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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다시 보기] 부활이란
신약성경 안에서 부활을 뜻하는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명사로 된 단어인 아나스타시스(αναστασις)가 있는데 대략 40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부활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부활(復活)이란 “회복할 부, 다시 부”와 “살 활, 생존할 활”의 합성어로 다시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일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동사로는 에게이로(εγειρω)와 안이스테미(ανιστημι)가 있는데, 에게이로는 대략 140번 정도, 안이스테미는 100번 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게이로의 뜻은 “일으키다”로 타동사입니다. 그래서 이 동사는 주로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으며, 즉 예수님께서는 “일으켜지셨다” 또는 “일으킴을 받으셨다”라는 것인데, 그러면 누구로부터, 누구에 의해서 일으킴을 받으셨는가 하면,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입니다. 성서 본문에는 하느님으로부터라는 말이 없지만, 그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신학적 수동태(Divinum Passivum)라고 합니다. 새 번역에서는 주로 “되살아나셨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안이스테미라는 동사는 “일어나다”라는 뜻으로 자동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의 능력을 지니셨기에, 스스로 일어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 번역에서는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제 이 두 동사의 사용처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고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 마태오: 일으켜지셔야 한다(16,21); 일으켜지실 것이다(17,23); 일으켜지실 것이다(20,19)
◦ 마르코: 일어나셔야 한다(8,31); 일어나실 것이다(9,31); 일어나실 것이다(10,34)
◦ 루카: 일으켜지셔야 한다(9,22); 해당 단어가 없음(9,44); 일어나실 것이다(18,33)
이제는 빈 무덤 이야기에서 언급된 표현을 보겠습니다.
◦ 마태오: 일으켜지셨다(28,6); 일으켜지시다(26,32)
◦ 마르코: 일으켜지셨다(16,6); 일으켜지시다(14,28)
◦ 루카: 일으켜지셨다(24,6)
◦ 요한: 일어나시다(20,9)
위에서 살펴본 결과, 부활에 대한 예고에서 마태오에서는 모두 “에게이로”(일으키다)라는 단어가, 마르코에서는 “안이스테미”(일어나다)가, 루카에서는 반반, 그런데 빈 무덤 이야기에서는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게이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부활 전과 부활 후의 표현이 달라지고 있는데, 공관복음에서의 예수님 부활은 스스로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일으켜지셨다는 것을 더 부각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일어나셨다고 합니다(요한 20,9). 즉 예수님은 신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일어나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분을 가장 가까이 모셨던 제자로서 그분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사람의 증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표현에 더 신빙성이 있을 수 있고, 제자이기에 스승을 더 높이고 싶은 마음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에 대한 이해를 돕는 표현으로는 동사 조오포이오(ζωοποιω)입니다. 뜻은 “생명을 만들다”입니다. 주로 동명사(동사인데 명사로 됨) 형태로 10번 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베드 3,18) 다시 말하면 육으로는 살해되어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영으로는 “생명이 만들어지신 분”(ζωοποιηθεις)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 하느님의 말씀] 빛이신 주님께 눈먼 이, 사도 바오로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2,3) 열성 또는 욕망이라 불릴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 원의는 ‘보다’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쉬운 예로 당장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대상은 나의 열성 또는 욕망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원의는, ‘알아보다, 맛보다’와 같은 표현들이 드러내듯, 원하고 갈망하는 대상을 물리적으로 목격함에 머무르지 않고 그 대상과의 더 긴밀한 결속, 하나 됨을 지향합니다.
창세기 3장의 인간이 선악과나무 열매를 보며 갈망하고 먹었음은 ‘하느님과 같아지다, 하느님이 되다’라는 욕망을 표현하는 일이었지요.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구원 역사 내 인간은 하느님을 보고자,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에게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창세 1,26-28). 그러나 ‘모상’이라는 말 자체가 전제하는 바, 본연적으로 하느님과 같은 존재일 수 없는 인간에게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시선과는 다른 시선이 주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 사건은 그 다른 시선의 한 단면을 성경의 독자들에게 선사합니다.
바오로는 ‘늘 드러나시면서 동시에 감춰지시는’ 하느님의 빛을 봅니다. 달과 여러 별들이 태양에 견주어지는 빛을 지닐 수 없듯이, 하느님의 빛은 여러 빛물체들을 있게 하고 초월하는 근원입니다(창세 1,3). 그러나 이 빛은 신비롭고 겸손하신 하느님을 닮아, 어둠과 역설적으로 한 몸을 이룹니다. 낮이 밤에게 자리를 내줌으로써 달과 별이 태양으로부터 받은 빛을 내고 온 생명이 휴식을 취하는 창조 질서가 세워지듯이(창세 1,4-5), 하느님 빛의 감춰짐은 모든 존재가 자기 고유의 빛을 발하며 쉴 수 있는 시공간을 지탱합니다.
