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에 가기로 마음 먹은 순간, 내 머리 속의 타게팅은 딱 하나로 고정되어 있었다. 슈만 교향곡 전집, 톤할레 오케스트라, 데이빗 진만 지휘. 존 엘리엇 가디너의 원전연주, 무엇보다 3개의 호른 협주곡과 미완성 곡까지 포함된 그것이 탐이 났지만, 가격에 쫄아서 착한 진만 할배를 택했다.
서울 올라오기 전에 손톱을 아주 짧게 깎아서 비닐 뜯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얼마 전까진 껍질 까는 시간이 정말 싫어서 라이타 불로 슬찍 지지곤 했는데, 보는 사람 눈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나름 문명인이라...
껍질을 까고 헤드폰샾에 가서 160만원이나 하는, 가장 고가의 헤드폰을 씨디피에 물려서 들었다. 오메나...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음을 자각하고야 말았다.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내심 음질 테스트하는 냉철한 남자의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저... 얼리어답터에요 하는 뭐 그런 표정 같은 거. 1악장 끝나고는 옆에 있는 30만원짜리 헤드폰으로 교체해서 듣는데, 헤드폰에 억수장마가 쏟아진 줄 알았다. 밝게 빛나던 호른이 음습한 아마존에라도 다녀온 모양인가 보다. 얼마 전까지 젠하이저 HD555에 만족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사람 감각이라는 게 참 치사하다.
더 이상 들으면 살짝 초라해 질 거 같아 그만 나와버리고는 박종호의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답다>>를 찾아 나섰다. 최근에 읽은 칼 쇼르스케의 <<비엔나 천재들의 붉은 노을>> (세기말 비엔나)와 윌리엄 존스턴의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어떻게 쓰여졌는지 무척 궁금했다. 문체와 같은 자잘한 것이나 어떻게 책을 기획했는지와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쉽게 쓰여진 문체엔 꼰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짝 잘난 척 하는 차도남 이미지가 같은 게 있었다. 역시, 공부 잘하는 남자의 글은 재미없다. 조국 이후 참 오랜만에 만나는 살짝 재수없는 느낌.
10분만에 이 책을 사야 하는지 벌써 답을 찾아 버렸다. '저 김영사에서 나온 신간 책 하나 샀어요~' 이렇게 살짝 티내려고 했는데, 이걸 돈주고 사서 읽을 일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다. 확신을 가지게 해준 건 저자의 태도였다. 이거 분명 풍월당에서 예전에 읽었던 것들이었다. 그걸 그대로 책에 옮겨 적었다. 역시의 역시였다. 가정을 하나 하면 이런 거다. 만약 우쌤이 블로그에 올리신 걸 추려서 책으로 묶어서 판다면 나는 그 책을 살까? 물론 그런 걸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이런 가정을 하는 거다. 결론은 '팬심 때문에 사긴 할 텐데, 실망할 것임엔 분명하다' 이렇게 나와 버렸다. 팬도 아닌 박종호의 그것이 나에게 욕구를 충족시켜줄리 만무했다. <<클래식 시대를 듣다>>의 저자인 정윤수도 이런 비슷한 짓을 한 걸로 알고 있다. 그 책에 있는 내용이 토시 하나 바뀌지 않고 다른 책에 그대로 옮겨 넣었다고 한다. 이런 양반들 땜시롱 살짝 고맙기도 하다. '예상 가능한 캐릭터였군요. 덕분에 제가 살짝 발 디딜 틈 같은 게 있겠어요.' 이렇게 생각하고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2>> 옆에 있었던 그 자리로 고이 보내 드렸다.
지하철에 몸을 실고는 가방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하이데거의 <<횔덜린 시의 해명>>을 꺼내들었다. 뭔가 더 써서 끝내야 될 거 같은데, 귀찮기도 하고, 시가 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한가 싶기도 해서 이만 줄어야 겠다.
첫댓글 오래간만에 오신 서울이 요모양이라 살짝 걱정했는데 ^^;;; 교보에 가셨군요 거기 작년 추석에 침수 됐었는데 이번 비에는 괜찮던가요?
예 침수되진 않았더라구요 >_<
"역시, 공부 잘하는 남자의 글은 재미없다." ---> 공감....!
누구처럼 말 안듣는 학생이셨군요? ㅡ.ㅡ
저에겐 생소한 분야의 책들..알게 해주셔서 감사^^...근데 휠덜린시의 해명..쫌 비싸군요..책 가격이 만원 넘어가는 건 기본이고 언제부컨가 이만원 넘어가는 것도 흔한 일이 된듯..ㅜㅜ..이번 서울의 여름은..<비>만 기억에 남으실듯..오늘도 비가 계속 오는군요....
비 이제 그쳤네요. >_< 비가 오든 안오든 서울여름은 정내미가 안가요 ㅠㅠㅠ
전 언제부턴가 우석훈 선생 책은 다 한 권으로 읽힌다는...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