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종 시모음 2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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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송이 나팔꽃
이필종
쥐똥 같은 몸피에서
어둠을 열고 나와
비바람에도 푸른 날개를
허공에 편다
은은한 나팔소리는 천사의 손길 같은 꽃
한 송이 나팔꽃
나팔 한 번 크게 불고 싶어
새벽녘까지 버텄다
하루를 건너온 한 사람을 위해서
석양 무렵
간절하고도 간절한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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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징검다리
이필종
온갖 풍파에 멍든
넓적 돌
오가는 사람들에게
등을 내밀어 준
사랑을 찾아 갈 때나
오일장 왁자한 날도
묵묵했던 다리
어머니 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 들으며
아우의 손을 잡고 건너갔던
불현듯 그리운
아버지의 등 같은
서러운 다리
내 가슴에 아련한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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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스탄불의 아침
이필종
허공에 걸린 수많은 첨탑들
블루모스크에서
은은한 경전 소리로 아침을 깨운다.
영롱한 대리석 기둥, 공간의 절묘함
상현달 같은 우람한 지붕
성소피아성당도
사라진 제국들의 성쇠에 따라
두 얼굴로 고독하다.
톱카프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의 호화찬란한
유물과 유적들
제왕들의 말발굽 아래 신음했던
백성들의 피와 땀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깊은 물은
두 대륙 사이에 도도하게 굽이치고
언덕 위 빛 바랜 집들은 예대로다.
역사는 국가의 흥망을 오늘에 말한다
탐욕과 야망은 한 순간이라는 것을…….
아침을 연다,
오늘 이 길이 아득함으로
훗날 후손들에겐 전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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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행길에서
이필종
은빛날개가 화살처럼
광활한 허공을 휘어 가른다.
가이드의 깃발에 모여든
한 무리의 낯선 사람들
쉴 틈 없이 이리저리 몰리면서
숨 가쁜 나날 휘청거린다.
그래서, 여행은 고행길이라 했던가!
하루의 황홀하고 비감한 것들이
가슴에 슬프도록 영롱한 등불이 되고
어렵게 살아도 미소가 떠나지 않는
원주민의 삶에서 행복을 본다.
밤하늘엔 고향이 그대로란 듯, 별들 속삭이고
나만 외톨이 나그네다.
자연은 스스로
인간은 사유思惟로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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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순천만
이필종
순천만
가을이 내려앉으면
갈대밭은
황금빛 소슬바람에 몸짓 화려하다
순천만의 돔 같은
섬
섬
섬
용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계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
굽이굽이 돌아 순천만을 탐하고
갯벌에서 생명들이 숨을 쉬면
석양에 해는
바다에
붉은 빛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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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산중암자에서
이필종
깊은 산, 바위 위에
등신불이 서계시다
청아한 염불소리
석양을 물들이자
비로소 ‘해탈’에 드는
밤하늘
밤은 시방 이슥해진다
고요의 한가로운데
나 홀로
무거운 시름만 깊어지고
새벽빛, 먼 산등성 붉고
생각은 푸른빛으로 청신하다
무릇, 너와 네가 따로 없다
산채 소반 넉넉하고
맑은 차향에 마음 주면
소삽한 마음 쓰다듬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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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산
이필종
한 점 구름 비바람 싣고
씨앗 한 톨
산 등선은 평생을 푸른빛이다
수억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서서
햇빛 물, 바람을
품어주고 내어주는 생명의 땅
산의 청순한 기운이시다
관음 바위 앞에 서서
세상 곳곳에 남긴 허물로
나는 슬픈 참회의 묵상을 한다
산은 다독이는 노을에 잠이 들다가
동트면
푸르도록 황홀한 하루를 준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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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부
이필종
투박한 껍질 속
알알이 박혀있는 보석 가득한
무화과
꽃처럼 과일처럼
봄여름을 건너
한 줄기에 매달린
무화과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부부는
힘든 삶마저도 의지하며
한 세상을 건너간다
향기는 없어도
보석 같은 무화과를 닮은 것이 부부라면
인생의 동반자 부부는
묵묵히
삶의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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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별빛 가득한 마을
어느 <사진전>을 보면서
이필종
히말라야로 가는 길
고산(高山) 준령(峻嶺) 산기슭에는
자연을 자연으로 사는 원주민이 산다.
