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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묵상글 들 ( 연중 제8주간 월요일. - 떠나 감, 향해 감, 따라 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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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떠나 감, 향해 감, 따라 감.
오늘 부자 청년과 주님과의 대화 결과는 어찌보면 상당히 엇박자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주님의 답은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할 것이 뭔지 물는 청년에게
할 것은 달리 없고 그저 당신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한가지 부족했던 것은 주님을 따름이었던 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할 것을 물었을 때
주님께서 해야할 것을 말씀 아니 한 것은 아니고,
십계명의 일부를 지키라고 그에게 하셨지요.
그런데 그 십계명의 일부가 바로 이웃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제4계명에서부터 제10계명까지 그러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에서부터
살인이나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이나 횡령하지 말고, 횡령하지 말라는 것까지.
우선 이런 이웃 사랑에 관한 것을 잘 실천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그가 잘 실천해왔던 것이고 그래서 주님도 그런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한가지가 부족했고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하느님 사랑 부분인데
문제는 그것을 십계명 그대로 말씀하지 않고 비틀어서 말씀하신 겁니다.
만일 십계명 그대로 한분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며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으면 그는 그것도 다 잘 지켰다고 했을 텐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말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비틀어 말씀하신 거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를 때
그것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라는 말씀이었고,
그럴 때 주님을 따라 하늘의 하느님께 갈 수 있으며,
그럴 때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많이 얘기하는 만유 위에 하느님 사랑이요 하느님 나라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들과 이웃 사랑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만 필요한 것이고,
이웃 사랑을 십계명대로 잘 실천할 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필요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시작할 수는 있지만
완성할 수는 없고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끌고 하늘로 오르셔야 하며
끌고 오르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인데
우리는 부자 청년처럼 하늘로 오르는 것을 마다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제가 수없이 얘기한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감'이 필요합니다.
'떠나 감’
'향해 감’
'따라 감’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로 가되
반드시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주님은 그 길을 잘 아실 뿐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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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2월 28일 월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선’의 정의
‘선’이란 ‘있는 분’과 똑같습니다. ‘선’의 반대는 ‘악’ 또는 ‘사악함’입니다. ‘있는 분’의 반대는
‘있지 않음’입니다. 그렇다면 ‘악’이나 ‘사악함’은 ‘있지 않음’입니다. 악마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에페 3,9 참조). 시실 악마는 하느님의 작품이 아니지만, 악마가 된 자는 창조된 존재이며 피조물이라는 점에서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피조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살인한다는 점에서 살인자는 하느님의 작품이 아니지만,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그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부인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리게네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내 영을 너희 안에 두리라!”
지금까지 에제키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독서에 관한 세가지 패러다임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에제 3장-거룩한 책의 환시:
거룩한 독서는 음식-먹기다.
에제 37장 - 바싹 마른 뼈들:
거룩한 독서는 독자가 성령께 유순히 귀를 기울임으로써 이루어지는 의미의 부활이다.
에제 1장:
성경은 일종의 차량이다. 주석학의 움직임은 삶의 움직임에 관련되어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미드라쉬의 방식으로 읽은 성경 자체를 통하여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할지 알게 되었다.(83)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2월 성령 열매성월 4주간 사랑 / 평화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9-12장
✝️ 1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마태 10,34-42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버림과 따름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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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에페소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난민을 위한 기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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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 청년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 질문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하지만, 부자 청년의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을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당신의 사랑이요, 당신의 선물입니다. 또한 타인과는 무관한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을 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대답은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고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율법을 지켰으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 했습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 자신의 결백을 넘어서, 오히려 자기 나눔과 선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한편, 이어지는 제자들의 의혹, 곧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의문은 앞의 부자 청년의 질문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에 대한 의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이는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자기 자신의 행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선사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떠나왔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느냐?” 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떠나온 이들입니다. 그러나 떠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집과 고향을 떠나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렇습니다. 이제는 이미 떠나온 자기마저 버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수도자인 우리는 이미 집과 부모를 떠나왔지만, 떠나온 자신을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떠나왔다면, 오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안전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넘기고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마르 10,21)
주님!
약하지 않으려함이 제게는 부족함입니다.
부족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입니다.
