(明治)의 생일인 천장절에 제호에다 일장기가 교차하는 모습을 실었다. 경남일보는 그 이듬해 11월2일 천장절에도 일장기가 걸린 제호과 함께 1면 톱기사에 축실르 싣고 다음날 기사에는 “천장절 경축행사는 진주군 수정봉 정상에서 천가지의 등화로 봉장한 ‘축 천장절’이란 네 글자가 밤을 밝히는 가운데 진행됐다. 50개면에서 수백명의 군민들이 모여 천장절을 경축했으며 즐거워했다”고 보도했다.
경남도민일보는 이에 대해 받아들일만한 주장은 김경현 위원이 제기한 ‘주필 책임론’뿐인 셈인데 여기에도 세 가지 시각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김 위원처럼 “당시 주필은 논조를 결정할 뿐 아니라 기사를 넣고 빼는 권한까지 가졌으며 실제 행사도 했다”고 보는 것이다. (부)사장이나 지배인 총무 등은 모두 경영 관련 직책이고 이들의 편집에 대한 권한은 없거나 적었으며 편집에서는 주필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찬양 한시 등 <경남일보>의 친일 행적에 대한 책임은 주필에게 크게 돌아간다.
이와 달리 최기영씨는 91년 펴낸 <대한제국 시기 신문 연구> ‘진주의 <경남일보> : 유일의 지방지’ 167쪽에서 “편집은 주필인 장지연에게 전권이 위임됐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그 근거로 “신문이 현실 정치와는 무관한 계몽 성격에 국한돼 경영진 입장이 견지됐다고 보이며 1913년 주필을 사임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경영진과 대립이었”음을 들었다.
마지막은 주필을 편집을 총괄하는 지위가 아니라 논설 전문 기자로 보는 시각이다. 이 경우 장지연의 책임은 거의 없게 된다.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 교수를 지낸 정진석씨는 논문 ‘장지연의 언론 활동과 언론 사상’에서 “(<황성신문>에서) 장지연은 박은식 유근과 함께 주필이었는데 당시 주필은 논설 기자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인이 1908년 쓴 ‘구한말의 신문사 풍경’을 보기로 들었다.
<신문평론> 1964년 4월호 창간호에 번역돼 실린 글에는 “사(社)에 따라서는 전문의 논설기자, 즉 주필기자를 두고 있는 곳도 없지 않다”고 적혀 있다. 이 셋 가운데 무엇이 당시 사정과 가장 가까운지는 아직 제대로 밝혀져 있지는 않다. 관련 학계의 전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경남도민일보, 장지연 일왕 찬양 한시 진위 논란 사실일까?, 기명 아닌데다 썼다는 기록도 없어, 2005, 3, 10)
(2) 연구문제 2) 매일신보에 게재된 장지연 선생의 기사는 친일을 입증하는가와 관련한 쟁점
장지연은 1913년 경남일보를 물러난 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15년 신년호에 실은 ‘조선풍속의 변천’에서 “조선총독부가 5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물산공전회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쓸모없는 것은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해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해 나열한 것”이고 했다. 같은 해 7월13일자 ‘만필소어’라는 기사에선 “동양대국은 오직 일본과 중국 두 나라일 뿐이고 서로 손을 잡고 친선한 다음에야 외부를 막을 수 있다”고도 했다.
1915년 7월 3일자 기사 구주 전란의 기인(8)에서 “20세기는 민족 연합주의가 진행되고 군국주의와 척토(拓土)주의가 는다 …… 아시아 민족은 일본의 강역 한계를 뛰어넘어 같은 대륙 같은 민족으로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하는 논설을 썼다
1916년 2월 10일 매일신보에 실린 한시 ‘환영 하세가와(長谷川) 총독’의 번역문이다. 하세가와는 1905년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통감부의 임시통감을 지낸 인물이다. 그 하세가와가 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오는 것을 축하하는 시다.
1918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대정육년시사(大正六年詩史)’란 제목으로 시를 실었다..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왕 대정(大正)을 만나러 간 사실을 소재로 일제 식민통치를 찬양한 내용이다.
