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학자 왈 "이순신, 세계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인물"
반만년이라는 긴 시간을 크고 작은 위기를 넘기며 살아온 대한민국은
전 세계 그 어느 역사책에 기록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위인들이 차고 넘칩니다.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대왕부터 13척의 전함으로 333척의 일본 전함을 전멸시킨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일제 강점기 시절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까지
그 수를 헤아리자면 셀 수 없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전 세계 그 어느 역사책에서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는 경우는 없습니다.
특히 오늘 영상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은 지구 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해군 제독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나
이를 자세히 아는 외국인은 없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에 대해서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의 세계적인 역사학자 '리처드 불리엣' 교수가 명쾌한 답변을 내놓습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바퀴, 세계를 굴리다', '사육과 육식' 등으로 잘 알려진 리처드 불리엣 교수는
1940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역사학자이자 작가입니다.
1972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193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다작을 남긴 그는 깊은 지식과 통찰력으로
역사를 짚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역사학자인데요.
1976년부터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역사 강의를 맡은 그는 2011년 가을 학기에는 '1,500년 이후의 세계 역사'라는
과목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섯 번째 수업에서 '16세기의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라는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죠.
그런데 이 강의에서 그는 미국과 유럽의 역사에 비해 한국의 역사는 다른 부분이 있다고 설명함에 있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는 애국주의적 영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과장과 찬양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단지 과장을 조금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며 과장이 지나친 단계까지 진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별 볼 일 없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추앙하고 찬양해 왔지만
"예외적으로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 이순신 장군을 찬양해 본 적은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제껏 193권의 책을 써온 만큼 수없이 많은 서적과 자료들을 직접 확인했을 텐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찬양,
아니 언급된 책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수업을 준비하면서 그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꽤 많은 조사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
23번의 전투를 경험한 장군이면서, 그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장군입니다.
적군을 상대로 그는 13척의 배를 가지고 전투에 승리하기도 했으며 반대로 일본은 333척의 배를 가지고 그를 상대했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을 때 일본 제독은 이순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이었다.
가령 "넬슨 제독에 확실히 필적할 만하다."라고 공언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불리엣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순신 장군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세계사에서 그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죠...
왜냐하면 다른 국가들은 영광과 성취에 대한 과장으로 혜택을 받았지만,
한국과 한국의 역사를 설명함에 있어 과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국가들이 작은 사건을 중요한 사건으로 과장해 평범한 인물을 일반 상식에 부합하는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만
한국은 그러지 않았습니다."라고 강조했죠.
즉, 이순신 장군은 그 능력과 성과로 보자면 세계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한국이 다른 국가들처럼 과장하지 못했고 과장과 찬양을 더해 일반상식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중요한 인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국이 미국이나 영국처럼 주도면밀하게 이러한 과장과 찬양 작업을 진행했다면
아마 이순신 장군은 지금쯤 칭기즈 칸이나 나폴레옹,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모든 역사책에 등장하는 당당한 인물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이게 아쉬워야 할 일인지, 안타까워야 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불리엣 교수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에 대해 과장 섞인 찬양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의 가치를 아는 이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직접적으로 그를 맞서 싸워야 했던 일본인들이 특히 그러하죠.
이순신 장군은 세계 역사상 전례 없는 승리를 거둔 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명량해전에서 13척의 전함으로 일본 선박 333척을 무찌른 사건은 영원히 그 누구도 깨지 못할 명승부일 텐데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장수는 이순신이다.
영국 넬슨 제독의 명성이 높다지만 인격과 천재성에서 그에게 필적할 수는 없다."
이 말은일본이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꼽는 '도고 헤이아치로'의 러일전쟁 승리를 도운 최대 공로자이자,
'제국국방사론', '절세의 명해장 이순신' 등을 남긴 '사토 데쓰타로'가 자신의 저서에서 직접 쓴 글입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두고, 유럽 역사에서 그렇게 떠받드는 영국의 넬슨 제독을 넘는 세계 최고의 명장은
단연 이순신 장군으로 꼽습니다.
사실 사토 데쓰타로는 일본 내 군사 교육가 겸 사상가였습니다.