약할 줄을 알고, 부족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하고 부족한지라,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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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 하시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생활공간도 컨테이너로 꾸민 한 칸의 방이 전부입니다. 그 방은 주방이고 침실이며 기도방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시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평일 미사참례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봉투하나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난방 기름을 절약하고, 쓰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모은 돈이라고 하시며 꼭 필요한 곳에 써 달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적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돈은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가지를 선택할 시점이 옵니다. 그리고 선택합니다. 이때야말로 그 사람의 진면목을 봅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선택한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차선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을 본인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잘 지켰는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하나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의 보화 때문에 하늘의 보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실 천상의 보물을 우리 내면의 보물로 삼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준비로 집도 장만하고 값비싼 보석을 비롯하여 혼수품을 다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였는데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영생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다른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아름다운 보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하나를 채워서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나에게 부족한 하나는 무엇일까? 자존심일 수 있고 체면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일 수 있고 명예나 지배하는 마음, 자식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의 마음이나 눈먼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허영의 우상숭배, 교만의 우상숭배, 돈의 우상숭배에서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안락함의 문화와 일시성의 매혹”이 강한 이 시대에 부족한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 하나는 구원은 내가 충실히 덕을 쌓아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용기 있게 믿음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이 함께할 것입니다. 자선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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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달려온 그는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병을 고치거나 배불리 먹는 일 따위에만 관심을 보이던 여느 중생과는 사뭇 다른 구도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십계명을 지키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유복한 바리사이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은 젊은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대견스럽게 여기시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이였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킬 정도의 도덕성을 자부했던 그가 재물에 대한 집착도 심해 보여서인지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보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이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 돈을 좋아했던 유다교의 엘리트 계층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루카 16,14). 평소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빼먹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려는 것과도 같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회개한다는 것이 삶의 태도에서 과연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고, 재물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던 바리사이들의 신앙관에 물들어 있었던 듯합니다.
여기서 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외적인 인물이 있으니,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처럼이나 힘들고 중요한 일을 해 낸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입니다(루카 19,1-10). 그는 자신의 집을 찾아주신 예수님 앞에서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공적 기피인물로 따돌림 받던 그를 예수님께서 받아주시자 벌어진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 진정으로 귀의한 사람에게는 가능하다는 예수님 말씀이 입증된 셈입니다.
예수님부터 재물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우셨거니와(마태 8,20), 제자들에게도 집과 직업과 가족까지도 모두 버리고 따르기를 요청하셨습니다(마태 4,20.22). 그들을 전국으로 파견하실 때에도 마찬가지로 철저한 청빈의 태도를 요청하셨던 이유는(마태 10,9-10), 그렇게 하더라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토박이 지지자들이 그들을 환대해 줄 것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 10,11).
이렇듯 재물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태도와 가르침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낳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고”(사도 2,44),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습니다(사도 2,45).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사도 4,34).
이것이 예수님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교회가 걸었던 정통 노선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그 부자 청년이 처음에 그분을 부른 호칭은 “선하신 스승님!”(마르 10,17)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그 당시 유다교에서 최상급에 속하는 인물이 행해 온 선행의 허접한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유복하게 살면서도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은 외면하던 그 사람, 그래도 자신들은 의롭고 선하다고 자처하면서 영원한 생명까지 얻어 누리려던 이 부자 청년의 처지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문명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하느님의 선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많은 현대인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양심에 입각한 도덕성만으로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귀가 소유욕을 미끼로 해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도 이러한 어중띠기 인생들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재물의 결핍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려면 소유욕을 미끼로 유혹하는 마귀와의 고리를 끊어내고,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1베드 1,3-4). 그러니까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부활 신앙이고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는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이 입증해 보였듯이, 하느님을 믿는 이들끼리 부활 신앙으로 서로 나누는 삶이 그 해답입니다. 교우 여러분! 재물에 대한 집착은 우상 숭배에로 우리 마음을 기울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나눔 이전에 우리를 하느님께로 불들어 매어 줄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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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신유빈 선수와 룩셈부르크의 니시아리안 선수의 탁구 경구였습니다. 신유빈 선수는 2004년생, 니시아리안 선수는 1963년생으로 자그마치 41살의 나이 차이였습니다. 결과는 신유빈 선수가 이겼지만, 니시아리안 선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어요.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즐기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어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즐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포기할 이유는 없어지고 맙니다. 즉, 포기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즐길 이유를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많은 이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지루해서, 분심이 많아서, 돌 볼 가족이 있어서…. 