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선원 법현스님(우리스님) 2012.12.02
1. 어떤 과정으로 근대 종단이 분열하였는가?
경허(鏡虛) 이후의 선수행의 전통을 확립하려는
이판 수좌들과 태고(太古)ㆍ서산(西山)ㆍ만해(卍海)로 이어지는
통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상반된 사판 승려들의 움직임은
그들의 해방 후 사회적 위상 확인과 함께 바로 불거졌다.
일제의 지원과 자신들의 노력을 합한 힘에 의해
교학과 사회학의 물결을 체험한 이들은 해방 후 사찰의 주지,
회사의 사장, 국회의원, 장관 등의 상당한 지위와 함께 재산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은 이들은 화려한 강학(講學)이나 사회적 활동보다는
나를 찾는 참선정진(參禪精進)에 몰입한 이가 많았다.
진정한 수행자들은 최소한의 수행공간을 요구했고,
겸허한 소임자들은 흔쾌히 약속하며 뒷바라지에 골몰했다.
1952년에 선학원 계열의 이대의스님이 당시 종정이었던
송만암스님에게 제안한 비구승(이판승) 수행사찰 제공에 대해
불국사에서 개최한 법규위원회의에서 18개 사찰을 제공하기로 결의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동화사 등 18개 사찰이 재산가치가 없는 사찰이라는 이유로
비구승측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또한 당해 사찰 주지들의 반발도 있고 해서
이 제의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 일은 분규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
한국불교 발전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던 사건이
아주 잘못된 분규와 법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 도화선이기도 했다.
2. 이 승만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본격적으로 종단의 분규로 발달하고 법란으로까지 비화된 것은
6.25한국전쟁에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린 이승만 정권의
여덟차례에 걸친 소위 '불교정화유시'에 기인한다.
요즘은 남북교류와 세계화 조류에 힘입어 사라지고 있지만
한국인에게 2대 악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 일제를 겪은 이들에겐 '일본의 잔재 또는 앞잡이'라는 말이며,
6ㆍ25를 겪은 이들에겐 '공산당=빨갱이'이라는 소리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 2대 악감정을 모두 다 활용했다.
일제하에 부일했던 이들은 조사하는 국회내 반민특위(反民特委)에는 '공산당'을,
민족정기와 민주정치를 부르짖는 불교계엔 '일본 잔재'를 쓴 것이다.
두 번 다 국민과 식자들의 저항에 직면했지만 후자의 경우엔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해방이 되었으나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민족진영은 미 군정당국의 방해 책동으로
귀국조차 하지 못하고 3년여를 보내는 사이 이승만이 정권을 잡았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불안하고 리더쉽을 학보하지 못해 고생했다.
전통적으로 김구,조소앙 등의 불교 및 동학사상과 가까운 지도자들을 지원했던
불교계의 지도자인 이지암,박성하 스님등이 이승만정권에 부담이 되고
6.25한국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전쟁만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며 안심하라던 그들은
그 내용을 방송으로 틀어놓고 한강철교를 끊고 도망쳤다.
당연히 민심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시선을 돌리기 위해
승려들의 싸움을 조장하고 약자들인 세칭 비구승을 지원한 것이다.
당시 승려수는 비구승이 300 명 나머지 7000 명이 전통 승려였는데
300 명을 지원한 것이다.
부정적인 방법에 의해 집권을 연장하려던 것들도
불교계 지도자들의 저항으로 어렵게 된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마키아벨리즘의 흉내를 내어 외부로 시선을 돌리려고
승려들의 싸움을 유발해 거대한 민족세력의 본산을 와해시키는데서
더 나아가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고자 했다.
1954년 5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무려 8차에 걸쳐 유시(담화문)을 발표해서 불교를 탄압하였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대통령의 담화나 정책기조에 따라 거대 재벌이나
정당들이 힘도 못쓰고 무너지는데 당시의 어두운 사회에서
8차례나 담화문을 내고 문교부,내부부,경찰력을 동원해 탄압하는 것을 견디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정말로 역사상 유례 없는 탄압을 받은 것이다.