해군 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자신이 쓴 '제국국방사론'을 교재로 사용했는데 자신의 책에
"동양에서는 한국 장수 이순신을, 서양에서는 영국 장수 넬슨을 들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조선에서 태어나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지만 실로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고 썼습니다.
그에 앞서 해군 출신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는 '제국해군사론'과 '해상권력사강의'에서 이순신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순신은 일본군이 반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게 한 장수로 잘 싸울 뿐 아니라 만사에 장군다운 기량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를 안겼음에도 일본 내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우러르는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점입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그의 인격과 능력을 높이 산 일본에서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당시 일본 국민들이 배워야 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상징이자, 군인이 갖춰야 할 만사의 장군다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역사학자 이종각 교수는 자신의 저서 '일본인과 이순신'에서
"한국인 중 일본 역사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는 건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며,
임진왜란과 관련해 장군과 거북선 사진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적고 있는데요.
그의 이름이 일본에서 드높아진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100년 뒤
1695년 '징비록'의 일본어판 '조선 징비록'이 출간되면서 시작됩니다.
조선의 책을 훔쳐다 일본어로 번역해 내놓은 이 책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순신의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이후로 '조선군기대전' 등의 후속 작품이 큰 인기를 얻었죠.
현재 일본에서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일본의 국민 작가로 통하는
'시바 료타로'의 역할이 상당히 큽니다.
그는 '올빼미의 성', '료마가 간다' 등 숱한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일본인 사이에서는
"역사 교과서 대신 시바 료타로의 소설로 근현대사를 배운다."고 할 정도로 상당한 위상을 가진 인물인데요.
그의 대표작 중 '언덕 위의 구름'은 러일전쟁 시대를 무대로 하는데 이 책에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실존했던 것 자체로 기적이다.
"라거나 "영국 넬슨 제독 이전 유일한 명장"으로 극찬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됐습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사토 데쓰타로' 외에도 일본 해군들 사이에는
이순신을 경외하는 현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은 많은 자료를 통해 확인됩니다.
대표적으로 1977년 10월 발행된 일본의 '아시아 코론'에는 자위대 전역 후 문필가로 활동하던
'가와다'라는 인물의 일본 해군들이 연중행사로 통영의 '충렬사'를 찾아 이순신 장군에게 참배했다는 내용이 소개됐습니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 혼령에 빌어 승리를 빌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미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를 맛본 일본이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 현재까지도 일본인 후손들이
매년 한국을 찾아 감사 인사를 표하기도 합니다.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전남 진도의 왜덕산 일대에서는 일본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전남 진도를 찾는 이유는 이곳에 명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왜덕산이라는 이름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1597년, 울둘목에 벌어진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이끌던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포함한
왜구 4,000여 명을 전멸시켰습니다.
이때 수장당한 왜군들의 시신이 파도에 떠밀려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 바닷가로 쓸려 왔죠.
당시 내동리에 살던 진도 사람들은 100구가 넘는 시신을 거두어 양지바른 야산에 묻어 주었는데 사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선인들의 왜구에 대한 분노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조선인들에게 왜군의 시신은 '단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불쌍한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시신을 거둬 시신의 머리는 자신들의 고향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정성껏 묻어주었죠.
그리고 그 야산을 '왜인들에게 덕을 풀어주었다'는 의미로 왜덕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 왜덕산의 존재를 알게 된 '히구마 다케요시' 교수는 진도를 방문한 후 본격적으로
일본에 이 산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당시 바다에 빠져 죽은 왜구의 고향 에이메현을 찾아가 이 사실을 전달했는데 이 말을 들은 일본인들이
깜짝 놀랐다고 하죠. 이미 자신들의 조상이 명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것은 알고 있지만,
시신을 수습해 묘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으니까요.
이에 그들은 서둘러 진도에 있는 왜덕산을 방문하기로 했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NHK 방송도 취재를 왔습니다.
그리고 2006년 8월 15일, 409년 만에 왜덕산에서 추모제가 열렸고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했습니다.
이날 추모식 덕분에 국내 언론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 왜덕산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는데,
이를 보면 한국인이 가진 근본적인 생명 존중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기념하듯 만든 '코 무덤'과는 대조를 이루죠.
여러분들도 진도를 여행할 기회가 되면 한 번쯤 왜덕산을 바라보며 우리 한국인들의 너그러움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