그러나 신앙생활은 즐기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에서 갖는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올바르고 독실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그를 보며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지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인간의 윤리 생활은 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지 않는 것만으로는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완전해지려면 가진 것을 가난한 이에게 줘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자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부자 청년도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것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재산의 풍요로움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무조건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도 하느님의 창조물로 하느님께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고, ‘부’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 요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는 생명 유지와 사랑 실천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을 버린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재산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걸림돌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짓는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죄를 자기 마음대로 멈추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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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창피하면 어때? 실패했다는 건 도전했다는 뜻이니까(우미노 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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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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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눈이 내리는 것은 자연현상입니다. 하지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첫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에게 내리는 눈은 하느님의 축복일 것입니다. 예술 하는 사람에게 눈은 작품에 영감을 주는 선물일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눈 내린 마당은 신나는 놀이터가 될 것입니다. 적당히 내리는 눈은 제게도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10인치 이상 눈이 내리면 장난이 아닙니다. 신문사 마당의 눈을 치워야 차가 다닐 수 있습니다. 신문사 앞의 길에 쌓인 눈을 치워야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옆 본당의 신부님이 눈이 많이 내리면 눈 치우는 장비를 가져와서 마당의 눈을 치워 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대부분의 집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눈을 치워 놓습니다. 하지만 휴가를 갔거나, 여의치 않은 집은 눈이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쌓인 허물과 죄를 깨끗이 치워야 합니다. 내리는 눈은 보이기 때문에 치울 수 있고, 이웃을 위해서 치워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쌓인 허물과 죄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방치하기 마련입니다. 허물과 죄로 무거워진 마음은 하느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눈을 치우기 위해서는 장비와 삽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쌍인 허물과 죄를 치우기 위해서는 10 계명이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10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은 깨끗해진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10계명은 해야 할 것이 3가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7가지 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주일을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해야 할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거짓 증언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10계명 중에 2가지가 연관된 것들이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욕망은 간음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도둑질 하지 말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두 가지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큰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이성에 대한 욕망 때문에 충실한 부하인 우리아를 죽게 하였습니다. 아합 왕은 욕심 때문에 나봇을 죽이고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인간을 비참하게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욕망과 욕심이 만들어낸 죄와 죽음입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있습니다. 욕심의 덫에 걸려 평생 이루어 놓은 명예가 무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에 대한 욕망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욕망과 욕심의 유혹이 크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며칠 전에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대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문자를 받으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나의 꿈은 무엇일까?’ 주교가 되는 꿈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더 높은 자리, 권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게 문자를 보낸 분은 ‘자신의 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은 자라고, 이런저런 봉사를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꿈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꿈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모든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내가 가진 꿈은, 결국 내 삶이라는 에너지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불로 단련을 받는 아름다운 금을 봅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들에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한 시간들은 아름다운 과거가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할 시간은 희망찬 미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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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옛 사막 스승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질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잘 보면 잘못된 질문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을 해서(to do)’가 구원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to be)’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이웃사랑의 계명을 다 지켰는데도 가슴의 허기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부자입니다. 예나 이제나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는 구도자들의 궁극의 관심사입니다. 부자의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한 주님의 정확한 충격적인 처방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어려운 요구입니다. 과연 주님의 이 말씀에 응답할 부자가 얼마나 되겠는지요! 참으로 재물의 환상, 우상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이처럼 힘듭니다. 정말 세상의 보물은 가짜요 하늘의 보물이 진짜인데 부자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정말 부자는 많은 재물을 지닌자가 아니라 최소한의 소유로 만족한 자입니다. 이래야 재물욕의 탐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자는 주님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어 주님을 떠나 자기의 길을 갔고 이후의 반응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지지만 아마도 부자의 내적 각성覺醒에 부단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후에 주님을 찾았을 지도 모릅니다. 분명 예전의 부자와는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한계를 알아 더욱 겸손해졌을 것이며 부단히 나름대로 구원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점입가경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자는 구원받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아니 불가능하다는 말씀에 거듭 놀란 제자들의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너무나 당연한 절박한 반응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이 우리에게는 참 다정한 위로가 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 마디로 하느님께는 부자의 구원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가난하다하여 무조건 하느님 나라 입성의 구원도 아닐 것이며, 부자라 하여 무조건 하느님 나라 입성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유로부터의 자유가 그 관건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들에 대한 증오와 불만으로 가득하다면, 부자가 소유의 노예가 되어 참으로 빈자들을 무시하고 인색하다면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힘들 것입니다.