1917년 6월 8일자에서 “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으니 …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했다.(이상 김경현, 진주지역 친일인명록1, 민족문제연구소, 2005, 3, 1에서 발췌. 일부 경남도민일보 위클리경남, 2003, 3)
정진석 교수는 “그는 매일신보에 적지 않은 글을 남겼으나 중요한 내용은 역사와 유교에 관련한 것들이다. 그 가운데는 오늘의 관점에서 시국을 잘못 읽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부분도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민족을 팔아먹는 자가 親日派다. 그러나 張志淵은 그런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張志淵의 自彊(자강)주의는 1910년의 日帝 강점 이후에 점차 강성한 일본의 아시아 제패를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하고 조선의 식민지화를 긍정하는 쪽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張志淵이 적극적인 親日로 나아갔던 것은 아니다. 그는 더욱 유교에 매달렸고, 문명화를 위한 유교의 개선과 진흥을 강조하였다. 이는 張志淵이 지닌 사상적 한계였던 것이다”고 평가했다.(월간조선 5월호 기고)
김재현 경남대 교수(철학)는 "1915년 이후 위암의 매일신보 글을 친일행위로 볼 여지는 있겠지만 같은 시기 민족문화에 대한 글들을 실어 이를 '조선유교연원'이라는 책으로 묶어 내는 등 다른 측면이 있는 만큼 보다 섬세하고 신중한 접근과 위암의 생애와 사상 전체 맥락을 고려하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미디어오늘과 통화, 2003, 7)
(3)연구문제 3) 한일합방전에도 친일기사를 썼다는 보도는 사실인가와 관련한 쟁점
경남도민일보는 “1904년 5월 6일 <황성신문>을 통해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해 백인종과 맞서야 황색 동양이 살 수 있다”고 하는 등 친일행적이 있다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보도한 바 있다. 즉 “1904년 러일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위암은 당시 사장으로 있던 <황성신문>의 5월 6일자 2면 논설을 통해 아환선생문답을 발표하고... 친러파는 은밀하게 사정을 살피며 이기기를 바라면서 따라 붙고 있으니 천하대사를 그르치고 동양 전국(全局)을 망치는 일이라고 하면서 북경에 달려가 청나라 조정의 뜻을 돌려 동양 정세를 부지하고 황색 종족을 보전하려고 한다”, “이어 11월에는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가 당시 황제인 고종과 조정 대신을 협박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므로 위암의 이 같은 황색 인종 대동단결론은 앞뒤 사정에만 비춰 봐도 매국적임을 바로 알 수 있다.”고 보도했다. (경남도민일보, 2003, 3, 6)
그러나 이 시기에 국제관계로 보아서 장지연과 같은 국제관은 지식인 사이에 일반적으로 공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서 반드시 친일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4) 연구문제 4) 장지연 선생의 친일기사라고 하는 것은 당장에 단죄할만한 강경조치를 해야 할 것인가와 관련한 쟁점
국가보훈처와 장지연기념사업회 등은 한때의 친일행위만으로 위암의 전 생애를 단죄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국가보훈처 김용달 연구관은 “위암의 친일행적은 그의 사상의 한계에서 나온 것일 뿐 행동으로 드러낸 것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위암의 친일행적은 길을 가다가 발을 헛디딘 격”이라며 “춘원 이광수 등의 적극적인 친일과 비교할 사안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이종석 부회장은 위암의 친일행위 폭로에 곤혹스러워 하면서 “일도양단식이 아닌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 2005, 3, 4)
글과 인물을 평가할 때에는 시대상황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나라의 운명이 다했던 100년 전에 살았던 언론인의 행적을 오늘의 상황에 끌어다 놓고 작은 흠집을 찾아내어 그보다 훨씬 큰 업적을 덮어버리면서 더 치열하고 완벽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매도하는 일을 역사청산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다면 역사의 또 다른 왜곡이며, 허무주의밖에 남을 것이 없다.(경향신문, 2005, 4, 8, 정진석)
장지연이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위암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친일 기사를 쓴 사실이 검토는 됐으나 “추상 같지 못해 아쉽지만 전체를 덮을 정도는 아니다”고 정리돼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2일 “위암의 친일 기사에 대해 광복회와 민족문제 연구소·독립기념관을 대표하는 이들과 관련 학자들로 이뤄진 심의위원회에서 함께 검토했으며 직접 해악을 미치지 않았고 삶 전체를 훼손할 정도도 아니라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독립운동가 가운데도 <매일신보>에 글을 실은 사람이 적지 않은 점과 1920년 이전에는 다른 매체가 없었다는 점도 고려됐다”면서 “친일 행적이 문제가 된 독립운동가를 선정하기는 이번이 처음인 줄 안다”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위암 장지연은 확정적으로 말할 단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방 국장은 “친일로 단정하려면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유보됐다”며 “앞으로 ‘일제강점하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법’ 시행 과정에서 친일을 입증하는 자료가 나오면 선정 취소 같은 후속 조치가 나와야 한다”고 밝혔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홈페이지 <자료관> ‘영상 자료실-친일 인물’에 장지연의 얼굴 초상을 실어놓고 있다.