이웃 마을도 준령 너머
성채의 미로를 따라
돌계단이 천국길인가-
전설의 주름살로 조상 대대로 숨을 쉰다.
산비탈에 일군 논밭들
오르다가 또 오르다가 가슴 비워 가는
도량道場이다.
노을마저 황홀하게 놀다간,
이슥한 밤
별들이 산을 낮추는 밤이면
마을은 꿈이고
마을사람들은 별이 되어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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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백두산 정상에서
이필종
천하를 한 품에 안은 백두산 정상이다
경이롭고 장엄하다, 광활하고 벅차구나!
세월도 멈춘 이곳에 나도 멈춰 세운다
신비로운 천지 물결, 순결하고 서늘하다
깊은 물속 보던 하늘, 봉우리 함께 있고
바람이 흰 빗질하니 꽃구름 탄 신선이다
신의 한 수 비범하다, 겨레의 얼 비감하다
백두산 모시는 게 소원이던 ‘조상의 꿈’
아버지 생전 모습에 내 가슴만 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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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백두산
이필종
백두산은 민족의 혼이다
상징이다
장엄하다 천지
장백폭포 흘러내리는 소리
산을 흔들고 삼천리강산을 적신다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은
금강산의 비경과
지리산 천왕봉을 통과하면서 민족의 혼이 되었다
백성들은 몸 붙여
도시와 마을에 둥지를 틀고
삶을 이어 가면
백두산 정상에 서서
마음속에 접어두었던 말
꺼내본다
‘눈감기 전에 보고 싶다던 아버지 말씀’
문득 목에 잠기면서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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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배롱나무 꽃
이필종
이름 없는 산사 모퉁이
한 그루 배롱나무
조석으로 목탁소리 듣더니
배롱 배롱 배롱꽃 피워냈다
백일을 기도하면
붉어지는 꽃 배롱나무 꽃
가지마다 어머니의 등불 밝혀 놓고
서방님의 만수무강
자식들의 부귀공명
빌고 도 빈다
배롱꽃 향기 허공으로 퍼지면
잊었던 어머니가
배롱 꽃이 되어 환희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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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바람의 꽃
이필종
이 세상의 꽃들은
바람 따라 피고 지며
잠시 허공 머물다 사라지는
바람의 넋이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자리는
한 톨의 씨앗으로
천국에 사는 영혼을 준비한다.
뒷걸음치며 혼자라서 힘들 때
“바람이나 쐬고 오너라!”
등을 토닥여주시던 아버지
그 한 마디가
가야할 바람길 열어주신
흔들려 피어나는 나의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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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민들레
이필종
산기슭 바위틈에
한 송이 민들레꽃
저 아스라한 깊은 곳, 전설의 꽃
인고의 세월, 활시위에 실려
금세 허공 휘어갈 고독함에
은빛 날개는 은은하다
솔바람 따라 산 넘고 강 건너
조상이 남긴 한 뺌의 터에서
어머니처럼 정금하며 가슴앓이 하리!
한 생애 피지고 사그라져도
제 몸 갈무리하는 정결함을 본다
이 세상 유랑 길에서
나도 저리 한 순간을 홀연히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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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단풍 단상
이필종
손바닥 같은 단풍이 손을 들어 보일 때
안녕 이라는 말 대신
그리움의 눈짓을 보내고 싶다
가을이 곱게 물들어 혼자서 바라보기에는
꽃단풍이 황홀하다고
무서리 내린 아침에 그리움을 꺼내보며
지난 밤 내내
여울져 가는 가슴을 달랬노라고
단풍잎에 보고 싶다는 말을 꾹꾹 눌러
한 통의 편지를 쓰고 싶다.
이 가을이 다 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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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노을
이필종
석양, 하늘 맞닿은 바다
고도의 섬은 황홀하게 물들어 간다.
