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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8일
무박 산행일정으로 차안은 정적과 잠에 취에 있는 대원들의 숨 소리가 간흘적으로 들릴뿐이였다. 새벽이 가까워 오면서 산행준비를 하라는 조대장님의 알림이 들려온뒤 차는 댓재에 도착 하였다.렌턴의 불빛은 여름밤 개똥벌레 불빛처럼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산행에 앞서 단체 사진 찍는 구령소리는 하나 둘이 서이로 이어졌다.초여름 싱거러운 공기는 가슴속깊이 파고들었고 숲의 향기는 온몸을 감씨주었다.가야할 길 바라보았다. 두타산이였다. 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보드블록이 깔려 있었다. 두타(頭陀)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불교에서 쓰이는 용어인 두타는 세속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과 몸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의 모든 번뇌를 씻기 위한 수행길에 들어서며 보드블록이 깔린 길을 자나야한다는 눈앞의 일들이 마음 한구석 편치 않았다.렌턴의 불빛에 의지해 길을 나섰다.
햇대등에 도착하였다. 햇대등은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지낼때 산신이 강신하기 좋은 곳에 횟대를 세우고 산신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루는데 여기서 말하는 횟대란 대나무를 말하며 두개의 대나무를 잘라서 통째로 세우고 꼭대기에 오색천을 걸어두었는 것을 말하는데 횟대는 경상도와 강원도에서는 햇대로 변음된 사투리로 햇댓을 댓재와 합하여 햇댓이라 한 것으로 보이며 등(登)은 산줄기에서 전망하기 좋게 뛰어난 부분을 말하는 것이므로 세곳의 뜻을 합성하여 햇댓등이라 지명한 것이다.명주목이로 오르는 중간쯤이였을까 여명이 밝기 시작하였다.얼마후 렌턴을 벗고 어버이 날 밝은 아침을 맞이 하였다. 각자 어비이날 부모에게 효를 행하거나 자식들에게 효를 받기도 해야겠지만 대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대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참으로 고맙고 진심으로 자랑하고 싶다.
명주목이에 올라서니 찬란한 태양이 동해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그 장엄한 모습을 온대지에 비추고 있었다. 명주목이는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에 속하는 여러 마을중 하나이다. 명주목이(고개)의 원래 이름은 데바지령이며 그 뜻은 삼척지방을 넘나들던 고개로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통골제를 지나 두타산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위도와 고도차이가 있어서인지 얼레지 꽃이 한창 피기 시작하였다.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한다는 의미의 이름을 지닌 이 산은 그 형상도 부처가 누워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그런 탓일까 이 산은 삼척시의 영적인 뿌리가 되는 산이며 신앙의 대상이기도 한 산이다. 예로부터 가뭄이 심하면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두타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 한 가운데에는 묘지가 있고 옆으로는 표지석과 안내판이 있었다.두타산(135.2m)은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무릉계곡 남쪽으로 태백산군 서쪽으로 중봉산 12당골이 있다. 두타는 벗다 씻다 닦다의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를 음차한 것으로 부다는 출가수행자가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정각을 이루기위한 수행법으로 두타행을 강조했으며 수행자가 따라야할 열두가지 수행방법의 십이두타행(十二頭陀行)이다.
십이 두타행이란? 수일식법(受一食法) 하루 한 끼만 먹는다.
재아난약처(在阿蘭若處) 인가를 떠나 산이나 한적한 곳에서 거처한다.
상행걸식(常行乞食)항상 밥을 빌어 먹는다.
차제걸식(次第乞食)빈부를 가리지 않고 걸식한다.
절양식(節量食) 발우 안에 든것만으로 만족함
중후불식(中後不食)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않는다.
착페납의(着弊納衣) 헌옷을 빨아 기워 입는다.
단삼의(但三衣) 승가리 울다가리 안다희 이옷들 밖에 두지 않는다.
총간주(塚間住)무덤 곁에 있어며 무상관으로 편리케함
수하지(樹下止) 있는 곳에 애착을 여의기 위햐여 나무밑에 있는것
로지좌(露地坐) 습기가 없는 노지에 앉는다.
단좌불와(但坐不臥) 앉기만하고 눕지 않는것과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를 연단하는 불교의 수행법을 이른다.
