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상 글 >
또 다시 당신 앞에...
글 : 이 클라우디아(해인) 수녀
<성 베네딕도 수녀회>
해마다 이맘 때쯤 당신께 바치는 나의 기도가
그리 놀랍고 새로운 것이 아님을
슬퍼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얼음도 풀리는 봄의 강변에서
당신께 드리는 나의 편지가
또다시 부끄러운 죄의 고백서임을
슬퍼하지 않게 하소서.
살아있는 거울 앞에 서듯 당신 앞에 서면
얼룩진 얼굴의 내가 보입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나의 말도
어느새 낡은 구두 뒤축처럼 닳고 닳아
자꾸 되풀이할 염치도 없지만,
아직도 이 말 없이는 당신께 나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소서, 이 죄인...!
여전히 불평과 편견이 심했고, 쉽게 남을 속단하고 미워했음을
여전히 참을성 없이 행동했고, 절제 없이 살았음을
여전히 말만 앞세운 이상론자였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였음을 용서하소서, 주여...!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하셨습니다.
이 사십일 만이라도 거울 속의 나를 깊이 성찰하며,
깨어 사는 수련생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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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기적은 우리 가운데에...
글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신부>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 이 세대는 악하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가 111,29)
위의 복음 말씀으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배경에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는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들을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느낄 수 있겠습니다.
“ 이 세대가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의 우리 시대나 똑같이 우리 사람들의 마음은 그 어떤 표징, 기적, 특별한 것을 보여주거나 나타내 줌 등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예컨대, 루르드나 파티마의 기적, 혹은 작디작은 그 어떠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현상들도... 그 곳에, 그 현상들에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열광하고 모여들곤 합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기적들은, 하느님의 현존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데......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
우리 자신들이 부르심을 입고 살아가는 것,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부당함과 송구함에도 우리가 한 소명인으로 살아가는 것,
세상과 그 안에 속한 우리 사람들의 어처구니없음에도 우리 교회는 존재하고 살아있는 것,
다른 여느 본당이나 공동체처럼 참으로 다양한 우리 자신들이 여기에 함께 모여 살아갈 수 있는 것,
그 모두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 여기에서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들려오고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 지극한 영향을 주는 것,
성체와 성혈이 메마르고 황폐하기도 하는 우리의 부당한 가슴과 영혼을 적시고 새롭게 하는 것,
그 모두는 ‘오늘 여기에서의 기적’ 이라고 이아침에 묵상하고 싶습니다.
이아침의 거룩한 전례와 지금 우리들의 거룩한 모임도 분명코 지금 여기에서의 기적임을 마음 깊이 생각합니다.
오늘의 첫 번째 독서에서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할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는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요나 3, 10)
날마다 순간마다 당신의 말씀과 성체, 교회와 우리들의 모임들안에서 당신의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 부르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오늘도 이아침의 말씀과 성찬의 제사를 봉헌하고 싶습니다.
주 하느님, 주님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시편 51장)
오늘 축일로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1495-1550)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의 기도 중에 들었다고 한다.
“ 요한아! 네가 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하던 일은
바로 나를 위해 해주던 일이란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면서 만지던 손은 나의 손이었고,
네가 감싸주고 옷을 입혀주던 몸은 나의 몸이었으며,
네가 손수 씻어주고 닦아주던 그들의 더럽고 헤어진 발은
곧 나의 발 이었단다...”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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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례 묵상 >
예수님께서 광야로 간 까닭은 ?
글 : 탁 베드로 (은수)
교회에서 40은 의미 있는 숫자다.
노아의 홍수 때 40일간 땅이 물에 잠겼고 모세는 40일간 시나이산에서 머물렀다.
공생활 전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셨고, 부활 후에는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교회에서 40일은 침묵과 뉘우침, 그리고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특별한 기간이다.
속세에서도 40 이란 숫자는 특별하다.
나이 40을 불혹이라 하여 비로소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인생의 중심을 잡는 나이라 여겼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가는 인생이 어디 있던가.
매번 갈등과 불안 속에 흔들리며 조금씩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예수도 40일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다.
메마른 광야에서 홀로 악마와 마주해 단호히 유혹을 물리치셨다.
그리고는 인류구원의 사업에 곧장 나섰다.
광야는 죽음의 땅이지만 예수께서 유혹을 이겨내신 광야는 구원과 부활의 길목이 된 셈이다.