바오로는 토라를 위시한 창조주 하느님 말씀의 빛을 받아 열성적인 유다인이란 빛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떤 존재보다 하느님을 담아내고자 했던 바오로의 눈에 말씀 그 자체이시자 빛 자체이신 주님(요한 1,1-4)께서 당신을 선사하십니다(사도 9,3-6). 자기의 근원 앞에서 바오로의 빛은 땅에 떨어져 힘을 잃고 어둠에 빠져듭니다(사도 9,8). 주님께서 의도하신 이 어둠은 사흘이라는 기간 동안 바오로의 빛을 새롭게 창조합니다(사도 9,9). 이로써 열성적인 유다인으로 훤히 드러나고 있던 그의 빛은 다른 존재 고유의 빛을 지탱하는 어둠을 품은 역설적인 빛, 곧 하느님의 빛을 닮게 되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주님께 눈먼 이, 바오로의 탄생입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 여전히 열성적인 유다인이지만 주님을 위해서 그 빛마저도 내려놓을 줄 알게 된 바오로의 신앙고백입니다(1코린 9,20-22). 이는 참 하느님이시지만 우리 구원을 위해 참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로 인해 십자가 상에서 지극히 사랑하올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으심이란 어둠을 체험하고 수용하심으로 부활이란 빛을 성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금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눈은 어떻게 하느님을 담아내려 합니까? 우리 모두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을 닮아, 여전히 나의 빛과 시선에만 스스로를 묶으며 하느님을 보려 드는 경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어둠을 관통하며 자신의 빛과 시선을 내려놓음으로써 하느님의 빛을 마주한 바오로의 회심 사건은 우리를 위한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줍니다. 주님의 빛이 자아내는 창조적 어둠에 우리의 눈 역시 머무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성경, 다시 보기] 해피 이스트
“부활을 축하합니다”라는 우리말 인사를 영어권에서는 “해피 이스트”(HAPPY EASTER)라고 합니다. 그 뜻은 아시다시피 “행복한 부활절”입니다. “이스트”는 고대 게르만 신화의 봄의 여신 “아우스트로”(AUSTRO)의 이름에 기인하는 춘제(春祭)였는데, 후에 기독교의 축제일인 “부활절”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부활절”이란 글자 앞에 붙어있는 “해피”(행복한)란 글자에 좀 더 다가가고자 합니다. 물론 축제이니까 행복하고 기뻐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 믿는 이들의 마음에 부활절이 행복하게 느껴지려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한 번 만나는 것이 아닐까요?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분을 만나는 길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태 28,7; 26,32. 마르 16,7; 14,28).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그 여인들에게 천사가 일러준 말이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전에, 즉 최후 만찬 때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실 때도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다름 아닌 갈릴래아로 가면 된다는 것인데, 실제 저도 갈릴래아를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서 공부를 하며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 있는 갈릴래아가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갈릴래아, 즉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고 제자들을 모으고 가르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신 그 갈릴래아를 가리키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면 그분의 행적을 살펴보라는 말씀이고, 그렇게 하면, 나도 모르게 그분께서 다시 내 맘속에 자리 잡고 활동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즉 그들이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토론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신다는 겁니다(루카 24,13-35 참조).
요한 복음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더 감동스럽게 만나는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제자들, 그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기리며, 갈릴래아에서의 추억(?)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데, 먼저 예수님께서 그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잘못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으시고, 용서를 다 해 주시니, 제자들이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의 생각을 짐작해 봅니다. 정말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라면, 꾸중도 나무람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을까? 그것도 우리가 먼저 빌러 간 것도 아닌데 말이야(요한 20,19-29 참조).
“행복한 부활절”이라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우리의 잘못을 묻지도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 믿는 이들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하느님의 말씀]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주님, 어디에 머무르십니까?”, “와서 보아라.”
세례자 요한은 말씀 그 자체이신 분과 다른 이들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을 성사시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일찍이 그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의 실재를 천명했습니다(요한 1,29). 요한의 증언에 이끌린 두 제자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실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을 금세 마주하게 됩니다.
