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야구영웅, 궈타이위안은 누구인가
타이페이=박동희 기자 / 200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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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이징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에 출전하는 대만대표팀 궈타이위안 감독.
사진 제공=CPBL | |
| 궈타이위안(45).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아시아지역 예선에 출전하는 대만대표팀 감독이다. 골수 야구팬들도 ‘궈타이위안’이란 이름은 낯설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우리식대로 읽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곽태원. 1980년대 국기 하강식을 기억하고 1990년대 일본프로야구에 관심이 있던 팬이라면 이즈음에서 무릎을 치며 반색할 것이다. 그 만큼 한국팬들의 귀에 익은 대만야구선수도 없다.
곽태원은 대만의 야구영웅이다. 한국으로 치면 선동열(44, 삼성 감독)이다.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났는지 모른다. 곽태원은 아마추어 시절 ‘오리엔트 특급’이라 불리며 세계야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뒤에는 통산 117승을 거두며 역대 최고의 외국인 투수로 우뚝 섰다. 그러나 곽태원이 대만의 야구영웅으로 칭송 받는 까닭은 화려한 현역 시절 때문이 아니다. 곽태원은 은퇴한 뒤가 더 아름다웠다. 대만야구발전을 위해 열성적으로 사심 없이 일했다.
유격수로 시작한 야구인생
곽태원은 1962년 3월 20일 대만 타이난에서 태어났다. 타이난은 대만 남부에 자리 잡은 도시로 1624년부터 1844년까지 타이페이 이전에 220년 동안 수도였다. 타이페이, 타이중, 가우슝과 함께 대만 4대 도시로 꼽히는 타이난의 자랑은 야구다. 곽태원을 비롯해 장성슝(일본이름 사카모토 요시키), 두푸밍, 린후아웨이(전 대만대표팀 감독) 등 지난날의 스타들은 물론 현역인 왕젠민(뉴욕 양키스)이 타이난 출신이다.
곽태원이 처음 야구를 시작한 건 진학초등학교 때였다. 청소년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던 셋째 형 궈이황의 영향이 컸다. 영화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이 역시 유격수였던 형의 영향을 받았다. 곽태원은 1979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며 조금씩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대표팀 코치가 형 궈이황이었고 포수가 훙이충(라뉴 감독)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투수로 뛰었다. 그해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단번에 전국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1981년 고교 졸업과 함께 합작금고에 입단했다. 프로야구가 없던 대만에서 합작금고는 최강의 실업팀이었다. 현재 대만야구의 최고스타 첸진펑, 린즈셩(이상 라뉴), 가오즈강(통이) 등이 합작금고 출신이다.
합작금고에서 에이스로 1년을 뛴 뒤 이듬해인 1982년 육군에 입대했다. 그해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군인 신분으로 출전했다. 곽태원은 이 대회에 출전할 대만대표팀을 뽑는 대만야구협회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대만은 4위에 그쳤지만 곽태원은 국제무대에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렸다. 이때까지 곽태원은 완벽한 투수는 아니었다. 당시 한국대표팀의 중심타자였던 삼성 장효조 스카우트는 “대만 투수 가운데 강속구 투수가 있다고 들었지만 타석에서 느끼는 체감속도는 다른 투수들과 거의 비슷했다”며 “곽태원에게 깊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잘못 알려진 사실, 곽태원과 선동열의 투수전
곽태원의 진가가 빛난 건 1984년 LA올림픽이었다. 야구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돼 8개국이 참가한 LA올림픽에서 대만은 내심 우승을 바랐다. 곽태원, 장성슝 원투펀치가 제대로 활약한다면 우승후보로 꼽히는 미국, 일본, 한국을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곽태원은 7월 31일 열린 예선 첫날 미국전에 등판했다. 마크 맥과이어, 배리 라킨, 윌 클라크 등이 버틴 미국 타선을 막아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최고시속 158km의 강속구를 앞세워 8회까지 무실점으로 상대 타선을 틀어막았다. 1-0 대만의 승리로 끝나려는 순간 9회 양칭롱의 실책에 당황한 곽태원이 클라크에게 역전 2점 홈런을 내주며 허망하게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패전투수가 됐지만 곽태원이 기록한 시속 158km의 강속구는 당시 아시아선수가 기록한 최고 구속으로 세계 야구계의 관심을 끌었다.