(5) 연구문제 5)이 문제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관련한 쟁점
경남도민일보의 태도
일찍이 2003년부터 장지연의 친일문제를 보도하가 시작한 경남도민일보는 2005년 3월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고 공과를 평가하는 일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부 아니면 전무식으로 진행되면 안 된다. 일부 매체는 이를 보도하면서 장지연 아들이 마산부 판임관을 지낸 친일파였음을 곁들이고 있다. 위암을 옹호하기 위해 드러난 사실을 부인하거나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는 태도는 맞지 않다. 친일 행적이 드러났다는 이유로 친일파 아들까지 끌어들여 매도하려 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도민일보,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기, 2005, 3, 14)
이후 도민일보는 지역 시민단체의 급진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면서 장지연이 친일인사라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반면에 다른 신문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6)연구문제 6) 장지연 선생에 대한 친일규정 움직임은 일방적 여론몰이식으로 진행되고 있는가와 관련한 쟁점
경남지역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 8월29일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하기 이전부터 일부 시민단체와 신문이 장지연의 친일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 왔다. 그러다가 친일인사 명단이 발표되자 지역 시민단체는 이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장지연로의 지정 취소를 비롯 문화재 지정 해제, 서훈 박탈 등을 요구하며 일방적 급진적으로 사태를 몰고 가려 하고 있다.
반면 언론학회나 언론계는 물론 관련단체 등은 이에 소극적으로 대응하여 장지연의 친일논란을 둘러싼 의제구성에 일방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커지고 나아가 여론 형성이 왜곡될 우려마저 없지 않다.
4. 언론학계의 동향과 언론의 보도경향
1)언론학계의 동향
그 동안 장지연의 친일논란이 계속되었으나 언론학회 차원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국언론연구회에서 시일야방성대곡 100주년을 기념하여 심포지움을 열었고, 정진석 교수가 개인적으로 주제발표를 했을 뿐이다. 연구자가 지난 9월초 사안의 긴급성을 감안하여 언론학회에 긴급토론회나 특별세미나를 제안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 개인적으로 발표를 하게 되었다.
2)언론의 보도 경향
일부 신문은 시민단체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여 “장지연 ‘일왕찬양’ 漢詩 게재”라든가, “장지연, 총독부기관지에 내놓고 日찬양” 등 기사를 실었으며, 나중에
“장지연 全생애 단죄 곤란, 학계·정부선 신중”이라는 기사로 공정성을 기하려 했다. 또한 “장지연 선생도 친일?… 선정 기준 논란”, “장지연 등 예상 밖 인물도, 영친왕포함여부 이견” 등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장지연의 친일논란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신문은 없었다. 대체로 발표위주로 보도를 하고 말았다.
반면에 일부 지방신문만이 장지연의 친일을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5. 친일논란에 대한 비판근거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의 선정기준을 다음과 같이 수록대상 기준, 세부기준, 분야별 선정기준 등 3단계로 정하고 심사를 했으나 장지연선생의 친일 행적이 명확하게 어디에 해당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선정기준>
1) 수록대상
‘을사늑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ㆍ식민통치ㆍ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를 수록대상으로 한다...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의 경우는 그 사회적 책임을 엄중히 묻는다는 취지에서 수록대상으로 삼았다.
2)세부기준
4항 일제의 황민화정책ㆍ침략전쟁에 협력한 자중 (6)문학ㆍ예술ㆍ교육ㆍ학술ㆍ언론ㆍ종교 등의 분야에서 일제의 황민화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
5항 기타 친일행위자 중 (6)위의 각 항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현저한 친일행위가 확인되는 자
3)분야별 선정기준
6항 언론 중 (3)논설·평론·좌담회·강연회 등을 통해 황민화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언론인
<선정기준 적용 관련 참고사항>
7. 언론·출판·교육·학술의 경우 관련 친일기관의 직위와 함께 활동(특히 문필활동)을 중요한 선정 요인으로 삼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또 주요 인물 친일행적에도 장지연의 행적자료를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홈 페이지에 있는 자료관내의 친일행적 자료는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으면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하여 장지연 관련 자료가 어떤 것인지, 과연 친일을 단정할만한 것인지 알 수 없도록 했다. 따라서 일부 신문의 보도와 특정인의 주장 및 진주지역 친일인명록을 자료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지연 선생의 친일규정에 대한 반론들이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서울대 박효종(朴孝鍾·정치학) 교수는 “근현대 인물 평가에 대해서는 학계에 폭넓은 의견이 존재하는데 이번 발표는 편협한 사관에 기초해 일방적 유권해석을 내린 측면이 있다”며 “민족문제연구소가 ‘학술 민간단체’라는 우산 속에 숨어 일단 명단부터 발표한 것은 진상 규명을 여론재판식으로 끌고 가자는 의도가 아니냐”고 지적했다. (동아, 2005, 8, 30)
