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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28.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581항)
모든 사회관계 안에 ‘사랑’ 현존하며 스며들어야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를 가만 보면 사회에 대해선 정의를 가지고 살고 우리 교회 안에서는 사랑을 가지고 산 분입니다. 그 모범을 가장 잘 보여준 분입니다. 그래서 민주화 투쟁에 누구보다 앞장섰고 사회 정의가 무너질 때에 막아 주려고 노력했어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막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삶 가운데 마지막 남은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뜻이 남았습니다.”(김형석 교수 「그리운 김수환 추기경」 중)
사랑, 식별을 완성하는 요소
최근 안타까운 참사와 재난들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런 사고들이 힘없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일어나곤 합니다. 반복되는 재난은 사회의 취약한 제도와 법, 안전망을 점검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생명을 보호하는 근본적인 동인은 바로 우리의 따뜻한 마음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희생된 모든 분들과 가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 지난 시간에 식별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하느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이 기준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식별을 위해 평소에 하느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교회의 가르침을 꾸준히 공부해야 하고, 용기와 믿음, 지혜와 인내심을 길러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회와 세상은 분열하고 반목합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며 사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몸소 보여 주시고 가르치신 것은 사랑과 평화입니다. 사람들을 일치시키고 하느님과 인류가 하나 되기 위한 일치의 성사로 거룩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05항) 이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화해하며 일치를 이룹니다. 그 핵심은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행복과도 직결됩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행복하신지요?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 주변 환경이 아무리 좋더라도 나를 사랑해 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물론 안정적인 환경과 사랑 모두가 있어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점점 각박하고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행과 우울을 호소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서로 도와줌, 사랑의 정과 형제적 친교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성 바오로 6세 교황 「민족들의 발전」85항)
우리는 사랑을 믿어야 해요
예나 지금이나 사랑을 추구하기에는 삶은 고단합니다. 경제 위기, 취직과 실업, 갈등과 분열, 전쟁과 폭력은 늘 우리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높은 관직의 위정자부터 아직 어린 아이들과 청년들, 힘든 상황의 이웃들에게까지도 우리는 반드시 사랑을 간직해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진리로 가득 찬 사랑을 갖고서 세상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인류는 단지 어쩌다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한 가족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생명의 복음」 20항) 그것이 교회가 사회 참여를 통해 사람들과 정치에 주어야 할 누룩입니다. 또한 그럴 때 세상은 일치하고 성장하며 발전합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히 지속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회관계 안에 현존하면서 그 관계 안에 스며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염원하는 안녕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널리 확산되어 생겨난 결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581항 참조)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28. 때가 찼을 때의 기도 ③ (「가톨릭교회 교리서」 2617~2622항)
‘순종의 기도’로 전적인 응답 보여주신 성모님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의 줄거리입니다. 어느 늦가을 날,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던 제비가 잠깐 쉬기 위해 행복한 왕자라 불리는 동상 발등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놀란 제비가 하늘을 쳐다보니 그것은 비가 아니라 왕자의 눈물이었습니다. 왕자는 세상의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며 슬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자는 제비에게 “미안하지만, 칼자루에 박혀 있는 루비를 뽑아다가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엄마에게 갖다줄 수 있겠니?”라고 부탁합니다. 제비는 더 추워지기 전에 떠나야 했지만, 울고 있는 왕자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청을 들어줍니다. 왕자는 다시 자기 눈에 박혀 있는 사파이어를 가난한 문학가에게 주라고 부탁합니다. 다음날도 왕자는 제비에게 남은 눈 하나를 광장에서 떨고 있는 소녀에게 주라고 부탁합니다. 제비는 그렇게 하였고 이제는 왕자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제비에게 순금으로 되어 있는 자기 몸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어느덧 겨울이 오고 눈이 내렸습니다. 제비는 추위에 죽고 맙니다. 사람들은 볼품없어진 왕자의 동상을 가져다가 용광로에 녹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은 녹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왕자의 심장을 제비가 죽어있는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립니다. 이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왕자의 심장과 제비를 하늘로 들고 올라갑니다.
성모님의 기도는 행복한 왕자에게 응답하는 제비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제비도 왕자에게 그러하였지만,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전 존재를 바쳐 응답하십니다.”(2617) 이 전적인 응답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곧 “이루어지소서!”(Fiat)라는 순종의 기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의 협조자가 되라고 하와를 만들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첫 조상들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께 불순종합니다. 이제 “새 아담”(539)인 그리스도는 “새 하와”(2618)인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첫 조상의 일을 이어가십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성모님을 “여인”이라고 부르십니다. 여인은 혼인 잔치에 참여한 은총이 끊긴 당신 자녀들을 위해 그리스도께 성령의 포도주를 청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영적 포도주의 은총을 부어주심으로써 첫 표징을 일으키십니다. “이 혼인 잔치는 또 다른 잔치, 곧 당신의 신부인 교회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상징합니다.”(2618) 교회는 성모님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에 순종합니다. 그러면 물이 포도주가 되고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가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자녀들이 끊이지 않고 탄생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새 하와로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여인”으로, 또 “살아있는 이들의 참어머니”(2618)가 되십니다.