광야는 이스라엘에만 있지 않다.
물질과 권력의 유혹은 늘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고 흔들리게 한다.
속도와 결과만을 중시하는 바쁜 세상에서 유혹을 유혹으로 인식하지 못 할 때도 많다.
부정과 불륜으로 가득 찬 이른바 막장 드라마, 몸과 마음을 해치는 과도한 술자리, 필요보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한 불필요한 소비, 지옥 같은 입시와 과정을 무시한 경쟁 등으로 우리의 일상은 점차 광야가 돼 가고 있다.
옛날 인디언은 말을 타고 달리다 잠시 멈춰 서서 달려온 길을 되돌아봤다고 한다.
급히 오느라 자기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 했을까봐 따라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지금이 그 때이다.
일상의 분주함과 번잡함을 내려놓고 침묵과 절제 속에 주님이 주신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때다.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일상 속에 쌓아놓은 욕심과 탐욕의 더미를 치워야 할 때다.
부활(復活)의 한자 부(復)는 ‘회복한다’, ‘돌아간다’ 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부활의 영광에 함께하기 위해선 하느님이 지어주신 사랑스런 자녀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인류구원을 위해 고통과 침묵의 광야로 외로이 걸어가신 예수 발걸음의 의미부터 되새겨야 할 것이다.
< 가톨릭 부산 주보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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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1주일
2020. 3. 1
마태오 4, 1~11
♠ 복음 공부 : 예수님의 광야 체험
☞ 들어가면서 :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이끄심으로 곧 바로 광야로 나가셨고, 하느님 안에 완전히 몰입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로서 구원사업의 청사진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에 유혹이 찾아든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하며, 마태오나 루카복음에서는 악마에게 받으셨다고 한다. 사탄과 악마는 같은 존재다. 사탄은 히브리어이고, 악마는 devil인 디아 블로읏스 그리스어로 하느님과 인간을 끊임없이 갈라놓으려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 신, 마귀는 이들의 심부름꾼으로 세상을 끊임없이 지배하고 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세 차례에 걸쳐 시험하나 실패하고 이제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천사들이 시중을 들게 된다.
* 1~11절 : 첫 번째 유혹{1-4절; 신명8.1-10 참조)에서 악마는 옛 아담을 먹을 것(선악과)으로 유혹 했던 것처럼 물질적 안정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라고 유혹한다. 두 번째 유혹(5-7 절)은 악마가 목적 달성을 위해 그럴 듯하게 성경을 인용하여(시 91편)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한다. 문제는 악마가 성경 말씀의 본뜻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보살핌을 증명해 보라는 즉, 신앙을 빙 자해서 하느님을 조종하려 한다. 세 번째 유혹(8-11)은 세 가지 유혹 중에 예수님과 하느님을 갈라놓고 그분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파격적인 유혹이다. 악마는 여기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악마에게 절한다면 십자가의 길이 아닌 세상 제국들의 배후 세력인 악마에게 예속되게 해주겠노라고 제의한다.
♠ 복음 요약 및 대화 방향
- 우리 대부분은 생존과 관련된 유혹에 약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세상의 부와 지위 성공만을 지향하면서 목적달성을 위하여 신앙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내가 예수님을 위해 이런 선행, 기도를 할 테니 그 대신 하느님이 내가 원하는 일을 들어달라고 거래를 한다. 마침내는 성경말씀을 빙자하여 복음운동을 펼친다. 참으로 집요함과 끈질김 이것이 악마의 특징이다. 악마는 예수님이 40일 단식할 때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유혹했다. 이러한 악마의 공격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계속될 것이며, 교회 역시 유혹을 받을 것이고 베드로처럼 유혹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았다. 그분을 따르는 신자며, FB 회원인 우리는 어떻게 유혹을 극복할 것인지 예수님을 통해 배워야겠다. 그러면 어떻게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하신 대로 하면 된다. 예수님이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성경말씀이었다. 악마는 우리 힘으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고 유혹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유혹을 물리치는 최상의무기다. “당신께 죄 짓지 않으려고 마음속에 당신 말씀을 간직합니다.”(시 119.1) 우리 마음 안에 말씀을 간직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유혹에서 지켜준다.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진심으로 자주 기도하자...
