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우크라이나군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여전히 '병력 보충'이다. 서방에서 군사 장비및 무기가 대량 공급되더라도, 이를 운용할 병사들이 모자랄 것이라는 한탄이 나온 지는 이미 오래됐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군부는 대책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대곤 했지만, 전투가 가능한 남자들을 후방에서 대거 징발해가는 방법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급기야는 지난해 12월 동원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새 동원법을 최고라다(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동원의 목적 달성만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현실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의회 심의에서부터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전선에서 싸울 병력을 보충받아야 하는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은 4일 논의가 지지부진한 의회를 향해 "그럼 누구랑 같이 싸우란 말이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사진출처:President.gov.ua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잘루즈니 총참모장은 이날 법안을 비공개 심의하는 의회 국가안보국방위원회(이하 국방위원회)에 루스템 우메로프 국방장관과 참석, "동원을 늘리는 게 전쟁 승리를 향한 객관적인 요인"이라며 "우리는 병력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는 "러시아는 이미 40만 명을 동원했고, 6월에 또 수십만 명을 모집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는 누구와 같이 싸워야 하느냐"며 의원들을 향해 "병력을 보충해 주지 않으려면, 세계로 나가 인원(의용군/편집자)를 모아오든가, 직접 싸우러 가라"고 직격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처럼) 전쟁 포로와 수감중인 범죄자들을 전선에 내보내는 방안에는 반대했다. 법안을 심의중인 의회 국방위원회는 오는 8일 어떤 형식이든 결론을 낼 것으로 전해졌다.
상정된 새 동원법은 동원 연령을 기존의 27세에서 25세로 낮추고, 동원 소환장 배포및 징집 과정을 최대한 단축하고, 동원에 응하지 않을 경우, 사회·경제적으로 강력한 제재를 가한다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사회 여론은 이 법안이 러시아의 '동원법'보다 더 가혹하다며 부정적이다. 새 동원법이 채택·발효되기 전에, 해외로 도피하거나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지하로 잠적하는 남성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여론에 민감한 의원들도 법안의 원안대로 통과에 반대하는 분위기다.
우크라이나의 최고라다(의회)/사진출처:НикВести
새 동원법 통과가 난항을 겪는 것은, 근본적으로 최전선으로 나가 피를 흘리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개전 초기에 러시아군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 무기를 들었던 우크라이나인들의 행렬은 이미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됐고, 총동원 과정에서 드러난 뇌물 공여와 각종 비리로 '공정한 동원및 징병'에 대한 믿음도 깨졌다. 동원 규모를 놓고 젤렌스키 대통령과 잘루즈니 군총참모장이 서로 맞서는 '대립 양상'도 군기피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 공정한 동원 방법은 복권 추첨방식?
보다 못한 주요 인사들은 장난같지만, 현실적인 동원 방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티모페이 밀로바노프 전 경제장관은 '(복권) 추첨 방식'으로 동원 대상자를 선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복권 추첨처럼) 태어난 날짜를 뽑아, 당첨된(?) 생일을 가진 사람들은 동원하고, 나머지는 제외하는 게 가장 공정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우크라이나군이 내놓은 동원 촉구 홍보물/사진출처:우크라 국방부
하지만 이 방식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을 기피하는 미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제로 활용됐다.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백인보다 유색인종이 더 많이 베트남전으로 끌려간다는 거센 비판을 잠재우기 위에 '복권 추첨' 방식이 도입됐다는 것. 실제로 1969년 12월 처음으로 추첨을 통해 (출생) 날짜가 뽑혔고, 그 장면은 TV로 생중계됐다. 당시 '9월 14일'이라는 날짜가 당첨됐고(?), 그날 태어난 남자들이 베트남으로 차출됐다.
복권 추첨 방식은 이후 다양하게 응용됐다. 예컨대 영어 철자(스펠링)를 하나 뽑아, 그 철자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들을 베트남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이름의 첫 글자로는 'J'자가 제일 먼저 나왔다. 이같은 '뽑기 방식'에도 '여전히 불공정한 게임'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당국은 아예 저명한 수학자들을 동원해 공개 추첨 방식의 '공정함'을 입증하기도 했다. 이 방식은 지난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또 특정 지역에서는 생존 게임인 '헝거 게임'을 통해 동원 대상자를 뽑자는 아이디어도 제기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은 아직까지 이같은 제안들에 대해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스트라나.ua는 "이런 논의가 이뤄졌다는 사실 자체가 동원 과정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섣불리 대응하다가는 자칫 더 큰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군/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반면, 우크라이나 당국은 고액 연봉자들에게는 동원을 연기해주는 방안도 논의 중인 것으로 5일 전해졌다. 개인 소득세가 월 6천 흐리브냐(월 급여 3천340만 흐리브냐에 해당)가 넘거나, 일정 금액 이상의 사회보장 기금을 내는 기업의 근로자들에게는 동원 연기 혜택을 부여하는 방안이다. 지금까지는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기업에 다니는 근로자들이 동원 연기 대상이었다.
