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산중의 산, 구름위의 또하나의 산, 지리산 67km를 가다....'
라는 장중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1981년 지리산 원정 보고서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사진도 없이 지도만 보았다느니..
대원 9명에 포터 4명과 함께 출발했다느니......
포터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였을지...
지리산과 산장은 어떠했고, 얼마나 시간은 걸렸으며 등등,
그시대 등산문화를 엿볼 수 있는데요..
지금은 상상도 못할, 6,70년대와는 또다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참고로 80년대 초라서 아직은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이고,
'지리산', '남부군', '태백산맥'류의 소설이 등장하고 지리산이 통일의 상징으로 뜨거워지기 전이라,
이 글에서는 여기에 관한 이야기들은 없습니다.
지리산 170리를 가다.....제목부터가 벌써 고색창연하네요^^
서기 1981년 5월 28일 13시 15분 서울역을 출발 여수행 특급열차를 탄
서일산악회원들의 원정보고서입니다.
내지도...원고지라....
한줄한줄 읽다보면 뭔가 아련한 오래전 봄꿈을 다시 꾸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래는 그 중에 주목할만한 부분들을 모셔옵니다..
'사진에서도 보지 못하고 지도만 보고 해발 1915m 고지를 향하여 머리속에 그리면서
차창밖으로 밀려나는 서울의 전경을 뒤로 하면서 표정은 굳어져 있다. 밝기만 하다(로 고침)
15시 30분 대전역 도착하여 가락국수를 1분만에 해치우고 다시 승차하였다.
18시 25분에 남원골 도착하였다. 섬진강의 맑은 물줄기를 따라 곡성을 지나 19시 15분에 구례구역에 도착. 역문을 통과하는 찰라 낯선 두 사나이가 머리를 삭발한 장대하고 믿음직한 사나이가 우리 일행을 반기지 않은가. 바로 그 사나이가 ...지리산 도면을 보내준 지리산악회 총무 이만주씨와 리더 이길호씨가 우리 대원들의 도착을 환영해주었다....
택시 2대와 승용차 1대로 분승하여....화엄사 백화여관에 숙소를 미리 예약해 놓고 있었지 않은가.
19시 40분에 도착하여 여장을 정돈하고 저녁 식사 준비에 들어가.......
지리산악회 총무 이만주씨가 거나하게 알콜 냄새를 풍기며 열심히 지리산에 대한 설명과 유의사항을 말해주고 떠나갔다....
5월 29일 우리대원 9명과 포터 4명이 출발하여 화엄사로 향하였다.
지방 중학생들이 수없이 수학여행을 왔고.....
우리 일행은 대웅전앞 5층 석탑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주: 일제 때부터 이곳은 화엄사 인증샷의 포인트였음)
국보 12호라고 써 있지만, 단청도 하지 않고 버려져 있는 주인없는 흙속의 주옥같아 가엽기만 하고
분통이 터졌다.
대나무 단장을 준비하고 후미 그룹에서 8시 50분에 드디어 산행이 시작되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10km란 안내판이 있었고 등산객으로부터 약 4시간 걸린다고 한다.
얼마쯤 오르다 쉬면서 시원한 계곡물로 갈증을 해소시켰다.
우리 대원은 20여kg의 배낭을 메고.....포터 4명은 1인당 약 40kg을 메었다...
가끔가다 주위에 야영장이 있으나 불결하기 짝이 없다.
노고단 전방 4km를 남겨놓고 시원한 계곡물에서 세면과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였다.
바로 그 지점이 코재라고 하는 문턱이었다. 가파르고 좁다란 길과 숲에서 온몸에서는 비오듯 땀방울으로 젖었다. 과연 코재 눈썹재라고 대명사가 씌여질 정도였다.
기대했던 노고단은 그저 평범한 야산처럼 1507m답지 않게 계곡물이 흐르고....산장이 허물어져 폐허된 서구의 전쟁터를 연상케하는 장관도 있고, 상봉에는 민간인 접근금지라는 푯말 때문에 발길이 뜸하다(한국방송공사의 중계소임).
11시 40분에 도착하여 노고산장 관리인 일명 털보 함태식씨와 기념촬영하고 점심을 먹은 후 포터 1명은 하산하였다.
그래서 우리 대원들은 식량 3kg을 추가하여 배낭을 등에 지고....
장엄한 능선과 계곡을 설명하는 이길호씨는 산이 좋아 산에 살고... 산속으로 젊은 청춘을 불사르겠다기에.....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임걸려에 가까워지자. 필자는 유래를 설명해달라는 첫물음이었다.
이길호씨의 지리산 등정에 첫설명은 시작되었다.......노고단 반야봉 사이를 말을 타고 오가는 길로써 삼국시대 구례원님이 말을 타고 가다 하도 숨이 차서 잠시 쉬면서 말에게 물을 먹여서 원님과 말의 목마름을 일컬어 임걸령이라고 하는 전설이다. 이하 지리산에 관한 재미있는 설명이 조금 더 있는데 생략.