기념사업회는 “설사 몇몇 기고문이 논란의 여지가 있어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등 선생의 전공(前功)을 떨어뜨릴 만큼 엄중한 친일 행위는 아니다”라며 “사소한 것을 빌미로 선생을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의 반열에 놓는다면 역사에 대한 자해행위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친일 청산에 반대하지 않지만 그 작업이 일면적이고 지나친 순결주의에 치우쳐 큰 공이 있는 선인까지 친일파로 매도해선 안 된다”며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한 기준을 마련해 친일 청산 노력을 기울이기 바란다”(장지연기념사업회, 성명. 동아, 2005, 9, 21)
국가보훈처와 장지연기념사업회 등은 한때의 친일행위만으로 위암의 전 생애를 단죄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국가보훈처 김용달 연구관은 “위암의 친일행적은 그의 사상의 한계에서 나온 것일 뿐 행동으로 드러낸 것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위암의 친일행적은 길을 가다가 발을 헛디딘 격”이라며 “춘원 이광수 등의 적극적인 친일과 비교할 사안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이종석 부회장은 위암의 친일행위 폭로에 곤혹스러워 하면서 “일도양단식이 아닌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 2005, 3, 4)
민족문제연구소 등 관계자들은 왜 충분한 검증도 없이 단편적 사실들만 가지고 성급하게 장지연 선생을 친일인사로 서둘러 발표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동안 일부 지방신문과 시민단체의 문제제기에 이어 서울의 신문방송 보도, 이에 대한 반론 등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언론사의 전문가 등에 의한 검증 없이 서둘러 발표한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편찬위원장은 "친일 명단 수록 예정자라고 명명했듯이 향후 명단에서 빠질 수도 있다"고 한 만큼 신중을 기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경남일보의 폐간 후 매일신보에 실은 글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친일인사 선정 기준에 들어맞는지 한국언론사 교수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판단할 일이었다.
6. 올바른 역사 재평가를 위한 제언
1)사회단체의 장지연 선생 친일규정에 대한 언론학회의 입장 표명
2)한국언론사 전공자와 관심 가진 자를 중심으로 한 특별토론회 개최
3)언론학회내 장지연 선생의 친일진상규명위원회 설치
4)언론사는 장지연 선생 친일논란에 대한 보다 적극적 심층보도
5)장지연 선생 기념사업회 등 언론, 시민, 사회단체의 보다 적극적 의견 개진
6)장지연 선생을 친일로 규정한 일부 신문과 시민사회단체의 무죄추정원칙에 의한 접근
7. 결론
위암 장지연 선생의 친일 글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선생의 기본정신을 훼손할 정도인가 하는 문제는 한국언론사의 보다 큰 맥락에서 판단해야 될 일이다. 언론사적 맥락에서 보아야 할일을 언론 외 인사들이 단편적인 사실들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민간기구가 함부로 과거사를 재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만큼 장지연 선생 부분은 전문가들로써 올바른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문제는 한국언론사의 왜곡을 바로 잡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나 국가보훈처 등 관련 기관은 일부 시민사회단체의 일방적 주장 보다 합리적인 절차와 과정을 거쳐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민특위의 해체로 인한 친일역사 청산작업의 중단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일역사 청산작업에만 경도된 나머지 억압의 시대, 절망의 시대인 일제시대의 일을 두고 오늘의 잣대로써 왜 죽을 때 죽더라도 처절하게 부딪치며 살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그야 말로 과거사 정리는커녕 엄혹한 역사 현실을 외면한 공허한 독선이 될 뿐이다. 이념적 명분과 정열만 가지고 중국 공산당의 문화혁명이나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식 불교역사 파괴처럼 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역사 바로세우기가 역사 뒤집기로 탈바꿈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첫댓글 지난 10월 8월 '한국언론학회 학술대회'에서 위암 사상연구 전문가인 정대수 전 경남대교수가 발표한 논문입니다..꼼꼼히 잘 읽어 보시면, 이번 친일인명사전 1차 수록자 명단에 위암 할아버님이 포함된 게 얼마나 잘못 됐는가를 분명히 아실 겁니다.
정교수님,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좀 늦은감은 없지 않지만, 반론을 제기하는 글이 간간히 눈에 띠는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 집니다,,,당시 시대상황을 모르는 편협된 성향의 인사들의 만행을 누가 있어서 바로 잡아 놓을수 있을런지요,,,정대수교수님의 외침이 메아리로 그칠까봐 조바심이 납니다,,,부디 속시원한 결론이 있기를 두손모아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