◇ 새 동원법이 경제활동에 미칠 영향은?
우려되는 것은, 의회에 상정된 새 동원법이 어떤 식으로 수정·보완되더라도 심각한 후폭풍을 피해가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스트라나.ua는 새 동원법이 공개된 뒤인 지난 12월 28일 전문가들을 동원해 이 법안이 가져올 사회적 혼란을 조목조목 짚었다. 무엇보다도 전쟁 전망에 대한 우크라이나 사회의 태도가 바뀌며, 어떤 형태로든 전쟁의 빠른 종식 요구가 터져나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새 동원법은 동원, 군 등록 및 복무에 관한 특정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법률 개정안과 징병 거부자, 위반자에게 사회 경제적으로 제재를 강화하는 법안 등 2개로 구성됐다. 최종 목표는 당연히(?) 동원 규모를 크게 늘리자는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연말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군이 45만~50만명을 추가로 동원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했으니, 그 정도 규모를 상정한 듯하다. 잘루즈니 군총참모장도 구체적인 수치는 '대외비'라며 언급을 피했으나, 상당한 규모의 동원을 요청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
병력 보충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백번 동감하면서도 집권 여당 '인민의 종'과 주요 야당들은 새 동원법의 비현실성과 후폭풍 등을 들어 공개적으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 나탈루하 의회 경제개발위원회 위원장은 "법안이 채택될 경우 국가 경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이 크게 우려된다"며 반대했다. 그는 "국민 상당수가 국가와의 관계를 아예 단절할 수 있다"며 "그럴 경우, 현금의 대량 인출과 그에 따른 금융시장 마비, 고용시장의 지하경제화, 건강한 여성들의 해외 이주, 내부 물류망 축소 등 경제 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으로 우려했다. 또 “지난해 9월 러시아에서 부분 동원령으로 '엑소더스(해외 탈출) 현상'이 나타났듯이, 우크라이나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사 서비스를 받기 위해 폴란드 남부 크라코프로 몰린 우크라이나 해외 거주민들/영상 캡처
대표적인 야당인사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는 "새 법안을 위헌"으로 규정한 뒤 "검찰과 경찰 등 법 집행 기관에 근무하는 보안군 중 절반을 전선으로 보낼 것"을 제안했다. 동원 연령을 27세에서 25세로 낮추기 보다는 이미 훈련을 받아 무기 사용에 응하고, 싸우는 법을 알고 있는 보안군 수십만명을 전선으로 보내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마르첸코 재무장관도 동원 확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다고 답답해했다. 자금 조달 여력이 모두 소진됐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국방비가 하루 50억 흐리브냐 가까이 지출되는데, 아직도 우크라이나군은 병사들의 호주머니에서, 또 기부금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혀를 차기도 했다.
◇ 벌써부터 새동원령에 대비하는 우크라인들
새 동원법을 피해가기 위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독일과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 해외에서는 영사 서비스를 미리 받으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긴 줄이 며칠째 포착됐다. 새 동원법에 따르면 동원 위반자에게는 여권 연장 등 각종 해외 체류 제한 조치가 가해지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부동산이나 자동차 등 재산을 미리 아내나 어머니 등 징병 대상자가 아닌 여성 등에게 넘기기 위해 공증을 받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동원 거부자는 앞으로 개인및 법인과의 '자산 거래'가 아예 금지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노인용 가면'/사진출처:스트라나.ua
나이를 속이기 위한 '노인 가면'도 온라인에 등장했다. 가격은 1만3,600 흐리브냐(약 42만6천원). 더 자연스러운 얼굴 표정을 만들기 위해 노인 가면에 맞춤 선글라스를 '패키지'로 팔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사고를 이유로 동원을 피할 수 있는 법원의 판결문을 1만 달러에 구입했다는 이야기도 인터넷에 나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