당신의 뒤를 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주님께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그러자 그들은 “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 가톨릭 성경이 “묵고 있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동사 ‘메노’를 직역하면 “어디에 머무르십니까?”라는 말이 됩니다. 요한복음 내에서 “머무르다”라는 주제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 내 위치, 거주뿐만 아니라, 한 존재의 근원 및 본질을 드러내는 신학적 공간 내 머무름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 1,32-33에 따르면, 성령께서 하느님의 어린양 위에 머무르십니다. 또 요한 14,10에 따르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드님 안에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한 아드님께서 당신 제자들 안에 머무르실 수 있으며 제자들 또한 그분 안에 머무르도록 초대받습니다(요한 14,25; 15,4-7).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찾는 것, 곧 당신이 머물고 계시는 곳을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이렇게 당신께서 어떤 분인지를 훤히 밝히시는 이 말씀이 이미 세상의 죄에 역행하는 말씀입니다. 원초적 인간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겨 죄를 짓고 난 뒤 그분으로부터 자기 몸을 숨깁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아담을 찾아 주셨지만, 그는 더 이상 하느님 앞에서 알몸으로 자기 모든 것을 훤히 보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새 아담이신 주님께서는 옛 아담이 자아낸 숨어드는 인간의 구도를 뒤집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질문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지금 어디 계시냐는 질문을 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어디에 머무르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분은 몸을 숨기시지 않고 와서 보라 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십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에서 그날 그분과 함께 머무르며(요한 1,39) 강생하신 하느님 말씀, 새 아담을 만나게 됩니다. 이 구도에서, 제자들이 우리 주님과 함께 “오후 네 시쯤”까지 머물렀다는 이야기(요한 1,39)는 실로 그들이 하느님의 어린양과 함께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의 제사를 성취하신 시간이 오후 세 시이지요. 그 후 십자가에서 그분 시신이 내려지며 제사가 마무리되는 시간이 “오후 네 시쯤”으로 추정됩니다. 일종의 예형으로서, 두 제자들이 하루 동안 주님께 머물렀던 시간이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이루시는 제사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셈입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은 퇴색되어 가고 익명성 뒤에 숨어드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에게 필수적인 사회성이라는 덕목도 자기 말과 표정, 행동 뒤에 스스로의 민낯을 잘 감출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합니다. 이렇듯 숨어들 수밖에 없는 우리 모습 가운데 갈등과 불화, 죄가 자리합니다. 새 아담께서 “와서 보아라” 하시는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숨어들며 혼자 죽어가는 우리를 계속 당신께로 불러내셔서 숨통이 트이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 말씀 안에 머무르기를 희망합니다.
[성경, 다시 보기] 빈 무덤과 오토니아
부활 성야 복음과 부활 대축일 복음은 빈 무덤 이야기이다. 내용은 안식일이 지나자 몇몇 여인들이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누가 무덤 앞을 막아 놓은 큰 돌을 치워 줄까를 걱정하면서. 그러나 그들이 도착해 보니 그 돌은 치워져 있었고,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1-6 참조).
마태오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저 사기꾼이(πλανος-플라노스: 예수님을 지칭) 살아있을 때, 사흘 만에 되살아난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는 경비병들을 시켜 그 무덤을 지켜야 합니다. 그의 제자들이 몰래 그 시체를 훔쳐내고, 그가 되살아났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비병들이 그 무덤을 지키게 된다(마태 27,62-66 참조). 이 경비병들이 무덤이 빈 사실을 수석 사제들에게 알리고, 그들은 원로들과 의논한 끝에,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그들이 자는 동안, 제자들이 몰래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고, 그 소문이 오늘날까지 유다인들에게 퍼져있다고 전한다(마태 28,11-15 참조).
그런데 같은 병행 구절인 루카(24,12)와 요한(20,5-7)을 보면 위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루카에서는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베드로가 설마 하고 무덤을 찾아갔지만, 무덤은 비어있고 아마포만 남아있었다 하고, 요한도 같은 맥락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여인의 말을 듣고 무덤을 달려가 보았더니, 아마포와 함께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따로 개켜져 있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아마포는 무엇을 말하는가? 희랍어의 오토니온(οθονιον)을 번역한 것인데, 그 번역이 다양하지만(공동번역-수의: 1962년 신약성서(가톨릭)와 200주년-염포: 1961년 관주번역-세마포: 2001년 성경전서(개신교)-삼베: 킹 제임스(1611)와 1992년 영어번역-아마-옷: 독어 공동번역-아마-붕대), 그것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주검을 쌌던 아마로 짠 천을 말한다. 이 단어가 여기서 복수로 쓰였으니, 그 아마포는 여러 조각이었다.
