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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내용
+ 찬미 예수님!
3주 연속 우리는 복음에서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듣습니다.
당연히 복음서의 이 빵은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바꾸면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죠. 그 육체가 바로 살과 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육신이 필요로 하는 수없이 많은 배고픔과 굶주림 또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죠 육체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으면 그 궁핍함을 감각적으로 곧바로 느껴요.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배고픈 거 못 참는 분들도 있고 내 몸의 변화를 작은 아픔이라도 견디지 못하는 분도 많잖아요. 그런 것들은 무언가 내 몸을 채울 수 있는 그런 것으로만 채워져요 아프면 약을 먹어야 되고 배고프면 먹거리를 먹어야 되겠죠.
감사할 것은 우리 대한민국이 참 짧은 근대화 과정에서 전 세계가 어느 역사에서도 본 적 없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어서 먹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전문 의료 시스템도 아마 감탄할 정도로 잘 되어있죠. 물론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 아니 우리 사회 멀지 않은 곳에 여전히 굶주림과 궁핍함에 퍼덕이는 가난한 이들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우리 인류는 이미 기아의 문제를 극복했어요.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삶에 가난이 또 배고픔이 있는 이유는 분배 정의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가진 사람들이 나누지 않으면 그 어디선가는 결핍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 육체의 배고픔과 궁핍함은 우리의 마음으로 또 나눔으로 채울 수 있어요. 그런데 정작 내 자신이 겪고 있는 마음의 배고픔 정신적인 빈곤 좀 흔히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영혼의 목마름은 뭘로 채우는가 한번 되돌아보면 좋겠죠. 현대인들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마음이 공허해지면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뭐 술을 실컷 마실 수도 있고 또 오락에 실컷 빠지기도 하고 또 쇼핑 심지어 요즘 젊은 사회에서는 뭐 마약 또 우리나라가 청정국가가 아니란 얘기가 들리죠. 대부분 이 육체를 육체의 감각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중독성이 있는 것으로 나를 채워서 마치 지금의 내가 겪고있는 정신적 문제를 벗어나는 것처럼 착각을 하기도 해요.
그러나 정작 우리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의 병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다시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어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가 생명을 얻지 못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이 살과 피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직접 먹는 일은 불가능하죠. 대인들이 그런 엉뚱한 반응을 한 건 뭐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살과 피를 아주 상징적 의미로 얘기한 거예요. 가령 우리도 살면서 누군가를 막 부러워하거나 누군가 닮고 싶으면 그 사람처럼 되고 싶죠. 근데 그 사람처럼 되려면 그 사람 살을 뜯어 먹거나 그 사람 피를 수혈받거나 뭐 그럴 순 없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선택하는 건 뭐냐 하면 그 사람처럼 옷을 입고 그 사람처럼 행동하고 그 사람처럼 말하는 거예요. 그 사람하고 비슷해지려고 하는 거죠. 이게 외적으로는 어떻게 되냐면 뭐 젊은 아이들이 요즘 아이돌이나 뭐 이렇게 유명 연예인들 막 좋아하잖아요. 또 내가 뭐 사람들 중에 본받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하고 같은 옷을 입어요. 같은 화장을 하고 또 같은 행동을 해요. 요즘 아이들이 누구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닮으려고 하는 건 좀 예수님 말씀으로 바꾸면 그 사람의 살과 피가 되고 싶은 거예요. 나도 저 사람처럼 저런 피부와 살을 갖고 싶고 저 사람이 흐르고 있는 저 피의 기운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자꾸 똑같이 똑같이 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은 이 비유를 그래서 가르치면서 이렇게 풀어주세요.