성모님의 기도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원의 모범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808) 신부는 신랑의 창조사업에 협조합니다. 행복한 왕자의 제비가 되어 그분의 뜻에 한없이 응답하고 순종하는 길만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랑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호교적 대화 (6) ‘오직 믿음’이라고?
천주교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에 젖어 있는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위하여 가상 대화 형식으로 꾸몄으며, 주로 서한규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서울, 게쎄마니, 2012)를 참고하였다.
비신자 : 개신교가 말하는 오직 믿음(sola fide)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습니다.
천주교인 : 개신교에서는 로마서 1장 17절을 근거로 해서 ‘오직 믿음’을 주장하려 하지요. 천주교 성경 번역은 이러합니다 :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다음은 개신교 성경의 번역들입니다(참고, 서한규, 243쪽).
한글 킹제임스: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말 성경: “기록되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새표준번역성서: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개역성경: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한글 번역 개신교 성서에서 ‘개역한글(개역개정한글)성경’을 제외하고는 어느 성경에서도 ‘오직’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비신자 : 그러면 외국 성경은 어떠한가요?
천주교인 : 그리스어 성경, 모든 영어 성경, 독일어 성경 어디에도 ‘오직’이라고 번역될만한 단어가 없습니다. 한때 마르틴 루터가 의도적으로 변조했었는데 많은 비판을 받고 나서, 현재의 독일어판에서는 ‘오직’이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어판 개신교 개역(한글)성경은 16세기 초반의 전통을 따른 오역이지요(참고, 서한규, 243쪽).
비신자 : 또 다른 곳은 없나요?
천주교인 : 필리피서 3장 9절, 갈라티아서 2장 16절, 로마서 4장 13절, 그리고 로마서 3장 27절 등에서 위와 비슷한 사례들을 볼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원문을 확인하는 것이겠지요. 다른 영어, 독일어, 그리고 그리스어 성경 모두 한결같이 ‘오직’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만일 어떤 번역본에 ‘오직’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면 개신교의 ‘오직 믿음’이라는 가정을 성립시키기 위해 성경을 변조했다고 봅니다.
비신자 : 사도 바오로가 ‘오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나요?
천주교인 : 여러 번 사용하지만 ‘오직 믿음’의 뜻으로나, ‘오직 성경’의 뜻으로 사용한 적은 없어요. 갈라티아서 5장 6절 “오직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를 보면,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문구입니다. 이를 개신교에서는 믿음의 강조라고 주장할 뿐입니다(참고, 서한규, 242쪽~248쪽)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미사 때 최소한 언제까지 들어가야 영성체를 할 수 있나요?
오늘은 영성체 조건에 대해 질문해 주셨는데요, 이 질문은 미사의 유효성이 유지되는 조건에 대한 관심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령, 지각했지만 주일미사를 유효하게 봉헌한 것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죠. 나아가서, 일반적인 성사 전체에도 오늘의 질문을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세례식이 시작되고 나서 중간쯤 성전에 들어갔는데, 그 세례는 유효한 세례인가?’와 같은 질문과도 함께 생각해 봅시다.
우리 교회에는 일곱 개의 성사가 있습니다. 이 성사들은 모두 성사의 유효성과 관계되는 핵심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서, 세례성사의 핵심은 교회의 뜻에 따라 집전자가 세례자에게 물을 부으면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라는 경문을 외우는 부분입니다. 그 외 흰옷을 입혀 주거나, 대부, 대모가 촛불을 켜서 세례자에게 넘겨주는 등의 부분은 세례성사의 유효성과는 상관없지만, 예식을 보충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부분입니다. 안타깝게도 세례식에 지각했지만, 이마에 물을 붓고 집전자가 경문을 외는 순간에 함께 할 수 있었다면, 그 세례는 유효한 세례가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모든 성사에 핵심적인 부분만 놓치지 않는 수준에서 지각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시계를 보면서 얼마나 더 늦어도 좋은지 계산하지 마세요.”(2017년 12월 20일 일반 알현에서)라고 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교회의 어느 규정집이나 법전을 살펴봐도, ‘언제까지는 와야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식의 지각 규정(?)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전례에 온전히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구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신자가 전례 거행에… 완전한 참여를 하도록 인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한 참여는 전례 자체의 본질에서 요구되는 것이다.”(전례헌장 14항)와 같은 구절이 대표적입니다. 완전한 참여란 무엇보다 전례를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는 형식적 완전함을 전제합니다.