두타 청옥 고적대를 걷는 길은 세상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멀리한 정진의 길 수행의 길이다. 이길에도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있었다.두타산 동쪽 두타산성은 신라 파사왕 23년(102년)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산성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이곳에서 임진왜란때 의병과 피난민들이 웅거하면서 이 지방으로 처들어온 왜군 5000명을 물리치면서 이 전투에서 왜군이 9활정도 죽었고 우리 의병과 민초의 피해도 5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피난간 일만명에 가까운 인원이 피를 흘리면서 싸워 이기기는 하였지만 두타산성 아래 무릉계곡은 피로 물들고 산아래 삼화동의 소까지 붉게 변했다고 한다. 두타산과 쉬움산 사이의 계곡이 피내골 산성 맞은편 골짜기가 피마른골 삼화동 소가 피소로 불리게 된 연유도 이 때문이다.이 산의 비극은 한국전쟁 때도 이 일대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수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어나간 곳이다.이곳에서 인민군 병참기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미 공군의 융단폭격을 받기도 했다.두타산성 정상 쉬움산에는 둥글게 패인 바위 위에 크고 작은 50개의 구멍이 있는 오십정(우물)을 비롯하여 많은 명승고적을 지니고 있고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옛 선인들은 이 산을 가리켜 금강산에 버금가는 관동의 군계일학이라고 칭송했다. 정상에 약 30m 떨어진 곳에 비석이 하나있다. 그 비석에는 두타산을 비롯하여 주위 산군들을 한문으로 내역을 기술하였는데 현대인들은 잘 알아 보지 못할것 같다. 정상석도 하나 더 있었다.
청옥산으로 발걸음 옮겨놓았다. 길옆으로는 야생화 흐드러지게 피여있고 철쭉은 이제 막 봉오리를 피울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박달령 지나 청옥산에 올랐다.청옥산(靑玉山1403,7m)은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타산 고적대와 함께 해동삼봉(海東三峰)으로 불리는 산이다.청옥이 발견 되었다고 하여 얻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청옥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보석이다.청옥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을 상징하는 일곱가지 보석중 하나이다.일곱 가지 보석은 금,은,수정,마노,적진주,호박,그리고 청옥이다.청옥은 곧 극락을 의미하므로 이 땅에 있는 극락의 세상이다.이 극락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바로 두타산이요 두타행이다.다시 말하면 두타산 지나며 부처의 가르침대로 마음과 몸을 닦은 수행자들이 들어가는 산이 바로 극락의 세계인 청옥산이었던 것이다.두타의 길은 청옥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청옥의 문은 두타의 길로 인해 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타와 청옥은 하나이다. 하나의 길이고 하나의 산이며 하나의 세계이다.
고적대로 향했다. 험준한 일곱 산등성이 일곱 별처럼 연이어 있다하여 붙은 연칠성령(連七星嶺)에 도착하였다.또한 란출령(亂出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험하고 멀어서 빠져 나가기 어렵다는 뜻이다.망군대(望君臺)라고도하는데 이는 조선조 광해군때 재상을 지낸 택상 이식(李植)이 정계에서 은퇴해 중봉산 단교암에 머물면서 이 봉우리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면서 나랏일을 걱정 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도성의 임금을 바라본다는 望君 또는 한양을 바라 본다는 망경이라는 의미를 붙였다고 한다.한양을 바라보았다는 망군대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있다.고적대 오르는 길은 가팔랏다.겹겹이 쌓인 바위길 오르며 산과 하나된 듯 했다. 나무뿌리와 밧줄도 나를 산과 하나로 묶고 있었다.이 험한길을 오르고 나니 고적대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눈 닿는곳 그 어디인지를 알수가 없었고 눈으로 알지못한곳은 가슴으로 느끼며 숨이 턱에 차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어내는것은 이 아름다운 세계를 보기위한 하나의 훈장처럼 달고 걸어왔던 것이다.잠시 휴식을 하고 다시 길을 이어져 갔다.
갈미봉으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잰 걸음을 옮겨 놓았다. 갈미봉(曷味峰1271m)은 노적가리 볏가리와 같이 꼭지가 우뚝한 형태를 표현하는 우리말이다.갈은 가리의 준말이다. 미는 꼬리 혹은 끝이라는 뜻이다. 무릉계곡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연이은 봉우리들의 끝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또한 한강의 지류인 송천이 이 곳에서 발원한다.그런가하면 정선 아리랑(강원유형문화제)의 발상지인 아우라지가 정선쪽으로 내려가면 있다.여기서 우리는 정심을 먹고 이기령으로 향했다.이기령(耳基嶺810m)은 이 고개가 귀의 형곡을 닮았다하여 이귀령이라 하였는데 이 고개 아래에는 이기동이라는 마을이있다.동해 곤로동과 정선 부수베리를 잇는 고개이다.이 고개는 등짐이나 봇짐을 지고 이 장터 저 장터를 돌며 떠도는 장돌뱅이들에게는 한많은 애환의 길이며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과거보러가는 선비들에게는 희망의 길이기도 했다.그리하여 이 길을 지나며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뜻으로 지나가면서 돌맹이를 하나 둘 씩 던져 놓은 돌탑이 여러개가 있고 돌탑 옆 얼마 안가서 호식총(虎食塚)이 하나있다.호식총은 호환을 당한 무덤인데 지금부터 오래전 이 곳에는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고한다.그리하여 호랑이게 물려 죽은 사람의 신원은 알지못하지만 그의 혼을 달래기위하여 이 무덤을 만들어 놓았던것으로 보인다.호환을 당한 무덤 앞에 잠시 고개숙여 위령을 한뒤 발길을 상월산으로 옮겼다.