♠ 참고 문헌 : ▪ 예수 새 시대를 여심 ( 송봉모 지음 / 바오로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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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2주일
2020. 3. 8
마태오 17, 1~9
♠ 복음 공부 :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
☞ 들어가면서 : 예수님의 변모사화는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을 위해 모세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와 맥을 같이한다(탈출 24장). 우선 ‘엿새 뒤에“라는 시점은 모세가 구름 덮인 시나이 산에서 엿새 동안 정상에 머물다가 구름이 걷히면서 모세를 하느님이 부르신다는 내용과 동행한 이름을 명시한 세 명이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 세 명을 떠올리게 한다. 변모사건에 묘사한 사용된 표현들은 묵시문학 및 헬레니즘에 표현된 현현사화로부터 파생된 소재로 예수님께서 종말을 앞당겨 살아가는 종말론적 존재임을 시사해 준다. 산 위의 변모 광경은 천국의 전주곡으로 의미심장하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 1~4절 :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하느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난다. 이 모습을 본 제자는 세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에 세 명의 제자를 동행시켜 목격 증인으로 삼으신다.(26.37). 예수님의 변모 묘사를 마태오는 옷만이 아니라, 얼굴까지의 변모가 병행한다. 이런 묘사는 예수님이 한 순간이나마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천상의 존재로 변모하셨음을 시사한다(묵시1.16). 그 때 율법서를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서를 대신하는 엘리아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는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모두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이 변모의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며, 초막 세 개를 지어 함께 살면 어떤지 예수님의 의중을 물어보는 제안이 첨부 된다.
* 5~9절 : 시나이 산의 구름이 그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주님의 명령적인 말씀이 장중하게 들려온다. 세례 때와 흡사하게 당신의 아들을 소개하시며,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하신다. 하느님의 위엄 앞에 두려워 얼굴을 감추고 엎드려 떨고 있는 제자들 가까이 예수님께서 다가가 일으키시고, 산을 내려오시며 함구령을 내리신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야 비로소 이 사건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복음 요약 :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찬란한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먹구름 저 너머로 선 듯 찬란한 태양이 비추듯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태양 뒤에 찬란한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에 대해 아직 확신하는 듯 보이지 않은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고 깊게 하시며, 장차 올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늘나라의 예표로써 당신 신성의 광채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 가지다. 변모는 단 지 예수님의 신비를 잠깐 보여준 것만이 아닌 삶의 여정, 선교하는 교회를 격려하기 위한 사건이다. 성부의 명령에 두려워 엎드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와 일으키신다. 이처럼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마칠 때까지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의 변모는 수난과 죽음 이후의 상태를 미리 보여줍니다.
영광과 승리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진리를 체험한 경우를 나누어주세요.
②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영광 속에 빛나는 예수님 곁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고통은 싫고 영광에 안주하려는 나의 마음이 잘 드러날 때는 언제입니까?
♠ 참고 문헌 : ▪ 소공동체를 위한 성경공부 마태오복음 맛들이기 (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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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3주일
2020. 3. 15
요한 4, 5~42
♠ 복음 묵상 : 물-생명-예수님
☞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은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그것은 놀라운 체험입니다. 지금까지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고 방황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경이롭고 새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은폐시키거나 감출 수 없는 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우리들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서 살아가는지 성찰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영혼의 갈증으로 목말라하는 인간에게 물을 주시는 샘이시고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물을 청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문제를 알고 먼저 다가오시는 하느님 사랑 그 자체임을 느끼게 됩니다.
물동이를 두고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자 지체 없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알렸으며, 그로 인해 동네 사람들도 그분을 만나 그분이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과 비교하여 생각해 봅시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요한 4,10) ”
이제 막 운전을 시작한 초보 운전자입니다. 차를 몰고 전혀 모르는 길을 찾아 나설 때면 늘 두려운 마음부터 앞서기 마련입니다. 그 때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이정표만을 찾게 됩니다. 오늘 나에게 해로운 일이 내일이면 유익한 것이 될 수 있음을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분은 또한 먼 훗날을 위해 예비하신 일이 오늘 일어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 것이며, 어떤 다른 곳을 위하여 마련하신 일이 내가 자리하고 있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실 지도 모릅니다.
♠ 대화 방향 : 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왜 수난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을까?
왜 예수님은 그 당시의 백성들이 로마의 속국이라서 그런지 몰랐을까?
왜 그분은 정치에 관여하는 대사제나 율법학자보다는 나약한 여인네들을 더 가까이 하시려고 했고, 민중들에게 직접 다가서서 설교를 했을까?