이청담,하동산 등과 가까웠던 이승만의 양딸 김부전(법련화),김두한 등도 그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물론,이들은 이승만 정권에 적극 협력했다. 이승만에게 큰 절까지 했다.
3. 박 정희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는 1954년 유시에 의한 불교교단 분규는
「외부의 힘을 입고 하는 정화운동은 원만한 결실을 거둘 수 없다」고 한
조계종 이 성철스님의 말마따나 현재진형형으로 문제이다.
그것은 비구승만의 집단이라면서 21세기인 아직도
계속 승니의 분한문제, 세속적 권력과 방법의 향유문제로 고생하고 있는 조계종과
제 위치를 찾기 위해 골몰하는 태고종 및
그 사이에서 분주한 마음을 가지는 여타 종단의 모습에서 그 보(報)를 찾을 수 있다.
1954년 독신승으로서 종정을 지내고 있던 백양사의 송만암스님이
"불교 정화는 필요하나 그 방법론은 현재 비구승들이 추진하는 것으로는 안된다"고 하였다.
당시 선학원에서 열린 비구승 대표자대회에서 부종정에 하동산,
도총섭에 이청담,총무원장에 박성하를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받아들인 이종익,이불화 등 환속한 불교학자들의 보조종조(普祖宗祖說)에 대해
"환부역조(換父易祖)"라 비판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그들은 문교부장관 이선근의 지원을 받아 사찰정화대책회의에서
승려 8대자격이라는 조건을 만들어 거기에 해당한다는 1200여명의 명단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 역대 종정스님 계보를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 수 있다.
1946년에 추대된 태고종의 초대종정 박한영스님부터
이후의 방한암,송만암,국묵담,박대륜,안덕암스님 등이 독신 비구승인데 비해
1962년도에 추대된 조계종 종정 이 효봉스님을 비롯하여
하동산,이성철,이청담 스님 등은 출가 전이나 후에 결혼한 전력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입증한다.
태고종은 결혼을 자유의지에 따라 허용할 뿐이며 독신으로 일생을 보내는 스님들을 존중한다.
한편,이승만 정권의 악랄한 탄압과는 별도로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최고기구인 국회에서는
1955년도에 집중적으로 김 영삼,이종욱,문종두 의원 등이
정부가 문교부나 내무부를 이용해 불교계 내부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종교 간섭이라는 항의성 질의를 하여 태고종측을 지원했다.
법원에서도 태고종 측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일이 많았다.
1954년 11월에 조계종 측이 일제 때 민족 정기와 불교 전통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각황사 자리에 복원한 태고사를 점거해 조계사로 이름까지 바꾼 것을
환원해 달라고 하는 내용의 1955년 태고사 명도 가처분 신청에서 승소한 것이나
1960년의 사찰정화대책회의 무효 확정 및 1961년의 조계종 종헌 무효 및
태고종 측 종헌 유효 확정 판결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계종 승려들이 판결에 불복한다는 의지 표현으로 대법원에 난입하고
6명의 젊은 학인 승려가 할복 자살을 기도하도록 사주했다고
이청담 등 주모자를 구속하기도 하는 사건의 본질은
당시의정부가 주도적으로 도와주던 분위기와
법의 판단은 별개라는 바람직한 판결이었으나 5.16 쿠테타가 나므로써 새로운 위기가 되었다.
1962년에 정부주도로 불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서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조계종 측과 태고종 측의 분규를 수습하고 통합한다는 서명을 하기에 이르는데
묘하게도 조계종 측의 승려들은 합의를 하고 나면
그 합의의 내용을 외부단체 즉 정부에 유권해석을 의뢰해서
자기들에게 편리한 방향으로 내용을 변경하고 태고종 측은 그에 반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합의정신은 깨어지고 또 승려의 자격문제 등이 불거져서 양측이 결렬되었는데
정부가 나서서 합의를 한답시고 사회인사 5명,조계종 측 5명,태고종 측 5명의 구성원 중
태고종측이 다 퇴장한 가운데 일방적으로 조계종의 의견만을 가지고 결의했다.
