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세계 Ⅱ
풍경의 주인
글 공일스님
서울대학교 졸업, 인도철학자,
현재 서울 봉은사 포교국장
아주 가끔 자기에게 썩 어울리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달빛조차 잠든 늦은 저녁,
괴괴한 암자의 법당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조차 놓아버린 노승의 뒷모습.
텅빈 눈빛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본주의의 야멸찬 부패를 고발하며
야훼의 권능이 잠시라도 임재하여
정의가 강같이 흐르기를 바라는 정직한 신부의 몸짓.
온갖 아픔 속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꽃밭을 가꾸다가 문득 그 스스로가 꽃으로 피어난, 결코 예쁘지는 않지만
버려진 여인의 거칠어진 아름다운 참된 손길.
이들 풍경에서
신의 구원보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나오는 것 아닌가?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그런데 인간계가 꿈꾸는 풍경을 넘어서며
선계의 존재가 된 사람,
매화를 부인으로 삼고, 학을 자녀로 여기며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소문이 나버린 존재, 임포(林逋)를 생각해 본다.
저 무망한 풍경의 주인이다.
衆芳搖落獨喧姸 (모든 꽃들 시들어 졌는데 홀로 피어)
占盡風情向小園 (조그만 정원 풍정을 다 가졌구나)
疎影橫斜水淸淺 (성근 가지 그림자는 호수에 비치우고)
暗香浮動月黃昏 (그윽한 향기 움직일 때 달은 몽롱하구나)
몽롱한 달빛이라니
선계어 그럴듯하게 어울리지 않던가?
인간의 꽃들 시들어
그 무엇에도 기댈것 없는 이 세상에서,
진정 풍경의 주인으로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꽃이야 홀로 피어나라고 매화나무를 등지고
학조차 무심히 바라보며
임포는 시방 그대를 부르고 있다.
그 소리는 필시 우주법계의 질서 속에서
함께 노닐자고 부르는 소리이다.
그러니 깨침의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봄직하다. 발심해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