②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우리는 세상에서 보다 교회나 공동체 안에서만 안주하려고 할까? 50주년을 맞이하는 성서형제회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 참고 문헌 : ▪ 보득솔 ( 출판 : 청년 성서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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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4주일
2020. 3. 22
요한 9, 1~41
♠ 복음 공부 :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다.
* 1절 :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를 만나시지 않으셨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
* 2~3절 :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제자들의 질문은 비록 그 세대 제자들만 묻는 질문이 아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명확하게 대답해 주신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 된 것이다.”
* 4~7절 : 예수님은 그를 본 순간부터 이미 그를 치유해주시려고 그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으신다.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 눈에 바르시고 나서, 실로암으로 가서 씻어 라고 말씀하신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 라고 번역된 말이다. 이것은 그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의미하는 것일 수 도 있다.
* 8~14절 :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뜬 것을 보고 그에게 물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해주신 것을 말한다. 그러자 그를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간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 15~24절 : 바리사이들은 그에게 어떻게 치유되었는지를 묻고 부모에게도 묻는다.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면 유다인공동체인 회당에서 내쫓기로 하였기 때문에 부모들은 겁에 질려 아들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한다.
* 25~33절 : 예수님의 은총으로 치유 받은 소경은 어떻게 변했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담대하게 예수님을 간증한다. 바라사이들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부모와는 분명하게 대조적인 변화이다. 그는 담대하게 간증한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하자, 그는 담대하게 반대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 34~39절 : 바리사이들은 그를 밖으로 쫓아낸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타나시어 물으신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 40~41절 :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하고 말씀하신다.
♠ 복음 요약 : 예수님께 치유를 받고 변화된 소경은 바리사이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거한다. 유다인 공동체에서 쫓겨날 위험도 상관하지 않고 그는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고백한다. 바라사이들에 의해 쫓겨난 그를 보고 예수님은 그에게 나타나시어 자신을 드러내신다.
♠ 대화 방향 :
이 세상은 두 개의 얼굴을 보이고 있다. 한편에서는 고통과 불안과 두려움, 다른 한편에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보살핌이다. 우리가 고통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면 때로는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고 고통만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삶의 첫 자리를 하느님께 드리고,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와 보살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시선을 어디에 두는가는 우리 몫이다.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 두는 사람은 하느님의 섭리와 보살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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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5주일
2020. 3. 29
요한 11, 1~45
♠ 복음 공부
* 1~16절 : 라자로가 죽다.
라자로와 마리아, 마르타가 등장하고 그들은 남매간으로 베타니아 출신으로 마리아의 과거 사건이 아니라, 미래의 사건을 앞당겨 언급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임을 강조하기 위한 “예언적 과거”라는 문학적 기법으로, 앓고 있는 라자로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는 마리아의 행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자매는 앓고 있는 오빠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우리 친구”로 각별한 사이로 묘사한다. 라자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병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자로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은 그분의 영광이 죽음과 직결됨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이것을 알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라자로에게 즉시 가지 않았다. 제자들과 주고받는 대화에서 예수님은 은유적으로 말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라자로가 잠들었다.”고 말할 때 ‘그러면 깨어나겠지’ 하는 몰이해를 한다. 라자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살아날 가망이 없으며, 그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드리고 있음에도 예수님은 우정 때문에 자진해서 찾아 가신다. 그 길은 위험이 있는 길이며, 제자들이 만류함에도 세상의 빛이신 낮의 빛 가운데 걸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 17~27절 :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마르타는 밖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다.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난 후, 유대교 신앙에 의하면 영혼이 사흘 동안은 시체 주변을 배회하고, 네 번째 날에는 영혼이 무덤 주위에서 떠나버려 소생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 따라서 이런 상태야말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일찍 오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오빠를 다시 살리시도록 청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말씀하시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마르타의 신뢰에 응답하신다. 마지막 날에 죽은 이 소생되리라는 유대인들이 지녔던 전형적인 믿음을 교육받은 마르타가 예수님에 대한 큰 신앙을 갖도록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덧붙이면서 마르타의 견해를 바로잡아 주고자 한다. 마르타에게 있어서 부활은 오직 종말론적인 미래에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에게 가져다 줄 사건이었음에 비해 예수님은 언제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가운데 현존하는 영원한 생명의 실현체이다. 이어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신다. ‘믿는다’라는 조건하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마르타는 주님께서 메시아요 하느님이심을 믿어왔다(완료형)고 고백한다. 그러나 마르타는 그분을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하느님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신앙고백은 완전하지 못하다.