말 그대로 회개의 은총이 절대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은총으로 참으로 재물의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때,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며 이웃에 자선을 베푸는 자비로운 부자라면 하느님 나라의 구원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지족知足할 수 있다면 구원입니다.
사실 우리가 잘 나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입니다. 사실 잘 나서 구원 받기로 하면 세상에 구원받을 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이 없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탐욕의 유혹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만 이런 극단적인 처방이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선적인 일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라’, ‘나를 믿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장은 모두 버리고 나눈 후 주님을 따르지는 못할 지라도, 제 삶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날마다 제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으로 비우고 나누며 주님을 따른다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회개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계명 조항을 지키는 일이 나무만 보는 경우라면 주님을 따르는 일은 주님의 시야를 지니고 숲을 보는 경우입니다. 계명 준수로 만족함이 유치원 수준의 믿음이라면 주님을 따르는 일은 대학원 수준의 믿음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고 주님을 따르게 할 것이며 더불어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점점 사랑의 나눔과 비움도 함께 할 것입니다.
참으로 최고의 보물인 주님을 사랑하여 모실 때 세상 재물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주님 보물 앞에는 세상 재물도 빛을 잃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이 깊어질수록 세상 것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제1독서의 베드로가 이의 모범입니다. 희망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베드로입니다. 참으로 이런 참희망이신 하느님을 모실 때 자유롭고 행복하고 내적으로 부유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궁극의 답을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줍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구원의 희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희망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선물 앞에 세상 재물은 얼마나 덧없고 초라해 보이는 지요! 저절로 빛을 잃습니다. 사실 건강 잃고, 또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면 이런 세상 재물들은 아무 쓸모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의 탐욕으로 인해 헛것들의 우상에 빠져 살아가는 얼빠진 대부분 부자들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천둥같은 말씀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백배, 이탈의 사랑으로 더욱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초대교회 교우들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견주어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왜소하고 약하고 오염된 난장이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이요, 감사요, 기쁨인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께 열렬하고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둘 때 저절로 세상 탐욕으로부터 이탈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나누고 비우며 주님을 따라 홀가분하게 초연한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린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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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던진 질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달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그에게 절박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는 일을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았고, 이를 위하여 일평생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에 기록된 계명들을 충실히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한 가지 부족한 점을 말씀하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런데 그는 이 말씀을 듣고서는 지금껏 품고 살아온
간절한 희망을 단념이라도 한 듯, 울상이 되어 떠나버립니다.
그에게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신앙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만큼 중요한 문제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우리 곁에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수중에 놓인 것, 자기 소유라 여겨지는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싶어하는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은 신앙인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그 어떤 것도 구원으로 향하는
좁은 문으로는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 움켜쥐려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그토록 바라던 구원을
결국 재산 때문에 포기해 버린 사람처럼 말입니다.
오랜 기간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손에 쥐고 쉽게 놓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오늘 하루 진지하게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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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부자 청년의 이야기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율법을 잘 지켰다 해서 교만해진 젊은이가 율법의 주님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한 채 행동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젊은이는 믿음이 없이 율법만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절) 하셨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여겨 그렇게 불렀다면 ‘선하다’라는 표현을 거절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생명으로 나아가고 싶거든 계명들을 지켜라. 고약한 악의와 사악함을 버려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 ‘마른 땅’(느헤 9,11; 시편 66,6)이 드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19절 참조)이 싹트게 하라고 하신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20절)고 그는 대답하였다.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킨 것처럼 보이던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다. 계명들을 잘 지켰다고 하는 그의 대답은 진실이라기보다 교만이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짓눌리는 일이 없이 높이 솟아오르는 가벼운 날개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친구나 친척이나 가족이나 아내나 자녀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주리고 하신다.
