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8(연중29주) / 예레31:7-9, 히브7:23-28, 마르10:46-52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안병욱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이는 동심으로 돌아가고, 어른은 양심으로 돌아가고, 공직자는 공심으로 돌아가고, 신자는 신심으로 돌아가자”
저는 이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느껴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답다”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자신의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일러 “00 답다”라는 말을 합니다. 최선을 다해 제자를 가르치고 사랑하는 교사는 교육자답습니다.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는 공무원은 공직자 답습니다.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께 찾아와 자신이 예수님의 왼편과 오른편에 앉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권투선수에게 “자네 희망이 뭔가?” 하고 물으면 첫마디가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주님의 왼편과 오른 편에 앉는 것입니다. 저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꿈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이런 꿈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바울로의 말씀처럼 우리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꿈만 가진다고 될까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주님은 왼편과 오른편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왜 “잔”이란 말을 쓰셨을까요? 여기서 잔이란 물이 아니라 술잔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주는 이 술을 마실 수 있겠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술과 물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물은 아무리 마셔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술은 아닙니다. 한 잔만 마셔도 즉각 변화가 옵니다. 이게 술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신 이 질문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지를 물으신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을 버리고 주님을 본받아 살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는 변화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가야합니다.
주님처럼 겸손하게, 주님처럼 온유하게, 주님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덧입어야 합니다. 마귀 쫓아내시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셨던 것처럼,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생명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도 이런 능력으로 덧입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의 길은 바로 변화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여, 주여 한다고 해도, 온갖 환상을 보고, 방언을 하고, 기쁨에 넘쳐 산다할지라도 주님처럼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길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끝없이 변화해 가는 여정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의 나도 분명히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변화시킬 이 잔, 우리가 마셔야할 이 잔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에 사로잡혀 사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든 주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때문에 성서는 예수님을 말씀 그 자체라고 했습니다. 이게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하신 말씀은 “오직 말씀을 따라 살 수 있겠느냐?” 라는 물음이십니다. 바울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우리 안에서 살아서 작용해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예리한 칼과 같아서 우리의 마음을 쪼개 그릇된 마음을 바꾸어 줄뿐만 아니라 악령과 대적할 무기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직 말씀 앞에 굳게 서라고 가르쳤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6절 말씀을 보면 성서는 “모두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데 유익한 책”(2디모3:16)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변화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서가 들려주는 음성을 바로 듣고 그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단련시켜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따라 변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변화되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실시하고 있는 피정에 함께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기도의 잔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하느님의 능력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능력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강한 능력을 가지셨습니까? 사도들을 보십시오. 주님과 같은 강한 능력으로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에서 오는 능력입니다.
주님이 변화 산에서 내려오실 때의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악령 들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와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고쳐 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주님에게 달려가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자리에서 마귀를 꾸짖어 쫓아내시고 마귀 들린 아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 제자들이 “왜 우리들은 그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쫓아 낼 수 없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능력에 능력을 더하게 합니다.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도 기도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물으실 때는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밤을 새워가며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실 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시기도 했지만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주님의 삶 그 자체이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심으로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능력을 함께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잔을 마셔야합니다.
셋째, 십자가의 잔, 보혈의 잔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죽이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셔야할 잔은 바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잔입니다.
십자가는 남을 죽이는 형틀이었습니다. 남을 죽이는 형틀이 되었을 때, 그것은 저주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틀이 이제는 남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내 자신을 죽이는 형틀이 되었습니다. 내가 죽은 형틀이 되었을 때, 저주는 축복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보혈의 잔을 마시라는 말은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욥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건강까지 다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을 믿는 그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 믿음을 인정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디서 욥이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됩니까? 어디서 그 아픔이 치유되고 회복됩니까? 자신을 죽였을 때입니다. 그토록 완강하게 자신의 의를 자랑하던 욥이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은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으며 그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다투었습니다. 어디에서 문제가 있었습니까? 바로 자신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남이 아니라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을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가 마셔야할 잔은 실천입니다.
주님은 이 잔을 보라고 하시지 않고, 마실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보는 것과 마시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실천의 차이입니다. 잔은 볼 때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실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처럼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성체와 잔을 높이 들고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노래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오늘 이 성찬례를 통해 들려주신 그 말씀을 실행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을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삶을 통해 드러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말씀을 듣고도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더 높은가를 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듣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삶으로 가져가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으면 무엇하겠습니까? 그 말씀을 지금 내 삶의 현장에서 살아내지 못한다면 참된 믿음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결국 삶으로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느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잔을 마시고,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셨다 해서 영광의 자리에 앉을 특권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는 하느님만이 주십니다.
사제는 성체를 모든 성도들에게 보여주면서 “우리는 이 빵을 나눔으로 그리스도의 성체를 나눕니다.” 라고 선언하며 빵을 반으로 자릅니다. 이 순간 성체는 내 양식됩니다.
사제는 곧바로 그 성체의 일부를 떼어서 잔에 넣습니다. 사제가 빵을 떼어 포도주에 넣는 행위는 정말 중요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살과 피를 나누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쪼개진 모습은 모두에게 보여주며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왜, 사제는 쪼갠 떡을 포도주에 넣을까요? 사제가 이렇게 포도주에 작게 쪼갠 성체를 넣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내 살과 피를 쪼갠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자랑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로의 고백처럼 우리는 빚쟁이입니다. 그러니 내 모든 것을 드린다 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을 군자라 했습니다. 이처럼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이야 말로 참된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잔을 마셔라!” 이 잔을 통해 주신 의미를 되새기는 이 성찬이 되야합니다.
“주님, 이제 말씀의 잔, 기도의 잔, 보혈의 잔을 마심으로 주님의 닮아 살아가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잔으로 내가 변하고, 그 변화된 힘으로 내 가정을 변화시키고, 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가겠습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신자다운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모두가 이 영광을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