* 28~37절 : 눈물을 흘리시다-예수님과 마리아의 만남을 다룬다.
아직도 마르타는 불완전한 믿음을 드러내는 스승님이란 칭호로 마리아에게 전한다. 자기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일어나 그분께 간 그녀는 마르타의 신앙고백과는 다르다.(22/32) 마르타는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이로 보는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현존 안에 있는 능력을 무조건 신뢰한다. 그처럼 예수님에게만 온전히 주위를 기울이고 눈물도 보이지 않고 올바른 믿음을 보여주던 상황이 갑자기 바뀌고 마리아가 유다인들과 더불어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며 인간적 슬픔이 압도되면서 마리아의 참 믿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격양된 감정이 표출되고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에 분노하신다. 그리고 비통한 심정에 연민의 눈물을 흘리시며 착잡한 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타 복음서에서 나오지 않은 예수님의 격양된 감정이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38~45절 :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다 - 당신이 무덤에 가신다. 이제부터 그분이 상황을 주도하심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실체를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표징이다. 라자로의 경우 그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지만, 마르타의 믿음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군중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한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였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이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킨 사건은 예수님이 죽음에 처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한편 요한이 복음서에 포함시킨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중요한 표징이 되고 있는데, 이 사건이 생명에 대해 전능한 힘을 가장 두드러지게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며, 표징들이 탄생부터 죽음이 아니라, 탄생부터 영원까지 사람의 영적여정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및 믿는 이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에로의 부활을 분명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다.
♠ 대화 방향 : 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요?
⑵ 마르타처럼 오늘도 올바른 신앙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예수님께서는 원하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다질 수 있었던 최근의 경험에 대해 나누어 주세요.
♠ 참고 문헌 : ▪ 요한복음 주해 (한남성서연구소 정태현 / 바오로의 딸 출판사)
▪ 요한복음 성서못자리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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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묵상자료 기고 >
복음 선포와 증거의 삶을 살기 위해...
< 마태오 복음 5장 38~48절 >
F·B 회원 : 장 도미니코 사비오 (철호)
찬미 예수님 ! 안녕하십니까,
멕시코의 한 살레시오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아주 멋진 신사가 교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교무실에 앉아 있던 젊은 교사들이 즉시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요즘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성공한 졸업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왔냐는 물음에 학창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프란치스코 선생님을 만나 뵈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렸고 교무실에서는 정말이지 감동적인 사제지간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명 인사가 된 제자는 이제 백발이 성성한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렸습니다.
“프란치스코 선생님, 이렇게 늦게 찾아뵈어 정말 죄송합니다. 학창시절 선생님으로 받은 소중하고 은혜로운 가르침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따뜻하고 행복한 미소를 만면에 가들 머금은 선생님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안젤로 ! 안 그래도 자네 소식을 늘 전해 듣고 있었네. 그래 어떤 가르침이 그렇게 좋았던가? 내가 그 때 자네에게 역사 과목을 가르친 걸로 기억하는데 그 과목이 그렇게 좋았던가?
제자는 그게 아니라 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잘못한 일이라도 있나 걱정하며 선생님 앞으로 다가갔더니 선생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돌발 상황 앞에서 몹시 당황했던 저는 그제야 제 오른쪽 신발 끈이 풀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생님꼐서는 아주 정성껏 제 신발 끈을 묶어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제 됐다. 안젤로! 빨리 나가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거라!” 선생님은 늘 한결 같으셨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한바탕 훈시를 늘어놓지 않으셨습니다. 아이들이 듣기 싫어하는 잔소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늘 말없이 따뜻한 미소를 저희에게 건네셨습니다. 마치 다정한 아버지처럼 정겨운 눈빛과 몸짓으로, 행동하는 모범과 겸손으로 저희를 기르치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십년 세월동안 단 하루도 선생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이 말을 전해 드리려고 저는 독일에서 멕시코까지 날라 왔습니다. “ 이렇게 말없이 따뜻한 미소와 행동하는 겸손으로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은 그것을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합니다. 살레시오 수도원에 미사를 다닌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대하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위의 글에 나오는 프란치스코 선생님과 같은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 ’MBC 스트레이트‘ 라는 프로그램에서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수도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곳은 생지옥에 도가니’ , ‘6호 시설’ 아이들의 절규
이 방송이 나가고 다음 날 미사때 신부님은 강론에서 너무나 억울하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스트레이트’ 라는 프로그램이 어떤 방송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MBC를 전혀 보지 않는 편입니다. 내용이 거의 없고 정치적으로 편파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방송이 나가고 나서 살레시오수도회 양승국 신부님이 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을 소개합니다.