주님은 하늘의 보화를 열어 주시면서 선의 책무를 실현하셨고, 몸소 거기에 이르는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자 청년은 떠나갔고,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욕심에 묶인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 자기 탐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져서 말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부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의미한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재물이라는 말 자체가 ‘소유하다’라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이차적인 선(善)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채워 나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면서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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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
가난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일깨워주는
참 좋은 스승입니다.
우리는
삶을 나누어 먹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처음부터
내것이란 없습니다.
나와 너가
함께 살고 있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나누지 않고서는
기쁠 수 없고
주지 않고서는
주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곳은
우리의 재물이 아니라
삶의 구원자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너무
커져버리게 한
욕심을 반성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부여잡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며
숨기는 것이 아니라
깨어지는 것입니다.
나누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 맡길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도
재물걱정을 하는
우리의 두 얼굴입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다시 보는 은총의
시간되십시오.
가난한 영혼의 노래가
우리 마음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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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낙타가 바늘귀로』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7-18)”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특별히 실천해야 할 율법이 무엇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특별히 실천해야 하는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주 토론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당신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었고, 그냥 ‘랍비’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불렀는데,
당시에는 ‘선하신...’이라는 호칭은 하느님께만 사용하던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너는 나를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
왜 그런 호칭을 사용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사람이 달려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어 했다는
뜻일 뿐이고, ‘절박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마르 10,19)”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특별히 실천해야 할 율법이나 계명은 따로 없다.
네가 알고 있는 십계명을 잘 실천하면 된다.”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0-21)”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말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는 그의 말을 인정하셨다는 뜻이고, 또 그가 위선자가 아니고,
진실하고 경건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의 십계명 실천에는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크다는 것, 그것이 그의 부족한 점입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즉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는
어린이 같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재물의 힘으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자기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현세의 재물, 그 두 가지를 모두 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 때문에
울상이 되어서 슬퍼하며 떠났는데, 그가 재물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포기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는 평생의 숙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뒷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재물에 대한 그의 애착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을 믿기가 싫어서 떠난 것은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우이웃 돕기도 잘했을 것입니다.
(물론 재산이 축나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나 재산을 전부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는 너무나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앞의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마실 물 한 잔’의 선행으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 같은데,
왜 꼭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만 하는가?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모순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소유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물 한 잔’을 주는 것도 아까워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버렸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람마다 모든 것을 버린 시점이 달랐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어떤 결정적인 시간이 왔을 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아도, 어차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1티모 6,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로 삼고 싶어서
사도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요구를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어떻든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은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그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면 바늘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가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낙타라고 해도, 회개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변화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하면,
누구나 바늘귀 같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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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 언뜻 생각하면 부자들을 강력히 질타하고 경고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위 말씀은 반대로 부자들을 격려하고 도와주며,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인도하는 사랑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평생토록 노력하고 또 노력한 끝에 엄청난 부를 축척한 부자들 가운데 참으로 불행한 부자들을 자주 봅니다. 혼자, 혹은 가족들 전체가 펑펑 써도 백 년 이상 쓸 엄청난 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이 영원히 살 것으로 여깁니다. 남은 세월은 길어 봐야 십 년, 이십 년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 막대한 재산에 영원히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으려니 생각합니다. 그 막대한 재산 십분의 일만 쪼개서 극도의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쫄쫄 굶주리는 이웃들, 쓸쓸하고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청년들 위해 관대하게 희사 좀 한다면 참 좋으련만, 죽었다 깨어나도, 단 1도 그런 마음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아까운 재산 남겨두고 가려니 어디 눈이나 제대로 감기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자라고 다 같지 않습니다. 참으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부자들을 만납니다. 부를 축척하기까지 겪었던 힘든 시절의 고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가련한 사람 만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자자손손 축복하실 부자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부자를 다 한꺼번에 싸잡아 경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근면 성실하고 정직하게 재산을 모은 부자들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축복과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태산같이 재산을 축척하지만, 땡전 한 푼도 나눌 줄 모르는 부자들, 자신의 재물을 일종의 권력으로 여기면서, 없는 사람들을 내리누르고 경멸하고, 갑질을 일삼는 부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부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초강력 경고 메시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클레멘스 교부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은 재산을 지니기만 하면 그것을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신앙을 지니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부자들을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그 힘센 마력으로부터 돌아서서 주님만을 찾으며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재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 말씀 앞에 부자들께서는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부자로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는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면 됩니다. 고민과 성찰 끝에 도출해낸 결론에 따라 관대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면 됩니다.