“너희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너희는 내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를 것이다. 굉장히 정신적인 표현이에요. 머무른다는 건 그 사람의 삶에 내가 들어가는 거야. 예수님이 살과 피의 이 비유 안에는 우리가 그 예수님의 삶에 어떤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를 일깨워주기 위한 예수님의 교육 방식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하신 이 영원히 사는 생명의 빵 그건 도대체 뭘까? 오늘 2독서가 그 해법을 줘요 오늘 첫 번째 들으신 짧은 잠언의 이야기에 이렇게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 지각이 없는 자 그들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내가 주는 것을 먹고 예지의 길을 걸어라” 세상이 주는 빵 우리가 얻고자 하는 수없이 많은 물질적인 욕망들은 채워도 채워도 또 배고파요. 그것은 마치 우리 시대에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지식의 양과 비슷해요. 요즘 유튜브나 여러분들이 뭐 나름대로 자기계발 또 뭔가를 배우고 싶으면 어마무시한 정보들이 이 우리 사회에 쏟아져요 스마트폰 안에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다 있어요. 그런데 그 지식은 배우면 배울수록 끝이 없어요. 끝이 없어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음식 한번 만들어 볼까 내가 뭐 어떤 특별한 걸 개워볼까 하다못해 반려견을 키워볼까 뭔가를 하고 싶으면 그 하고싶은 것에 대한 정보가 거미 무궁무진하게 우리가 그 지식을 다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어요. 더더욱이 지금 인공지능 시대에는 우리가 그런 지식을 쌓을 이유도 이젠 없어요. 그냥 인공지능이 다 대답을 해줘요 그러면 그런 무한하고 끝이 없는 지식을 내가 얻으려고 한다면, 나에게 늘 불만족이겠죠. 아무리 내가 좋은 정보를 갖고 있어도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의 정보화를 이길 수가 없으니까 그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해요. 불만스러워요 만족하지 못해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희는 어리석고 지각 없는 것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어라. 이 예지라고 하는 것은 지식과 다른 지혜의 길이에요. 지혜 우리 믿음은 지식의 영역이 아니에요. 지식은 지혜로 가기 위한 도구는 되지만 지식 자체가 지혜를 만들지 않아요. 좀 쉬운 말로 하면 내가 신앙의 교리와 성경의 지식에 해박하다고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믿음은 하느님에 대한 내 내면적 직접 감각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내 영혼의 목마름에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오늘 이런 말씀을 인제 사도 바오로가 두 번째 독서에서 더 풀어줘요. 그분이 뭐라고 하시냐면 여러분들은 미련한 사람이 되지 마시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단어를 꺼내세요. “시간을 잘 쓰십시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현대인에게 엄청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 우리에게 중요한 시간이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옛 사람들이나 지금이나 이 시간은 굉장히 우리에게 본성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시간이라는 건 사실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까요? 여러분들 시간 그러면 대부분 시계를 떠올릴 거예요. 그죠 근데 시계가 없으면 우린 시간을 어떻게 알죠? 어떻게 아실 것 같아요. 배꼽시계 배가 쪼르륵 꼽구나 졸리면 생체 시계 이런 걸로 아실 수 있을까요? 원래 시간이라는 건 변화를 체험하는 거예요.
변화 그래서 인류가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데에는 자연의 변화 속에 나를 인식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을 하루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달이 지구를 도는 1주기를 한 달이라고 생각했고 태양이 아 지구가 태양을 1바퀴 도는 걸 1년이라는 시간으로 만든 거예요. 시간은 우리 인간이 합의한 거예요. 그리고 그 시간을 굉장히 세분화해서 그 시간을 어떻게 미리 예측하고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준비할 것인가를 우리 인류가 지혜를 통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시간은 마치 우리가 만들어낸 것처럼 생각하는 순간 시간은 우리의 소유물이 되어버린 거죠. 그런데 이 시간은 본신 본질적으로 변화예요.
변화를 느끼면서 우리는 시간을 느껴요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뭔가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면 아후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나 아니면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흘렀나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세월이 이케 벌써 갔나 그건 세월이 간다는 걸 뭘로 느끼냐면 내 자신의 변화에서 느끼는 거야. 내 몸의 변화 외모의 변화 내 주변 환경의 변화 그리고 내 마음의 변화 그래서 세월을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가까운 사람들하고 오랜만에 만나면 우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하나도 안 바뀌었네 오히려 더 젊어졌네 그런 거 있잖아요? 또 대화를 해보면 어머 옛날 모습 그대로야 그 얘기는 뭐냐 하면 나의 변화는 굉장히 민감하지만 상대방의 변화는 내가 과거에 그 사람을 기억했던 모습으로 글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래요. 시간은 변화에 대한 체험이에요.
특히 어르신들이 우리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의 변화가 굉장히 빠르잖아요. 그 아이들이 변하는 게 정말 쑥쑥 키가 자라는 걸 보면 깜짝깜짝 놀래요. 저도 어린이 미사 아이들하고 벌써 3년 4년째 하다보면, 초등학교 1~2학년 3~4학년 애들이 막 쑥쑥 자라는 게 보여요. 그러면 그 아이들을 보면서 “와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네. 너 이렇게 변했어.” 이렇게 말을 하죠. 그런 변화가 우리에게는 시간을 체험하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시간은 항상 지금 내가 무엇을 체험하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우리 현대인들은 그래서 시간을 하나의 3등분으로 나누기를 좋아해요. 과거 현재 미래 그런 엄밀한 의미에서 과거는 없어요. 과거는 우리 기억 속에 있는 거예요. 과거는 시간의 기억이 지금 현재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거예요. 현재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미래가 와요. 근데 우리는 마치 당연히 미래가 올 것처럼 생각하고 과거는 언제나 남아있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런데 여러분들 어르신들 부모님들 치매 걸리셔서 과거를 잊으시면 어때요? 과거는 없어요. 그분에게는 과거의 기억은 나에겐 있지만 그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과거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과거를 기억하는 이유는 지금의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요. 과거에 내가 큰 실수를 했거나 큰 아픔을 겪었으면 그 아픔을 미래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 내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를 과거의 기억이 나를 도와준 거예요. 그럼 정말 중요한 건 뭐예요? 매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지금의 순간이 굉장히 중요한 거야.