제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어젯밤 ‘MBC 스트레이트 살레시오 청소년 센터’ 편을 보고 난 후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살아온 지난 35년간의 제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방송도 나가기 전 예고 기사는 벌써 저희 센터를 악의 소굴로 예단해버렸더군요.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과 동역자들을 천하의 쳐줄일 놈, 파렴치범으로 낙인찍어 버렸구요. ‘생지옥’ ‘또 다른 도가니’ ‘아이들의 절규’ 등의 표현을 접하며, 정말이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왜곡되고 조작된 매스미디어의 폭력성과 위험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진행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저희에게 총칼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진위여부도 따져보지 않고 일단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유인한 후, ‘아니면 말고!’ 식의 거대 언론의 횡포 앞에, ‘아, 약자들과 피해자들이 이렇게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구나.’하는 생각에 큰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제작진은 강제 약물 투여 같은 어불성설의 사안에 대해서, 진위여부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찌감치 저희를 범인 취급하시더군요. 세상 둘도 없는 의인처럼 비춰지던 진행자와 패널들, 기자들의 언어폭력을 바라보며, 아무런 죄도 없이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수십년 동안이나 매주 센터에 오셔서 개구장이 한명 붙들고 한글을 깨우쳐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던 자원봉사자 선생님들께서도, 지난 삶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라며, 울음을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청소년들이 이 방송을 보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부모와의 사별, 방황, 일탈로 6호처분을 받고 살레시오청소년센터에 와서 느꼈던 따뜻함을 기억하며, 이건 정말 아니라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제작진들에게 엄중이 묻고 싶습니다. 어제 방송 때 보니 사회자분을 비롯해서 패널로 나오신 분들, 기자분들, 이 세상 그 어떤 성자(聖者)보다도 더 끔찍히 요보호 청소년들을 사랑하시는 분위기던데...솔직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어미잃은 어린 새같은 아이들과 마주앉아 세시간 네시간씩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있습니까? 방송 중에 참 좋은 말씀 하시더군요. ‘한 아이를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제작진 여러분, 혹시라도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세상과 부모에 대한 분노로 똘똘 뭉쳐진 아이에게 밥한끼 사주신 적이 있습니까? 악의적으로 편집된 방송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센터장님을 비롯한 임직원 선생님들이었습니다. 한번씩 방문할 때 마다, 주말이나 휴가도 없이 사시사철 온종일 상처많은 아이들 곁에 서서 환하게 미소짓고 계시던 센터장 신부님의 얼굴, 혈기왕성한 아이들과 하루 온종일 뛰어노시느라 언제나 상습피로에 젖어 계시는 성무감 신부님,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백방으로 고민하시는 임직원 선생님들의 얼굴, 언제나 저희 센터를 사랑하고 신뢰해주시던 봉사자들, 후원자들, 협력자들이 떠오르며 그분들이 받았을 상처와 충격, 자괴감을 생각하니 도저히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공영방송임을 자랑하는 MBC입니다. 말 마디 그대로 공영방송은 공공의 복지와 유익을 목적으로 하는 방송입니다. 당연히 공영방송은 공평해야 하고 진실만을 보도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어제 방송에서는 공정성이나 객관성, 형평성, 진실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스트레이트 제작진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상식적이고 균형잡힌 프로그램 제작에 힘써주십시오. 부디 진실만을 보도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갈 수 있기에, 프로그램 제작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주십시오. 객관성과 진실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편파성과 선정성만 가득한 프로그램으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참으로 큽니다. 6호처분 기관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고 새삶을 시작한 수많은 청소년들, 아이들의 변화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부모님들,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관련 공무원들, 자주 찾아오셔서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는 가정법원 판사님들... 그분들이 받으셨을 큰 충격과 상심에 참으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저희는 진실 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언젠가 주님께서 시시비비를 가려주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양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언젠가 주님께서 시시비비를 가려주실 것이라는 글이었습니다.
