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혹은 알렉산드로스, Alexandros)은 마케도니아의 왕이다.
알렉산더 대황은, 그리스를 정복하고 동방으로 진출하여 기원전 330년경에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및 인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는, 제국의 각 지역마다
그리스인을 이주시키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각처에 세우고
그리스문화를 널리 보급시킨다. 그리스문화와 이민족문화를 융합시키려고 그리스인
군인과 정복지의 여성들을 집단 결혼을 시키기도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를 융합시킨 헬레니즘 문화는, 한때 에게 해 주변의
전 지중해를 중심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그 영향력이 서쪽으로는 영국, 그리고 동쪽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까지 뻗어나갔다.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말은,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hellenizein'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
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 사상. 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대계이다.
헬레니즘은 19세기 초 인도의 역사가 J. G. 드로이젠에 의해 정의되었다.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두 문화를 뽑자면, 바로 이 헬레니즘, 그리고 또 하나는 헤브라이즘이다.
[헬레니즘의 여러 국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는 달리 군주정체(君主政體)가 전형적인 정치형태였다.
헬레니즘 왕국 중 3대 강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시리아 왕국, 셀레우코스 왕국,
그리고 잔존한 마케도니아 왕국이었다.
[사회. 경제]
헬레니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농업이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리스가 경제. 사회
생활의 중심이었다. 토착민은 사회. 경제 활동에서 제외되었으며, 헬레니즘화한
상류층만이 참여했다.
1) 사회 : '그리스인의 디아스포라'(그리스와 에게 해에서 온 많은 그리스인 이민과
소수의 마케도니아 이민)의 소수 상류층이 관리와 육군. 해군 및 궁정의 높은 지위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인. 사인. 공인. 교사. 의사. 예술가. 기술자로
일했다. 그리스인 또는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들인 마케도니아인이었던 그들은 헬레니즘
화한 동방인과의 혼혈로 이어졌고, 이들이 중산층을 대표했다.
2) 경제 : 농업이 경제생활의 기반이었다. 사유지가 증가했으나, 가장 넓은 토지의 소유
자는 국왕이었다. 그 외의 토지에 대해서는 무거운 세금이 매겨졌다. 또, 소금은 왕가의
독점품목이었으며, 이집트에서의 대표적인 독점 물자는 기름. 종이. 곡물이었다.
* 디아스포라 Diaspora :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이며, 특정민족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교육과 문학]
초기에는, 그리스 고전시대의 연속이었다. 수사학은 역시 헬레니즘적 교육의 지배적인
요소였다. 고르기아스. 이소크라테스 등 전시대 이론가들의 기본적인 이념은, 좋은 말은
좋은 사상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사학 교육의 복잡한 조직은 자챗 자화자찬
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 문체가 화려하고 공허한 형식주의로 기울었다.
그러나 BC 1C에 로도스 섬에는 건전한 수사학파가 존재해 로마의 위대한 변론가인
키케로와 유명한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
문학에 있어서는, BC 3세기의 시인으로서 제1인자였던 칼리마코스가 유명하다.
BC 100년경의 시인 멜레아그로스의 사화집 <스테파노스 Stephanos>가 있다.
로마제국의 연극 공연물 중 가장 대중적인 형식이었던 판토마임은 그 기원을 헬레니즘
시대에 두고 있다. 예술 형식으로서의 소설의 기원은 헬레니즘 시대에 귀착된다.
[학문]
알렉산드리아 사람은 많은 고전 작품을 보존하고 판독 가능한 문헌을 정확히 입증했다는
점에 공적이 있다. 이리하여 이 시대에 고전문학이 탄생했다. 고전문학의 시조는 호메로스
이며, 그 작품은 제노도토스와 아리스타르코스에 의해 편찬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사람들이 후세에 남긴 업적은 아테네의 비극과 희극의 텍스트와 현존하는 선집을 편찬한
일이다.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의 학자는 언어와 문법연구에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디오니시오스는 오늘날까지 유용한 문법용어의 대부분을 최초로 만들어냈다.
[미술과 건축]
미술과 건축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 미술의 계승이다. 건축은 전반적으로 거대한 규모로
축조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예로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가 대표적이다.
조각은 수요가 많았고, 고가에 매매되었다. 초상 조각은 이 시대의 위대한 업적의 하나
였다.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상>의 리시포스를 들 수 있으며, 그밖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밀로스 섬 출토의 <아프로디테 상>(루브르 미술관). <키레네 아프로
디테 상>(로마 테르메 미술관), 로마에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지배자>등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여성적 관능미와 근육이 왕성한 남성미를 강조했다.
[철학]
더이상 독립 도시국가의 시민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 윤리의 전통적인 기반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활의 새로운 기준을 찾으려는 요구가 높아지면서 여러 부류의
철학자가 이에 대해 고심했는데, 그들은 모두 본래는 일반 시민에게 왜 불행과 고통을
피해야 하는가를 설파한 도덕가들이었다.
그 가운데 디오게네스가 수립했던 견유학파(犬儒學派)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들은 원시적인 자기만족의 생활을 주장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 것도 써서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대개 테베의 크라테스와 같은 편력의 설교자로서 시와
산문을 썼다. 그들은 새로운 문학형식, 특히 대중을 향해 설교와 풍자문을 보통의 운문
으로 썼으며, 이것을 패러디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 견유학파(犬儒學派) : 키니코스 학파(Cynics)라고도 한다.
'cynic'은 '개(canine)'에서 나온 말로, '개와 같다'는 뜻이어서,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아테네에 출현한 새로운 2개의 학파, 즉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이미
진리의 발견보다는 개인적 행복에 이르기 위한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논리는 폴리스 사회의 논리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참된 목적은, 간의 혼을 혼란하게 하지 않는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에
있었는데 공포. 고통. 감정에서 해방되는 것이 그 기본이었다. 데모크리토스의 유물주의적
원자론에 자기 철학의 기초를 둔 에피쿠로스 학파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가지는 과학
적인 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감정생활의 유물론적인 설명을 위한, 또 심신(心身)
과 관련한 사실에 대한 비범한 통찰에 대한 근거로써 이용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 대부분은 필로데모스 또는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와 같은 열렬한 추종자들에
의해 후세에 전해졌다.
스토아 학파는,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페니키아인에 의해 정립되었고, 그가 아테네에서
강의했던 스토아(주랑 현관)의 이름을 기념하여 그렇게 불렸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그리스
적이며 견유학파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학파의 가장 오래된 선구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이며, 그의 로고스는 영원한 법칙에 의해 우주를 지배하는 섭리 또는 자연으로
재건되었다. 로고스는 물질적인 모든 것에 내재하는 '정신(pneuma)'이며 자연현상에 관한
최종적인 설명을 부여해주는 역학적 힘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도한 그것은 합리적인 심리학과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 이론에 따르면,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노예 사이에는 각각 아무런 차이도 없다. 모든 인간의 형제애라는 위대한 이념은 스토아 학파
에서 정점에 달했으며, 그들은 완전한 덕을 얻어 전적으로 자기충족적인 인간이 되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시대의 어떠한 철학적 종교에서도 신은 부속물과 다름이
없었다. 스토아 학파는 신화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스토아 학파의 철학은 공적인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는
스토아 학파의 조언을 바탕으로 많은 사회개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