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보면서
단 한번도 오해를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상대를 배려해서
그렇게 한 행동이
오히려 미워해서 따돌린 것으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오해는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고
가장 친한 사람에게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심각하고 어려운 오해들이 생기기 쉽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기다리고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참아주었으면
이 세상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오해로 생긴 사생아
얼마나 많은 분쟁과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얼마나 많은 아픔을 해결될 수 있었으랴!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내 나름대로 넉넉히
상대방을 위해 배려하고,
내 나름대로 넉넉히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준다고 해도
우리는 죄인들은 여전히
이기심과 자기라는 벽을 뛰어넘기가 어렵다.
뛰어쓰기 하나만 잘못해도 큰 오해가 생긴다.
바른띄어쓰기 : 서울시 체육회
잘못된띄어쓰기 : 서울 시체 육회
바른띄어쓰기 : 서울시 장애인 복지관
잘못된띄어쓰기 : 서울시장 애인 복지관
바른띄어쓰기 : 무지개 같은 사장님
잘못된띄어쓰기 : 무지 개같은 사장님
바른띄어쓰기 : 게임하는데 남자친구가 자꾸만 져요.
잘못된띄어쓰기 : 게임하는데 남자친구가 자꾸 만져요.
바른띄어쓰기 : 나는야 한 여자가 좋다.
잘못된띄어쓰기 :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성경에도 그런 오해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호수아서는 24장으로 구성되어있고,
정복과 분배로 구분된다. 1-12장은 정복, 13-24장은 분배이다.
가나안 정복전쟁을 마치고
땅은 12지파에게 골고루 잘 분배되어진다.
20장에서는 6개의 도피성이 정해지고
21장에서는 레위인들을 위한 48개의 성이 정해지고
모든 일들은 순조롭게 잘 마쳐진다.
그 시점에 여호수아를 감동시킨 것은
두지파 반의 헌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미리 땅을 분배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전쟁에 선봉에 서고,
마지막 까지 잘 싸워주었고,
임무를 마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하명을 기다렸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3]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수 22:2-3)
그리고 그들을 향한 신앙적 당부도, 축복도 아끼지 않는다.
“[4]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수 22:4-6)
그들이 가고 난 얼마 후
한 이상한 소문이 들려온다.
그들이 또 다른 제단을 쌓았다.
그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섬기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고, 분노할만한 일이고, 징벌해야할 일이었다.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후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한 곳을 정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다름아닌 실로였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 18:1)
출애굽기에서 성소가 지어준 이후로 늘 이동하며 다녔다가, 실로에 이제 정착된 것이었다. 실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둔 처음 처소였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렘 7:12)
그런데 감히 다른 곳에 제단을 쌓다니, 그것은 배교였고, 배신이었다.
그래서 즉시 비느하스를 중심으로 전투를 위한 군대가 조직되었다.
비느하스는 두지파반을 향하여 분노하며 말한다.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수 22:16)
너희들이 지금 한 일은 싯딤에서 바알을 숭배한 것과 같은 것이요, 여리고 성의 함락 후에 온전히 바친 물건을 훔친 아간과 같은 짓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하려 하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그런데 사실 두 지파반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그들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닌데,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배반하고자 함도, 다른 우상을 섬기도자 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뛸만한 오해였다.
그들은 칼을 들고 죽이려 온 그들의 무서운 오해를 보고 감정적을 대하지 않았다.
당신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렇게 할 수 있어, 해도 해도 너무하네,
우리가 어떻게 너희를 위하여 싸웠어,
우리가 어떻게 너희들을 위해 잘 해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당신들이 말하는 것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 사람을 오해해도 유분수지, 우리 누가 힘이센가? 한번 싸워볼까?
너희들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무슨 우리들도 너희들만한 믿음이 있어!
이렇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앞에 간곡한 심정으로 기도를 드렸다.
“[22]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23]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또는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거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수 22:22-23, 개정)
그리고 차분의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앳 단을 만든 3가지 아름다운 목적>
① 여호와 신앙의 보전
② 이스라엘 지파간의 연대의식
③ 후손들을 위한 교육하기 위한 것입니다.
“[24]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 것은 훗날에 여러분의 자손들이 우리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소? [25] 하나님은 당신들에게 요단 강 저쪽 땅을 주셨소. 그 요단 강은 당신들 르우벤과 갓 사람과 우리를 가르는 경계선이니 당신들은 이 곳에서 여호와께 예배드릴 수 없소’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손이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것을 여러분의 자손이 못하게 할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26] 그래서 우리는 이 제단을 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번제나 다른 제사를 드릴 생각으로 이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수 22:24-26, 쉬운)
“우리가 제단을 쌓아 여호와께 등을 돌려 범죄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나 곡식 제사나 다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막 안에 있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수 22:29, 쉬운)
그들의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한 설명으로 오해가 풀어졌다.
“[33] 이스라엘 사람들도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만족하게 여기며 여호와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들은 르우벤과 갓의 백성들이 사는 땅에 가서 그들을 공격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34] 그후에 르우벤과 갓의 백성은 그 제단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들은 그 제단을 ‘엣’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믿는 증거다’라는 뜻입니다.”(수 22:33-34, 쉬운)
“가장 가치 있는 동기에 의하여 행동하는 자들 중에서도 단순한 오해로 인하여 큰 어려움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정중하고 관대하게 다루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결과까지 따르게 되는가! 열 지파는 아간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그들 중에 존재하는 죄악을 발견하기에 조심 없이 행한 일에 대하여 어떻게 견책하셨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신속하고 진지하게 행하기로 결심하였으나 먼저번의 과오를 피하려는 노력 때문에 반대편의 극단에 치우치게 되었다. 그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하여 정중하게 문의하는 대신에 그들은 비난과 정죄로 저희 동포들을 대하였다. 만일 갓과 르우벤 사람들이 동일한 정신으로 반박하였더라면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부조, 519)
“자신들의 행위에 관하여 자책하는 데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을 매우 혹독하게 취급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일찍이 비난과 힐책으로 그릇된 태도를 교정받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 바른길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저희 마음이 굳어져서 죄를 뉘우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친절한 정신과 겸손하고 관대한 태도가 과오를 범한 자를 구원할 수 있고 많은 허물을 가리울 수 있다. ”(부조, 519-520)
“르우벤 족속과 그 동료들이 나타낸 지혜는 본받을 가치가 있다. 참된 종교적인 사업을 추진시키고자 정직하게 노력하였으나 그들은 잘못 판단을 받고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울분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기 전에 저희 형제의 비난을 예의와 인내로 다 들은 후에 자신들의 동기를 충분히 설명하고 저희의 무죄함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뻔한 어려운 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부조, 520)
“거짓 비난 아래서라도 의로운 자들은 침착하고 사려 깊게 행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잘못 해석된 모든 것들을 잘 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사정을 안전하게 위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죄를 찾아내신 것처럼 분명히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의 사정을 옹호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행하는 자들은 오래 참고 온유하게 행하는 사랑을 소유할 것이다.”(부조, 520)
“하나님의 백성 사이는 연합과 우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전에 드리신 그리스도의 기도는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하나가 되게 하여 세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었다. 이러한 가장 감명적이고 놀라운 기도가 각 시대를 통하여 내려와 현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는 당신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라고 말씀하신 까닭이었다. 우리는 진리의 한 원칙도 희생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이같은 연합의 상태에 도달해야 함이 우리의 끊임없는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증거이다. ”(부조,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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