한 주간도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길 바라며...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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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F․B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면서... - 제 8 부 -
안산 원곡본당 F・B / 권 토마 (순)
< 평신도의 성서사도직 활동의 한계점 출발 (하편) >
서울대교구인 경우 사제마다 독특한 색깔이 분명하여 사목은 여러 가지를 주문하면서 사제 중심적으로 사목을 한다는 것이다.
1990년 아시아 주교회의를 통해서 당시 서울보좌주교였던 강우일 주교님의 소개로 시작된 서울교구 소공동체가 여전히 세월이 지났으면서도, 그리고 수많은 시노드를 거치면서도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의사가 다이어트를 하러 온 환자에게 식사처방을 내린다. 그 내용을 들은 환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이 처방해준 식단의 식사는 식전에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식후에 하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웃기는 얘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의 체질은 그대로인 것이다.
그 당시 소공동체의 의미라는 것은 교회 전체가 소공동체 중심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지, 다른 단체 중심이나 분과 중심 체제를 그대로 두고 한가지 더 첨가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갑작스럽게 봉사자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대부분 기존의 봉사자가 겹치기로 하는 바람에 봉사자만 피곤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본당의 새로운 변화를 실천해 나갈 수 역동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봉사자가 보이지 않고 10년, 20년이 지나도 봉사자는 그 이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천주교회의 봉사자 시스템은 매우 좋은 자료와 환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구성원들의 몰입이 부족하고 잘 정리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교구가 낸 통계치를 보면, 신자들이 가장 소원하는 것 중에 하나는 ‘성서사도직 참여’ 이다.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성경 프로그램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때로는 말씀봉사자가 되려는 사람도 매우 많지는 않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봉사할 인재가 분명 적지는 않다. 엄청 어려운 교육과정인 각 교구의 교리신학원을 졸업한 선교사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시스템적인 관리와 활용 실태에서 보듯, 성경공부 봉사자들의 파급효과는 기대한 만큼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지난 몇 년간 성경 프로그램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신구약 전체를 다 훑어봤을 것이라서 약간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성경 말씀을 전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삶을 이해하고 그 중 몇 가지만이라도 삶을 따르려는 맘일 것이다.
저녁에 2시간의 시간을 내어서 교육을 학기 단위로 받다보니, 신학적 성경적 용어가 쉽지 않아서 몇 번 읽어도 잘 알 수가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학설과 가설이 첨가된 교육을 신학적인 전문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에 의해서 지식적으로 전달되는 일이 아주 어렵기만 했다.
아직도 ‘성서사도직’ 이라면 이런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에 힘듦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성경은 전부를 알아도 생활이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성경 한 줄을 듣고도 주님께 고백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인 것이다. 조선 박해시절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정보가 없었다. 오로지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성물들뿐이었다. 대규모로 박해를 받아 묻힌 곳에서는 이런 성물과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제가 없던 시절, 조선에 사제가 계시더라도 박해시대라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때에 성사를 받기가 어려울 때에는 이들이 순교할 수 있는 원동력이 있었다는 놀라움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천주교회는 획기적으로 변화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내 이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시기이다.
어느 수사님이 제게 물었다.
“형제님은 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제가 머뭇거리자, “형제님의 삶이 신앙으로 인하여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서울에서의 나의 신앙생활의 출발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였다. 대구 지역 공장에서 직장 생활하다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동한 후 겨우 냉담을 풀던 내가 수도회의 모임을 통해서, 그리고 서울 가난한 동네인 시흥동과 안산의 원곡을 두루 다니면서 하느님의 발자취를 보고 느낀 것이라 여겨진다... 아멘 !
나는 새삼 느낀다. 우리 주변에 하느님의 도움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있으며, 받을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그분들은 오로지 주님만이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관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인데, 오로지 주님을 따라다녔던 마태오가 스승과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알려진 마테오복음서는 5가지 설교집으로 구성되어졌다고 알려졌고, 그중의 중심이 산상설교의 근본사상이 아나윔이고, 이를 헌장으로 삼은 창립자 최 바오로마리아(규업) 신부님의 사명은 결코 우연히 아니라, 주님께서 섭리해주신 것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남미 에콰도르 먼 타국에서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생활화하도록 격려하고 우리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계시겠는가...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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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많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20년 1월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