이를 통합종단이라고 하며 1962년도에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이라는 것을 공표해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통합종단이라고 미화하고 있다.
이는 통합종단 무효소송이 1966년에 승소함으로써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법원의 판결은 세월이 흐른 후에나 나오고
현실적으로는 정부의 지원을 받은 조계종이 사찰을 다 접수하게 된다.
그들은 아예 일제 때의 사찰령과 그 맥이 닿아 있는 불교재산관리법이라는 악법을
1962년 5월에 제정해 모든 불교재산의 처분과 주지 등 대표자의 취임을
정부기관이 허락하도록 해 불교계가 힘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 때부터 불교는 무조건적으로 정부의 정책에 따르는 집단이라는 민중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
이 때 모든 사찰과 불교단체를 등록 받으면서 4개월 안에 등록을 마치되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의 임명장을 첨부하도록 하고
태조종종정의 임명장을 첨부하면 등록을 반려하는방법으로
조계종만을 법적으로 지원했다.
물론, 이 때는 지금의 태고종이 원래 조계종의 본체이었으므로
대한불교조계종이라 하고 대표자인 종정의 이름을 국묵담으로 명기하면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법원에서도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한 마당에는
조계종의 입장을 우선하는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다.
1969년 10월에 나온 62년 비상종회 종헌과 종정 추대 유효 판결이 그것이다.
태고종측에서는 1954년부터 1969년에 이른 장장 두 개의 정권에 이르는
탄압을 꿋꿋이 버텨 내었으나 더 이상 공룡같은 정부와
조계종에 대항하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에서 조계종이 아닌 다른 종단으로 등록하기를 모색했다.
이미,조계종이 아닌 것은 1개의 사찰일 지라도 종단으로 인정해 등록을 받아주어
십수개나 되는 종단으로 나누어버린 마당에 분규의 요인이 하나 없어진다는 생각에
정부에서도 적극 나서서 다른 이름으로의 등록을 유도했다. 조계종은 반대했다.
그렇게 해서 고려 때 조계종으로 종명을 공칭해서
불교를 통일한 태고 보우국사의 법맥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태고종으로 종명을 바꿔서 1970년도에 종단을 등록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태고종은 1970년도에 창종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과 법맥을 이어 받아 종명만을 변경해 등록한 유일한 종단이다.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었다고 하면서도 1962년에 창종했다고 종헌에 명기하므로써
그 이전의 역사는 묻어버린 결과를 낳았다. 물론, 당시에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지금의 조계종측 그리고 지금의 태고종 측 사회인사 합쳐서 의결하지 못하고
지금의 태고종측이 빠진 상황에서 사회인사와 결의한 것을 통합이라고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조계종의 핵심인 선학원측은 지금 조계종과 다르므로
알맹이가 없다 할 것이다.
이후 조계종은 그 정통성을 담보받는 대신에 또한 철저하게 이용당했다.
1962년도부터 1985년도까지 내용을 알고 있는 정부당국에서는
대표권은 인정하되 자율권은 인정핮디 않는 통활정책을 적용했다.
조계사,해인사 주지가 조계종총무원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으면
바로 주지 취임을 하게 하지 않았다. 종로경찰서장,합천경찰서장과
종로구청장,합천시장의 허가를 얻어야 비로소 취임하고 주지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승려들이 정권을 비판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30년을 흘러온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태고종은 이승만 정권과 박 정희정권으로부터 철저하게 탄압 받아
지금보다 훨씬 못한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이며 피나는 노력을 통해
그나마 전통종단으로서 제2종단의 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몰론,조계종도 태고종에 비해 좋은 대접을 받은 것이지 기독교나 천주교에 비하면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아서 결국은 불교전체가 어려워진 것을 기억해야 한다.
뭘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고 제대로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