저는 사목자로 살아가면서 참으로 멋진 부자들을 많이 만납니다. 최선을 다해 맡은 일에 충실합니다. 남들 다 가는 해외 여행 한번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으고 또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부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분들의 삶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과 동시에 큰 존경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부자의 모습입니다.
부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지나가는 재물보다 주님의 계명을 더 추구한다면, 주님께서는 부자들을 결코 구원의 대열에서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들의 구원을 가로막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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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부자'의 의미
영국의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 어느 날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말고
한숨을 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고, 5파운드만 있으면... 5파운드만...”
이 소리를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5파운드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힘내라며 5파운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더 큰 한숨소리가 들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 걸... 10파운드라고 할 걸...”
우상은 내가 지배를 받는 대상이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내가 섬기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하느님의 뜻이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대로 할 수 없다면 그 재산은 나를 지배하는 우상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섬기는 우상이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분명 양심에서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그 목소리가 진리이고 그게 옳은 일음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 소리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산이 그 자신의 것이고 그래서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섬기는 대상, 즉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옳은 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서게 되었을 때 ‘슬픔’이 옵니다.
감옥에 갇혀서 기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이집트의 노예 살이 할 때처럼
자유를 빼앗기고 지배를 받아 우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위에는 하느님의 뜻 외에 어느 것도 두지 말아야합니다.
스스로 노예가 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는 ‘어떤 농구 시합’이라는 소제목으로 이런 어린이들의 가슴 따듯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케빈’이라는 아이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부족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어린이 농구팀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농구팀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케빈이 속한 농구팀은 경기에 나가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케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케빈은 계속 슛을 연습했습니다. 한 번은 공이 골대를 스쳤습니다.
케빈은 너무나도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케빈이 속한 농구팀의 마지막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상대는 어린이 농구팀 중에 한 번도 저 본 적이 없는 가장 강한 팀이었습니다.
예상대로 3쿼터까지 점수는 30점차 이상 벌어졌습니다.
마지막 4쿼터도 거의 끝나갈 무렵 케빈이 속한 농구팀의 한 아이가 타임을 불러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영문을 모르는 감독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지금까지 경기해 오면서 케빈은 단 한 번도 슛을 성공시킨 적이 없어요.
이번이 마지막 경기입니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도 없으니 케빈에게 한 번만이라도
슛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죠.”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동료들은 케빈에게 평소에 슛 연습하던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을 잡으면 케빈에게 무조건 패스를 하였습니다.
케빈은 계속 공을 던졌지만 골대를 맞추지도 못하고 오히려 상대팀에 빼앗겨 점수 차는 점점 벌여졌습니다.
그런데 상대팀 한 아이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를 채고는 자신이 몰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케빈에게 공을 패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케빈은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골대 밑에 있던 상대팀 선수가 공을 잡아 다시 케빈에게 패스하였습니다.
역시 성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양 팀 선수들은 서로 뒤섞이어 케빈을 둥그렇게 둘러싸고는 공을 계속 케빈에게만 던져주었습니다.
경기 마칠 시간이 다 되어 갔지만 역시 케빈은 골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감독님은 전광판 시간을 보았는데 시간은 40초를 남겨놓고 멈추어 있었습니다.
심판들도 이 상황을 눈치 챈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장시간 노력한 끝에 케빈은 생애 첫 골을 성공시켰고 모든 이들은 케빈과 함께 기뻐 뛰었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가던 모든 사람 중 우울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승부욕도 있었겠지만 케빈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좋은 마음에 모두가 동의하였습니다.
