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이 없었다. 퇴원해서 집에 가면 전화한다더니, 기다린 두 달이 어느덧 2년을 넘겼다. 전화기 버튼을 누르고 답이 없다는 건 너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지 못했다.
사회 초년생으로 우린 만났다. 난주라는 이름의 친구다. 여드름을 치료하러 병원을 따라다녔고, 주말이면 산에도 공원에도 같이 가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서로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마음이 고우면서 여린 친구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을 잡고 다정히 둘이 서 있다. 그건 빛바랜 흙 백 사진일 뿐이다.
어느 날 난주는 함안 시골집으로 간다고 한 후에 소식이 끊겼다. 서로가 시골집이고 지금처럼 전화도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이라 연락처를 주고받지 못했다. 헤어진 후 문득문득 생각났지만 긴 시간 잊고 지냈다.
7월의 어느 여름이었다. 나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아냈을까, 난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보고 싶다고 했다.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무슨 말부터 할까, 이제 만나면 사는 날까지 많은 이야기 나누고 얼굴 자주 보겠다며 마음먹었다. 20대에 헤어져 50대에 다시 만나는 것이다.
울산 원자력 암 병동이었다. 배가 부른 난주는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힘주어 웃을 수도 없고, 혼자 옆으로 마음대로 몸을 뒤척이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힘없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푸석한 얼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겨우 손을 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라고 애써 믿고 싶었다.
난주에게는 연년생 언니가 있다. 남아선호 시절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굳이 바라거나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두 딸만을 귀하게 키웠다. 난주가 22살 되던 해, 가볍게 알고 지내는 동네 사람이 군에서 휴가를 나왔다. 얼떨결에 데이트가 아닌 예의상의 만남이었다. 일방적인 격한 애정 공세에 놀라 반항하자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의 거친 손은 청초한 난초를 단숨에 꺾어 버리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여관방이었다. 남자는 그동안 난주를 사랑했었다며 결혼하자고 했다. 난주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의 상황을 저주했고 몸부림쳤다. 남자는 군에 복귀했고 단 한 번의 사고로 난주는 임신 되었다.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강물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수없이 느꼈다고 한다.
지금은 혼전 임신을 당당히 혼수로 여긴다. 형제간의 혼인 순서가 바뀌어도 집안 수치로 여긴 그 시절에 난주 아버지는 불러오는 딸의 배를 보며 친척과 동네 사람을 볼 면목 없다며 충격으로 쓰러졌다. 이듬해 돌아가시고 말았다. 배 속 아이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난주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늘 괴로웠고 자신이 원하지 않은 탈선해버린 인생행로에 늘 우울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분노와 체념과 용서가 되풀이되었지만, 마음에 박힌 화의 근원은 뽑히지 않았다. 평생 용서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 살았다.
해감하듯 난주는 지난 삶을 토해내고 있다. 고해 성사하듯 좀 더 일찍 너의 아픔을 토해내고 용서하고 체념했더라면 비단결 같은 너의 마음이 지금처럼 멍들고 병들지 않았을까, 지상에서의 마지막 얘기일 것 같은 너의 삶에 반추된 내 삶의 눈물은 두 눈 속으로 삼켜지고 있었다.
아랫배 통증이 심하여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진찰 결과 자궁암이라 하여 급히 동네 병원에서 수술받았다. 수술 후 회복이 되지 않고 배의 통증이 계속되어 암 전문병원으로 옮겼더니 예상 못 한 간암이라 했다. 연이은 두 번의 수술로 기력이 쇠진하여 힘없이 누워 숨을 몰아쉰다.
집은 부산에서 가까운 덕계리라고 했다. 시댁에 농사가 있어 땅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꿈꾸던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부끄럽고 속상했고 수치스러워 일체 연락을 끊고 숨죽이며 지냈다고 한다. 남매를 두고서도 아직 남편이 밉다고 했다. 젊은 날의 엄마를 쏙 닮아있는 딸은 엄마의 상처를 아는지 모르는지 저만치서 남자친구와 웃고 있었다.
7월의 여름은 더웠다. 일주일 후 몸에 감기지 않을 까슬한 홑이불 하나 챙겨 들고 다시 병실을 찾았다. 별 차도가 없어 보였고 곧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닐 거란 생각으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제 병원은 그만 오라고 했다. 곧 퇴원할 거라며 집에 가면 전화한다고 했다. 집 전화번호와 핸드폰 번호를 받았다. 퇴원 후 집으로 친구를 만나러 꼭 가겠다는 약속도 했다.
난주는 아이들 속에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아프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나를 헤집어 너에게 보여줄 수 없지만 내 삶도 아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검은 그림자로 풍전등화인 난주의 마지막 모습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떠나는 자의 슬픔보다 남은 삶이 덜 아파야 했다.
혹시나 차도가 있어 퇴원하였을까,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다. 두 주 후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들릴 뿐 받지 않았다. 두세 번 더 연락해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가는 것도 연락하는 것도 난주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 같아서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두 주가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2년이 넘겼다. 그 후 3년을 더 기다렸지만 끝내 연락이 없었다. 이제 난주의 이름을 지우고 보내기로 했다. 삭제를 누르니 난주의 이름이 내 핸드폰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 마주했던 가족의 죽음은 삶에서 가장 슬픈 고통이었다. 친구의 죽음은 삶의 끝이었다. 이제는 마지막 자유가 두렵지 않다. 여유롭게 떠날 준비를 나는 무시로 하고 있다. 죽음은 새의 완전한 자유이며 비상飛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