토끼봉 중간인 북쪽 200미터에 밤새골 산장에 도착하여 야영준비에 들어갔다. 뱀사골 산장(반야산장) 부럭담(?)에 도담지붕과 대들보와 석가래는 철재로 되어 있어나 81년 1월 폭설로 반이 찌그러져 위험을 주었으나 어쩔 수 없이 상단과 하단을 점령하여 쓸쓸하게 지날까 했더니...또다른 일행 8명이 들이닥쳐 침구배열을 함께 하고 코고는 사람은 상단에 배치하였다.
19시 15분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는 부식이 부족할까봐 지리산의 명물 현초(취나물과 비슷함)을 삼아 본 필자가 된장과 소금으로 양념하여 특별 부식으로 저녁을 먹고, 주위를 살펴보니
우물은 위와 아래에 위차혹 남쪽으로는 코를 찌르는 악취의 쓰레기장과 문짝없는 무인산장물은 어찌나 차가운지 밥쌀을 씻는데 고통을 받았다.
4시에 잠이 꺠어 아침식사준비를 하고 전대원이 5시에 기상하였다.
5월 30일 하도 추워서 다른 대원들이 밤에 피웠든 모닥불이 아침까지 타고 있지 않은가.
모닥불에 손을 구워가며 아침 식사에 들어가 ......
7시 30분 출발 토끼봉에 도착하여 기념 촬영을 하고 아래로 굽어보니 경상도 사투리의 아낙네들의 너털웃음에 필자와 황윤영씨와 함께께 나물케는 아낙네와 잠시 피로함을 농담으로 풀고...
반야봉과 날나리봉 중턱의 노루목이라는 고개는 잘뛰는 노루도 쉬어가며 아름다운 계곡을 살피고 갔다 한다, 우리 일행은 이곳 철쭉꽃을 배경으로 촬영을 하고 연하천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남녀 2쌍을 만났다 비박굴에서 잠시 쉬었다가 벽소령에 13시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작전도로가 나있고 야영장도 아무곳이나 설치 할 수 있었으나 우물이 남쪽으로 가파르게 300m나 내려가야 하는 단점이 있다. 우리 일행은 이곳 산에서 산파를 케어 양념하고 점심을 먹는 시간에 스님 2명과 나물케는 할머니 4명이 지나갔다..
대열의 순번은 회장의 명에 따라 절대 복종하면서 세석평전을 향한다.
여기서부터 세석평전까지 6km라는 이정표가 우리를 반기고 있다......
대평원!
활짝 펼쳐진 철죽의 평원 산장과 헬기장 야영장이 평야지대를 온 것 같았고 후련한 제3박의 장소다. 노고단에서 이곳까지 36km 17시 35분에 도착하여 석양에 핀 철쭉 꽃에 몸을 담고 촬영을 한 후,...
이곳에 여장을 풀고 막사 짓는 대원, 식사준비하는 대원 모두가 협력하여 저녁식사를 끝내고,
대원 2명과 포터 3명은 산장으로, 나머지는 3개의 막사에 분할하여 취침에 들어갔어나....
고달픈 하루밤을 지내고 4시에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5월 31일 아침9시에 장터목을 향하여 출발.
우리는 지리산장 장터목에서 이만주씨 조카를 만났고, 전주도청 산악회원들이 약 30여명이 와 있었다..
어느듯 천왕봉에 도착하여 이총무 조카로부터 지리산 계곡과 일기 천왕봉에 대한 설명을 듣고 우리 대원들은 만세를 부르며 시진촬영시.......
하산 100미터 지점에서 바위틈사이로 콸콸 솟는 생명수에 점심을 지어먹고 하산준비에 바쁜 여장을 챙긴다.
법계사에 14시 55분에 도착하여 기념 촬영을 하고 허물어져 가는 허름한 사찰에 실망을 했고....
우리대원들은 중산리 미쳐 못가 다리목에서 목욕을 하고 중신리 버스 정류소에 17시 50분에 도착하였다.
우리와 함께 3박 4일에 고통을 겪고 침식을 같이했던 포터는 가고.
진주역전 여관방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고 환희속에 무사하였다는 간단한 파티를 하였다.
첫댓글 대원 9명이 히말라야 가듯 포터 4명까지
고용해 20키로, 40키로 씩 지고 오른
지리산 종주기 또한 흥미롭네.
1981년도 화엄사~ 중산리 67키로길, 3박4일과
2012년도 산악회따라 혼자 나섰던 나의
2박3일 성삼재~중산리 35키로길 비교.
대피소가 해결되니 배낭무게는 10여 키로정도...
http://m.cafe.daum.net/py2711/NwSm/255?svc=cafe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