그렇게 승부의 우상에게 억눌리지 않는 자유로운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아이들에게 승부의 우상을 심어주는 것은 어른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목소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나라의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선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부자’라고 말씀하시고, 그 부자들은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곧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걱정되고 두렵고 우울하다면 우리는 무언가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슬픈 마음으로 돌아간 부자청년처럼 되지 말고 자유롭게 그분 뜻을 따를 수 있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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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8 주간 월요일-묵상과 기도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썩고 시들지 않은 하늘 나라의 상속재산을 주셨다. 신자들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 고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생활을 잘하는 부자 청년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베드 1,3-9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마르 10,17-27
실천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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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과연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최종 관문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생각하게 하는 묵상이 될 수 있습니다. 부자청년은 오늘날로 보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켰다고 고백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나머지 그 생각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의도로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보시면 어떤가요? 먼저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것 자체가 기특하다고 생각하시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이 사람에게는 부족한 게 하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재물을 나누는 자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일까요? 그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부자라고 하면 재물을 많이 가진 것만을 가지고 부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부자를 바라본다면 오늘 복음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하면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부자에 대한 인식과 예수님께서 인식하는 부자에 대한 인식이 상이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묵상한 바로는 예수님이 인식하는 부자는 단순히 재물이 많은 사람을 부자로 보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진 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과 함께 우리는 과부의 헌금을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지 잘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제가 뜬금없이 과부의 헌금을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물질을 이야기할 때 과부의 헌금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과부의 헌금이 말하는 본질은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금의 액수보다는 그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과부의 헌금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간혹 잘못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은행에 돈을 예탁할 때 은행을 신뢰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예금한 금액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이 없다면 은행에 예금을 예치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사실을 오늘 복음과 연관시켜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설령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자선을 하는 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최종적인 관문이 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울상이 돼 슬퍼하며 떠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부자이지만 하느님께서 보시는 부자는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물질도 세상 은행처럼 그런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인색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확실하게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재물을 하느님을 위해서 내놓다는 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재물에 대해 가지는 인식을 좀 달리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면서 재물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재물도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재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많은 재물이 있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점을 강조하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쌓아놓은 재물은 이 세상에서 살 때만 재물로서의 가치가 있지만 그걸 하늘에 쌓아놓으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마치 은행에 예치한 것처럼 하늘나라에 보물로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물질적인 봉헌으로 믿음을 절대적으로 평가는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양만큼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말해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럴 때 이런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인용하는 말씀이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건 과부의 헌금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누카복음 12장 34절에 나오는 말씀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에 나오는 보물은 과연 우리가 아는 그런 보물의 개념일까요? 이건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물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헌금봉헌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세상이 말하는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봉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저희 본당에 교무금을 제일 많이 내는 자매님이 계십니다. 사실 제가 영세를 받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저희 본당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매님이 온전한 십일조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인간적인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이분 역시도 온전한 십일조를 한다고 해서 결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해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십일조를 하는 그 믿음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누카복음 12장 34절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내가 하느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큼이나 하느님께 물질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까워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로만 봐서도 그 자매님의 교무금을 보면서 그 자매님의 믿음에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자기가 사는 범위 밖의 재물은 더 이상 재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인식과 함께 그 재물이 더 훌륭한 재물이 될 수 있게 되려면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 잘 묵상해본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물질을 바라봐야 할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하늘나라에 가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땐 이미 버스는 지나간 것입니다. 그때 세상에서 살 때 좀 더 하늘나라에 보물을 더 많이 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이 세상에 살 때 열심히 하늘나라에 우리는 보물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이 보물은 단순히 물질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만 국한해서 생각한다면 물질이겠지만 우리는 더 넓게 본다면 이 세상을 살면서 하는 선행도 포함될 것입니다. 남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하늘나라에 쌓는 보물이 될 것입니다. 어쨋든 우리는 이런 보물을 많이 쌓아야만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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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제1독서 (1베드1,3-9)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와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7)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단어는 '순수성'으로 번역된 명사 '도미키온'(dokimion)과 '단련을 받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동사의 분사형 '도키마조메누'(dolimazomenu)이다.
여기서 이 명사와 분사의 어근은 동일하며, 금, 은 등의 광석이나 동전 등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불로 단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어근에는 불에 집어넣는 단련과 그 단련 속에서 순수성(가치)이 입증되었다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금에 비유하고 있다. 금은 원래 자연 상태에서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돌 속에 소량 섞여 존재한다. 금광에서 채굴된 금이 섞인 돌을 용광로에 집어 넣게 되면, 거기에서 순금이 분리되어 나온다.
즉 자연 상태의 금광석에서 순금을 채취해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뜨거운 용광로에서의 제련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그들을 불 같은 단련의 도가니에 집어넣으신다.