너무 무거우니까 우스갯소리로 그런 얘기 많이 들으셨겠지만, 어떤 분이 이 좋은 얘기를 듣고 인생에는 3가지 좋은 금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황금 소금 지금 이걸 너무너무 감동해서 아내한테 얘기했더니, 아내가 대답했다죠. 나에게 필요한 3가지 금이 있어. 현금 입금 지금! 제일 현실적이잖아요. 뭐 지금 그러면 황금 타령에 당장 내가 필요한 생활비 집어넣어 이런 얘기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체험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기억 속에 있는 내가 지금의 나와의 차이를 느낄 때 그 차이를 앞으로 미래의 시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시간 속에 산다는 건 끊임없이 내가 앞으로도 어떻게 되어 가야 할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에요.
그럼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로 먹고 살아야 된다는 말은 예수님의 삶 그분의 시간에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분이 어떤 시간을 살았는지 그분은 끊임없이 당신의 소명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이 되도록 늘 기도하셨고 늘 표징을 찾으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면서 그 시간의 충만함을 지금 여기서 가르치신 거예요. 그래서 많은 병자들이 구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치유를 원할 때 예수님은 항상 같은 말을 하세요.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회개하는 지금 여기 하느님 나라가 너에게 가까이 와 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시간 넘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 완성되는 것임을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건 뭐 내가 조금 여유가 있고 좀 생활에 좀 덜 스트레스가 있을 때 그때 하느님을 믿겠다가 아니라 하느님을 지금 여기서 내가 받아들이려고 할 때 나에겐 변화가 생기는 거예요. 그것이 시간의 충만함이에요. 시간의 두 번째 중요한 우리들에게 메세지는 시간은 선물이에요. 제가 고해소에서 오랫동안 냉담하고 오신 분들이나 또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하다가 끊고 다시 오시는 분들에게 꼭 하는 말이 있어요. 시간은 마치 내게 주어져서 내 것인 양 소유하는 것처럼 우리 현대인들은 생각해요. 그래서 시간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막 시간을 뭘로 채우려고 해요.
그리고 채우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주려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 제일 하는 말이 어 시간 없어요. 바빠요 저도 가끔 그런 얘기 듣는데 어 시민이 너무 바쁘셔서 죄송한데요. 그런 얘기들 신자분들이 저한테 많이 해요. 근데 저 혼자 솔직히 생각하면 내가 뭘 바빠 나도 내가 할 거 다 하고 내 시간 다 보내는데 그리고 보통 우리가 바쁘다는 말은 그 시간을 내가 채우기에도 바쁜데 당신에게 내 시간을 내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1번 조금 돌이켜 보면 시간은 내가 단 한 순간도 만들어낸 건 없어요. 그냥 주어진 거죠. 선물처럼 그 주어진 선물 같은 시간을 내가 어떻게 사는지가 되게 중요해요. 그 시간에 대한 예수님의 체험은 매 순간순간 감사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은 언제나 큰 기적을 하시거나 군중들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이른 새벽 산에 들어가서 밤새워 기도하셨다고 그래요. 그분은 늘 하느님께 지금의 나에 대한 감사를 시작으로 시간을 시작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 시간이 하느님께 받은 시간이기 때문에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기 위해서 당신의 전 생애를 사셨어요.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 모든 시간을 본래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것을 봉원하신 거예요.
우리가 시간이 주어진 선물이라면 당연히 감사하고 감사한 것은 그 누군가에게 그것을 나눌 때 더 충만해져요 만일 그 시간이 하느님께 받은 시간이라면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이 미사에 참여해서 미사를 봉원하는 이 시간은 가톨릭 신자로써 고해성사를 받지 않기 위해서 채워야 될 의무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느님께 받은 이 시간에 감사하는 찬미의 시간이죠. 그리고 기도를 하는 시간이든 내가 누군가를 돕든 작은 희생과 선행을 하는 것도 내가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시간은 누군가를 위해서 봉헌될 때 그 시간이 나누어질 때 본래 시간을 주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삶이 바뀌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라는 상징적 의미가 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없는 현대인들에게 나만의 시간을 주는 것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웃을 수 있고 용기를 얻고 삶의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가 받은 시간은 충만하고 또 그 안에서 나의 변화는 이루어지고 또 하느님께 감사의 시간으로 바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로의 권면은 우리 현대인들이 시간을 소진하고 또 탈진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메세지가 될 수 있어요.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 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아멘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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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희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내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