나는, 한 마리 갈매기
눈부신 허공 가르며 날아가노라니
어느 황금빛 부서지는 언저리에
빛바랜 어선처럼 닻을 내릴까?
바람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춤사위,
나도 한 점 바람을 앞서가며
내 빈 허공의 하늘에
마음 붓을 들어 가늠할 수 없는
처음과 끝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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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꽃무릇 옆에서
이필종
선운사 가을 언덕
맑은 햇살 부서지는 그윽한 곳에
슬프도록 선혈 쏟는
선홍빛 그리움
천년 종소리가
세상 골짜기마다 피눈물을 들이 듯
문득 다가오다 사라지는
누구 가슴엔들 그리움 없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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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귀향
이필종
세월 익어간 은발, 달빛에 시리고
고됨은 고독으로 더 고요하다
온갖 마파람을 맞아온 길에서
안개가 무시로 나를 가리는 들길에서
바람 흐느끼는 빈 뜰에도 서리꽃을 피리라
“구들장 지듯 세월 지고 있지 마라”
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 여전한데
그리움은 여전히 정수리를 치는구나
무릇 사람으로 맑을 수 있는 날까지
유랑 다하고 닿은 청산에 무슨 꽃을 피울까
옛 보던 산이라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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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간월암看月庵에서
이필종
저리 깊은 고도, 스님 떠난 지 아득한데
풍경소리 은은하고 전설마저
고요하구나
채우고 비워가는 인생, 바다기슭에
남루한, 한 생애도 철썩이고 있구나
중천에 걸린 달빛,
어둠 벗어나려는 선사의 발길 따라
무학대사 가슴이듯, 내 가슴에 등불을 든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로만 보인다”
누구 앞에서도 곧은 말은
천년을 간다
노승의 청정음으로 파도에 실려오고
어촌 포구에 나는 고요의 닻을 내린다.
*간월암: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 있는 암자.
무학대사가 수행하며 터 잡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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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덕유평전
이필종
백두대간 힘줄로 뻗어 내린
우람하고 장엄한 덕유산
산그늘 오르고 또 오른 수행의 길
하늘가 산릉 초원에 서니, 처처에
운무에 젖은 원추리 마을 은은한데
지상낙원이 따로 없으리
세월이 낙화한,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의 빈자리, 선비 절개 서려있어
부질없던 영욕의 세월을 치유하는 구나
나는 한 마리 기러기 되어
천년 사찰 백련사
노스님의 목탁소리 무심히 들으러 간다
가난했던 학창시절
법당에서 하룻밤을 하얗게 공양하고
대신, 소찬 한 끼 공양 받은,
도포 차린 옛 스님의 미소 자비였어라
아스라한 유랑도 찰나刹那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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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매화
이필종
섬진강 서늘한 물줄기
거슬러 오르니 아스라한 곳에
어둠의 늪
피맺힌 격랑의 피아골이다
산길 따라
물길 따라
자연을 피돌기로 살아가던
산촌 사람들
들숨 날숨 꽃 또한 사무사思無邪였으리
골짜기마다, 시리도록 선연한
산 사람, 그 꽃
산골바람은 그대로 푸른 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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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불현듯 그리운
아버지의 등 같은
서러운 다리
내 가슴에 아렩한
징검다리
저도 어릴적
징검다리의 추억이
있답니다
이 세상의 꽃들은
바람 따라 피고 지며
잠시 허공 머물다 사라지는
바람의 넋이다
바람의 꽃에는
희망이 있어요
꿈도 있지요
한 송이 나팔꽃
이필종
쥐똥 같은 몸피에서
어둠을 열고 나와
비바람에도 푸른 날개를
허공에 편다
은은한 나팔소리는 천사의 손길 같은 꽃
한 송이 나팔꽃
나팔 한 번 크게 불고 싶어
새벽녘까지 버텄다
하루를 건너온 한 사람을 위해서
석양 무렵
간절하고도 간절한 기도 드린다
좋은 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