결승 진출 여부가 걸린 8월 6일 일본전에서도 곽태원은 최고의 피칭을 선보였다. 5회 1사까지 사회인야구와 대학야구 선수들로 짜인 일본 타선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아라이 유키오에게 3루타를 맞고 1실점한 뒤 강판될 때까지 곽태원은 매회 최고 시속 157km의 강속구를 뿌렸다. 땅에 닿을 듯 낮게 깔리는 직구는 단순히 빠른 공이 아니었다. 대만은 일본에 1-2로 져 다음날 벌어지는 3, 4위전에서 한국과 동메달을 다퉜다.
여기서 잘못 알려진 사실 하나를 바로잡는다. 그동안 야구팬들은 곽태원하면 LA올림픽 3, 4위전에서 선동열과 벌인 피 말리는 투수전을 떠올렸다. 연장 12회까지 곽태원과 선동열이 완투하다가 선동열이 타구에 맞아 부상으로 강판되고 곽태원은 13회까지 완투해 결국 13회 대만이 끝내기 홈런을 때려 동메달을 차지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경기에 곽태원은 등판하지 않았다. 선동열도 연장 12회까지 완투하며 투혼을 발휘한 게 아니었다. 당시 한국전에 등판한 대만 선발투수는 장성슝이었다. 장성슝은 10½이닝 동안 한국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은 뒤 두푸밍에게 공을 넘겼다. 한국 역시 선발투수는 선동열이 아닌 오명록(동아대)이었다. 선동열은 한희민(성균관대)에 이어 3번째 투수로 등판했다.
곽태원과 선동열은 전해인 1983년 서울에서 열린 제12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맞붙은 적이 있다. 이 경기 역시 팽팽한 투수전이었다. 이때는 한국이 2-1로 대만을 이겼다. 한국 선발투수는 선동열이었다. 그러나 이때 역시 대만의 선발투수는 장성슝이었고 곽태원은 구원투수로 나왔다.
오리엔트 특급
LA올림픽 야구 금메달은 일본이 차지했지만 주인공은 곽태원이었다. 대회 기간 내내 ‘오리엔트 특급’이란 찬사를 들으며 미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의 영입 제의를 받았다.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입 쟁탈전은 치열했다.
당시로는 거액인 계약금 8천만 엔을 제시한 세이부가 곽태원의 영입에 성공했다. 요미우리신문이 대만의 정치문제를 건드린 것도 악재였다. 요미우리는 대신 메이저리그에서 K.스톡을 데려왔다. 이때만 해도 요미우리의 오 사다하루 감독은 곽태원이 세이부의 전성기를 이끌 투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톡은 2년 동안 8승10패 방어율 4.47을 기록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곽태원은 데뷔 첫해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1985년 6월 4일 니혼햄전에 선발투수로 나와 볼넷과 몸에 맞는 공 1개씩만 내주고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시즌 성적은 9승5패 방어율 2.52였다. 9승 가운데 3승은 완봉승이었다. 그해 리그 최다 완봉승 기록이었다. 곽태원의 호투에 힘입어 세이부는 2위와 15경기 차로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시리즈에서도 우승컵을 안았다.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알리는 전주곡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6년에는 특유의 강속구를 앞세워 마무리로 전향해 5승 16세이브 방어율 2.91을 기록했다. 다음해는 다시 선발로 돌아서 13승4패 방어율 3.02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 요미우리와 맞붙은 일본시리즈 첫 경기에서도 1실점 완투승을 거둬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데 한몫을 했다.
1991년에는 15승6패 1세이브 방어율 2.59의 뛰어난 성적으로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정규시즌 MVP와 베스트나인, 골든글로브 등을 휩쓸었다. 이해 184⅓이닝을 던지는 동안 볼넷을 30개만 내주는 믿기 어려운 제구력을 보였다.
1995년에도 8승6패 방어율 2.54로 건재를 과시한 곽태원은 다음해 외국인선수로는 처음으로 FA 자격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해 6패만을 기록하며 좌절한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FA는 명예롭지 못한 길이었다. 곽태원은 일본, 대만 야구팬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1997년 은퇴를 선언했다.