만약 마태오처럼 경비병들이 자는 동안 제자들이 몰래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제자들이 그분의 몸을 쌌던 수의를 벗기고, 그분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을 풀고 얌전히 모셔갈 시간적인 여유가 과연 있었을까? 무덤이 비었고 거기에 수의와 수건이 따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제자들이 그분의 주검을 훔쳐 간 것이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몸에 감겼던 천을 풀고 얼굴을 감쌌던 수건을 벗고 다시 일어나셔서 무덤을 떠나셨거나, 아니면 누가(천사나 하느님께서) 풀어 주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가서 무덤이 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여인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공관복음이나 요한도 다 같이 전한다. 당시 유다 법정에서는 증인으로 여인들이 나설 수 없었다고 한다. 성서적 근거는 사라가 하느님 앞에서조차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란다(창세 11,15 참조). 그래서 루카에서는(24,11)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을 때, 헛소리로 여기고 믿지 않았지만, 남자인 베드로가 무덤에 가서 확인하고 있다. 요한은 한 사람의 증인은 법적인 효력이 작다는 것을 알기에 베드로와 요한, 둘이 무덤으로 달려가, 여인들이 전해 준 사실을 확인한다.
[성경, 하느님의 말씀] 온 피조물에 마땅한 자리를 부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로 정향된 인간의 말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성조들, 모세, 다윗, 예언자들로부터 우리 주님께 이르는 구원 역사를 풀이한 뒤,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을 증언합니다(사도 7,2-56). 이 증언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살의로 귀결되는 격분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분노하게 하였습니까?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힘은 ‘분리, 구분’, ‘경계 지음으로써 자리를 부여함’에 있습니다. 빛과 어둠을 가르시는 분. 물과 땅 사이의 경계를 세우시는 분. 낮과 밤, 계절들의 경계를 부여하시는 창조주 하느님. 그렇게 시공간을 품은 우주에 모든 생물 고유의 자리(새에게 하늘, 물고기에게 물, 들짐승에게 땅)가 세워집니다. 식물이 작은 짐승의 먹이가 되고, 작은 짐승은 큰 짐승의 먹이가 되듯, 온 피조물의 탄생은 항상 자기를 초월하는 우주적 질서 하에 죽음에로 귀결되지만, 그마저 숭고하며 거룩합니다.
이런 원초적 질서 가운데 우리 인간이 부여받은 자리는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 곧 하느님의 모상입니다(창세 1,26-28).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유비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말을 통해 실현됩니다. 당신을 닮아 지배하고 다스리라 하신 그 말씀에 따라 인간은 온 피조물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경계를 세우고 고유의 자리가 있게 합니다(창세 2,19-20).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의 말 역시 경계와 자리를 표현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쉬운 예로, 친한 친구에게 별명, 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는 일은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그 친구를 표현하는 일이요 내 나름의 기준으로 그 친구에게 자리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한편, 구원 역사 안에서 우리 인간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방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그 말씀과 온전히 하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존재를 제 자리에 배치하시는 하느님,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시고, 없어야 할 것들은 그저 없게 하시는 당신의 말씀과는 다르게 인간은 늘 ‘자기중심적인’ 자리 배치를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 자리 배치’에 본능적으로 힘쓰는 데 비해, 다른 존재의 자리를 배치함에 있어서는 무감각하거나 잔인할 정도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이 구도에서 스테파노가 순교를 당한 이유가 뚜렷해집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그의 증언은 실로 그 누구의 말과도 다르게 하느님의 말씀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하느님의 자리를 명시함으로써 온 피조물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힘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자리 배치를 수행하는 인간들은 자기들의 말과 너무나도 달랐던 스테파노의 말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싶었던 자리와 하느님께서 부여하시는 자리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리에 대한 욕망의 결과가 곧 스테파노의 순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말은 어떤 자리 배치를 수행하고 있습니까? 온 피조물이 제 자리를 찾아갈 때 하느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창조 질서가 바로 서고 생명과 축복이 세상에 가득 찰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테파노의 말은 자기를 위한 자리 배치이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에 맞닿은 거룩한 말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잘 배치함은 결국 다른 이들의 자리를 옳게 배치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첫 순교자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의 말이 온 피조물에게 마땅한 자리를 부여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을 닮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