생명도 없고 또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금도 순금으로 나오기 위해 불로 단련을 받아야 한다면, 하느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정금같이 나오기 위해 불 같은 단련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단련은 믿음의 순수성을 입증해 주는 참으로 고귀한 시련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을 통과해서 깨끗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단련된 성도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하느님의 시험의 목적을 언급하면서 수신자들에게 모든 시험들을 이겨나갈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복음(마르10,17~27)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1)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여기서 '부족한 것이 있다'에 해당하는 '휘스테레이'(hysterei; lack)는 '휘스테레오'(hystereo) 동사의 현재형이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계명을 다 지켜 왔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예수님께 자신있는 말투로 대답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계명들을 다 지켰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현재형 동사로 사용해서 지적한 것이다.
동사 '휘스테레오'(hystereo)는 생활 형편과 관련해서 '부족하다', '모자라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부자 청년은 물질적인 부족이 없었기에, 이 '부족'이라는 단어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생소한 단어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물질로는 풍요로와도 그것은 진정한 풍유로움이 아니며, 오히려 부족함이라는 사실을 그의 허점을 찔러 지적한 것이다.
마르코 복음 10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4~10계명만을 언급하셨다.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 사랑과 관련된 것으로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가야 할 수평적 사랑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준수한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 내면적 순종에 따른 진실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부자 청년이 집착하고 있었던 물질과 관계된 표현을 사용해서, 그의 부족한 것이 내적 순종에서 비롯되는 진실된 사랑과 자기 희생임을 깨우치시는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여기서 '바늘귀'에 해당하는 '트뤼페마토스 라피도스'(trypematos raphidos; the eye of a needle)를 예루살렘 성(城)에서 주로 밤에 이용되던 속칭 '바늘귀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문은 입구가 너무 좁고 낮아서 낙타가 걸어서는 통과할 수 없으며, 짐을 지고 있을 때에는 더 그러했다.
따라서 낙타는 모든 짐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은 채 이 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워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두번째로 '낙타'에 해당하는 '카멜로스'(kamelos; a carmel)을 '밧줄'을 의미하는 '카밀론'(kamilon)으로 이해하는 입장인데,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더 쉽다'에 해당하는 '유코포테론'(eukopoteron; easier)은 비교급인데, 이 비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으로 이끄는 가난과 의탁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최대의 존경심을 드러내면서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0,17)라고 묻습니다. 그 부자는 하느님 나라(마르 9,43-47 참조) 곧 종말 구원을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하느님의 계명 외에 다른 조건을 내세웁니다(10,19-21). 곧 예수님을 추종하려면 먼저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 요구는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보충이나 보완이 아니라 그 부자에게 하느님의 뜻을 열어주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곧 소유의 포기가 예수님을 추종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계명을 실천하는 것(행위)만으로는 부족하며, 가진 것을 다 팔아(무소유의 상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지요.
예수님을 추종하려면 스스로 가난해져서 지상의 소유에 위안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예수 자신과의 인격적인 유대를 맺어야만 합니다(8,34-38 참조). 그런데 그 부자는 예수를 추종하느냐 아니면 재물을 소유하느냐의 갈등 속에서 결국 추종을 거부하고 재물을 택했습니다(10,22). 삶의 기반, 자신을 지지해주는 기반을 하느님께 두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그 부자는 물욕 곧 재물의 마력에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그의 선택은 명백한 방향착오였슺니다. 그는 존재가 아닌 소유를 선택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되고 이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초래하고야 만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방향착오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를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거듭 강조하십니다(10,23-24). 그분께서는 재물 속에 구원을 가로막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재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부자가 구원받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도 더 불가능하다고까지 하십니다. 물론 재물 말고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많지요.
어떤 이는 무엇을 하고 성취하고 소유하는데 온 힘을 쏟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삶의 이유를 두기에 사랑하고 나누며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영원 생명, 곧 행복에 이르려면 무엇을 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앞에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부자 청년과 같은 방향착오를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영원한 생명, 구원, 행복은 무엇을 행하여 얻는 것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느님 앞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기에 앞서 어떻게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열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줌으로써’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난한 마음이 행복을 부를 것입니다.
오늘도 행복으로 가는 디딤돌은 소유 없는 가난한 자 되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의탁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과 친교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자 애쓰는 것들이 결국은 나를 넘어뜨려 영혼을 가르고 어둠에 빠뜨려 불행하게 함을 상기하며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 존재하는 우리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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