이미 긴시간을 걸어서인지 체력이 점점 떨어져 걷기가 힘든 시간이 되었다.상월산 가는 길가엔 조릿대가 군락을 이루고 국수나무 무릅까지 자란 싸리나무 철쭉의 가지들이 발길을 더욱 더디게 한다.헬기장 지나니 얼레지며 야생화들이 피어 제 모습들을 자랑하고 있고 낙엽송은 하늘을 치솟아 있었다.
상월봉 정상에 오르니 표지석은 없고 펫말만 나무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원방제에서 가지고 갔던 약 복숭아 깡통을 서로 나누어 먹고 1022M봉으로 올라갔다 오르는 길옆에는 문푸레 나무가 꽃을 피워 한창 멋을 내고 있었다.다시 987봉으로 몸 낮추어 넘어서는데 멀리 바라다본 자병산은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고 산이 아니라 무슨 잿더미 같았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자병산이 없어졌다.자연경관과 생태적으로 풍부한 동식물의 서식지로 자랑하던 곳이다,더구나 자병산은 석회암 지대라서 다른산에서 볼 수 없는 생태학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던 산이다.생태계는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것이 사라지고 말았다.백두대간의 허리도 잘리고 아픈 상처만 드러내고 있었다.멀리서 들려오는석회석을 캐기위한 중장비 소리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려온다.
슬픔에 잠겨 오늘의 마지막 길 백봉령으로 내려가는 길가엔 철쭉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아픈 마음 위로라도 하듯......엣날 우리 선조들은 진달래 꽃과 철쭉꽃을 보고 그해 한해 농사가 잘되고 안 되고를 점 쳤다고 한다. 진달래나 철쭉의 꽃 망울이 크고 색갈이 아름다우면 농사가 풍년이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것은 일년농사중 봄의 기온에 따라 그해의 기온을 미리 알 수 있는 선인들의 생활 경험에서 비롯된것이다. 다행이 철쭉꽃은 색갈도 곱기도 하거니와 꽃망울도 아주 실하여 금년에는 풍년을 구가 할 것같다.아픈 마음을 철쭉꽃의 위로를 받으며 백봉령에 내려 섰다.
백봉령은 강릉 동해 정선 3개 시군 경계지역으로 42번 국도가 지나고 정선 강릉을 가르는 마루금에 아라랑의 고장 정선을 알리는 표지석있다.삼척지방에서 소금을 지고 넘나들던 소중한 길목으로서 정선엮음 아라리중에서 ,,,
우리댁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베팔이
헐께눈에 노가지나무 뻐덕지개 부끔떡
세쪼각을 세뿔에 바싹매달고 엽전 석냥
웃짐지고 강릉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봉령 구비 부디 잘 다녀 오세요,,,,,,중략
이와같이 이 험한길을 보내놓고 아무사고 없이 잘다녀오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는 한 많은 정선사람들의 애환의 길이다.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강릉 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정선에서는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소금으로 생활 하였다.그러므로 백복령은 소금이 넘어오는 중요한 길목이였다.택리지에는 백봉령(白鳳嶺)아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嶺)이라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희복현(希福峴)이라 표기되어 있다,이와같이 옛 문헌과는 달리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에는 백복령(白伏嶺)이라고 엎더릴 복자를 써고 있다. 이 이름은 일제에 의해 바뀐 이름이다.뜻을 풀이하면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고개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국립지리 정보원은 하루라도 빨리 바른 표기를 해야 할 것이며 이 곳의 이정표나 표지석도 고쳐 주기를 바란다.백복령 쉼터에서 정선의 토속 음식인 매밀 전병 부친게 매밀국수와 감자 옹심이 처음 맛보았고 막걸리 한잔에 긴시간 산행의 여독을 풀어본다.
긴 시간 앞뒤에서 힘써주신 두대장 고생이 많았고 함께한 모든분들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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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행기를 읽으며 다시금 그 길위에 서 봅니다. 긴산행이었지만 많은 가르침과 역사가 있는 그곳의 대간길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네요. 우직한 우보님 뒷모습...예쁜여우 웃음소리...대명씨 백도사랑..ㅎㅎ 덕분에 후미에서 많이많이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