그러니 미사 때 집전자가 입당하는 순간부터 퇴장할 때까지 매 순간의 의미를 생각해 보며,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으는 것이 더욱 중요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그런 의미에서 “미사 때 입당 예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미사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하세요.”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미사 시작 전에 성전에서 충분히 복음을 묵상하며 내적으로 미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도록 권고하신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답은 더욱 명확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사에 지각하셨고 영성체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 상황에 빠지셨다면, 양심 안에서 진중히 성찰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마치 출석 도장 찍듯이 이번 주 몫의 영성체 한 번을 할 수 있느냐 여부에 매달리기보다는, 진정 예수님을 내 몸 안에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돌이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신학23]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공포인가, 희망인가?
설렘과 희망으로 기다리는, 그리고 매 순간 우리의 삶이 향하는 파루시아에는, 오실 그분이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리라는 약속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고, 더욱이 그것이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최종 심판’이라면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행실에 따라, 특히 가장 약한 이들에게 행한 것에 따라 의인과 악인을 가르시고 각각 영원한 상과 벌을 내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우리 중에 감히 ‘나는 영원한 상을 받을 만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최후의 심판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그냥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안 될까 싶긴 하지만, 그것을 바라기에는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말씀이 너무나 진지하고 준엄합니다. 파루시아에 대한 희망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심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심판하러 오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이 말씀은 창조에 대한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그리고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10 참조) 창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뤄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시작이요 완성이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역사 안에서 말씀과 행적, 특히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음, 부활 사건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러니 그분만이 모든 인간을, 인간의 역사를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심판자이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거슬러, 하느님 없이 살고자 했고, 이것을 우리는 ‘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당신과 화해시키셨으며,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를 위해 심판받은 분이시고, 심판자이자 동시에 심판의 준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가 받게 될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심판은 그분을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그저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희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27.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75항)
교회의 사회참여, 하느님의 가르침 따른 식별이 중요
마리아: 신부님, 질문이 있어요.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이 정말로 첨예하잖아요? 그러나 신자들이 사회적 약자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도 잘 알겠어요. 그런데 사회적 갈등 문제가 정치로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런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교회의 사회참여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질문은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들일 겁니다. 특히 “교회가 왜 세상 일이나 정치에 관여하는가?”, “사제들이 왜 미사 중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가?”와 같은 의문에는 교회의 분열을 우려하는 마음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공동체는 원천적으로 세상 일에 관여하면 안 되는 걸까요? 탈출기에서 파라오의 압제 때문에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1987년 민주화 운동 당시 박종철 열사 고문 사망사건 때 명동대성당에 찾아온 경찰들에게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 자신을 밟고 지나가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가요? 또, 환경오염과 기후위기의 심각성도 시급한 세상 일이자 국제정세 중 하나인데 교회에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주제일까요?
식별
이처럼 개인이나 신앙공동체가 무조건 세상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는 세상일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고 생명을 위해 낮은 곳으로 가야 하며 어려운 이웃들과의 동행을 항상 강조합니다. 또한 세상의 불의에 맞서 복음을 증거함이 신앙인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는 대전제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식별입니다. 세상일은 그 자체만으로 선악을 구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교묘하게 위장되고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식별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태의 경우, 비록 미량이더라도 장기적으로 방사능이 인간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 현재의 과학은 미래의 위험을 알지 못합니다. 핵과 방사능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분야이기에 가톨릭교회가 반대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몇십 년 후에 책임질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하느님의 가르침
이밖에도 식별이 필요한 상황은 무수히 많습니다. 여기에서 중심은 바로 하느님 말씀과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취향과 기호만을 우선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도 논란인 동성애는 어떤가요? 동성을 사랑하고 함께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분명히 상치됩니다. 엄연히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있음에도 자신들의 기호를 하느님의 가르침과 혼동합니다. 그 가정이 온전할지도 의문이며, 과연 참된 사랑일지도 의문입니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핍박받는 사회적 약자라며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견해를 관철시키려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자신들을 배척한다고 스스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분들을 형제로 대하고 축복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사회 현상과 정치적 움직임을 교회의 가르침대로 잘 식별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다음 회에는 두 번째 어려움인 ‘일치’를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신앙의 빛을 받은 지식이고, 그런 만큼 더 큰 지적 능력을 드러낸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모든 사람에게 교회의 사회교리가 단언하는 진리와 요구하는 의무에 관하여 설명한다.”(「간추린 사회교리」 75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