곽태원이 입단한 1985년부터 1994년까지 10년 동안 세이부는 리그 우승 9번, 일본시리즈 우승 6번의 대기록을 세웠다. 도이 마사아치 전 세이부 감독은 “아키야마 고지, 기요하라 가즈히로, 데스트라데의 이른바 ‘AKD’포가 아무리 잘 쳤어도 곽태원의 오른팔보다는 못했다”며 “강속구만 따진다면 일본야구 사상 가장 위력적인 공”이라고 극찬했다.
곽태원은 부드러운 투구폼으로 유명했다. 언뜻 보면 유약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투구폼에서 시속 150km대의 강속구와 140km대의 슬라이더를 최대한 낮게 던졌다. 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는 “사와무라 에이지가 살아있다면 꼭 저렇게 던졌을 것”이라고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두 투수의 투구폼은 정말 비슷했다.
날카로운 눈빛도 화제였다. 한 일본 기자는 “곽태원의 눈빛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구장 밖에서는 팬들을 늘 따뜻하게 대해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팬이 많다.
1999년 세이부에 입단한 고졸 괴물 투수가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투수의 등번호 ‘18’번을 받아 대단히 영광”이라고 말했다. 괴물 투수는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였다. 물론 원래 등번호의 주인공은 곽태원이었다.
다시 대만으로
곽태원은 세이부에서 13년 동안 뛰며 통산 272경기에 출전해 117승68패 18세이브 방어율 3.16을 남겼다. 역대 외국인 투수 가운데 통산 100승을 넘은 투수는 궈위엔지(주니치, 일본이름 가쿠 겐지), J.스탠카(다이에)를 비롯한 4명뿐이다.
2004년 5월 일본 야구주간지 <슈칸베이스볼>이 일본프로야구 현역 선수와 야구 관계자 115명을 대상으로 벌인 역대 최고의 외국인 투수를 묻는 설문에서 곽태원은 35표를 얻어 2위 궈위엔지(12표)를 큰 차이로 누르고 1위에 올랐다.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마무리로 뛰었던 선동열은 6표를 얻어 공동 3위였다.
1997년 은퇴와 함께 대만으로 돌아간 곽태원은 쏟아지는 감독 제의를 뿌리친 채 대만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세이부 시절 원투펀치였던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불러 선수 겸 코치로 뛰게 해 대만프로야구에 기술을 전하도록 했다. 린잉지에(라쿠텐), 린언위(지바 롯데) 등 후배 선수들이 일본프로야구 등 해외로 나갈 때는 뒤를 돌봤다. 유소년 야구에도 관심을 쏟아 각급 학교를 돌아다니며 야구강습회를 열었다.
2004년 고사하던 감독직을 수락했다. 통이, 슝디 등 부자구단이 영입의사를 밝혔지만 CPBL(중화직업봉구연맹) 6개 구단 가운데 가장 재정이 나쁜 성타이 코브라스를 선택했다. 2005년까지 성타이 감독을 맡은 뒤 이내 평범한 야구인으로 돌아왔다. 그해 터진 승부조작 사건에 성타이 2군 코치가 개입된 것이 사퇴를 결심한 이유였다.
곽태원은 지난해 대만대표팀 감독으로 뽑혔다. 대만의 유력지 <핀궈리바오> 유셩류 기자는 감독 선임 배경에 대해 “웬만한 지도자들이 한 번씩 대표팀 감독을 맡아 이제 그의 차례가 온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곽태원은 일본프로야구에서 명성이 높아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을 불러 오는 데 적격자”라고 말했다. 대표팀 감독 외에 곽태원이 하는 일이 있다. 세이부에서 뛰다 지난해 방출된 ‘게으른 천재’ 장즈자를 돕는 일이다. 곽태원은 장즈자를 조련해 좋았던 때를 생각나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만에서 만난 야구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왕젠민이 나오기 전까지 곽태원은 대만야구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고. 이는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온당하다. “왕젠민이 출현한 뒤 곽태원은 대만야구의 전설이 됐다”고.
SPORTS2.0 제 73호(발행일 10월 15일) 기사 |
(곽 태원 동영상 )
http://jp.youtube.com/watch?v=atnlgmOL-9M
(1987년 일본 시리즈 역투) |
첫댓글 종철님 ) 후루타랑 노모가 뱃터리로 출전한 올림픽은 서울 올림픽 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