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미국 뮤지컬의 거장 어빙 벌린이 작사, 작곡한 노래 <White Christmas>는 원래 영화 <홀리데이 인(1942)>에 처음으로 삽입됐던 곡으로 이 작품에 출연한 빙 크로스비가 불렀습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영화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이었습니다. 남태평양 각지에 주둔해 있던 미군병사들에게는 영화의 주제가 <White Christmas>가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는 노래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서 전선에서 귀환한 병사들이 이 노래를 부른 게 구전으로 알려지며 일반인들에게 호응을 얻어 뒤늦게 유행한 케이스입니다.
이 노래가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크게 유행하자 파라마운트사는 곡명을 딴 동명의 영화 <화이트 크리스마스(1954)>이 새롭게 제작되면서 원래 노래의 주인공 빙 크로스비를 출연시켰습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코미디배우인 대니 케이, 가수 겸 배우 로즈마리 클루니(배우 조지 클루니의 고모), 베라 엘렌이 공연한 영화가 개봉되면서 화제를 불러 모았습니다.
* 영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서...
빙 크로스비의 솜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의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웬만한 가수들은 저마다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빙 크로스비의 노래보다는 팻 분의 노래가 크게 유행했지요.
영화의 내용은 남태평양 전선에 참전했던 병사가 전쟁 중 사단장이 예편 후 전 재산을 털어 스키장과 호텔을 냈으나 몇 년째 눈이 오지 않아 파산직전에 이릅니다. 이를 알게 된 빙 크로스비와 대니 케이가 주선해 옛 전우들을 불러 자선행사를 벌이고 마침내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무대에 올라 <White Christmas>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창밖에는 그처럼 고대하던 흰 눈이 펑펑 내리면서 파티는 최고조에 달하며 끝을 맺는 이야기입니다.
빙 크로스비가 부른 이 노래는 1974년 12월 크리스마스까지 자그마치 1억3천5백만 장이 팔려 기네스북에 올랐습니다. 그 후에도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약 1백만 장이 팔렸다고 합니다. 노래가 나온 지 60년이 넘게 흘렀으니 아마도 6천만 장을 추가하면 대충 1억9천-2억만 장이 팔렸을 거라고 추측이 됩니다. 어마어마한 대기록입니다.
< 가수이자 배우였던 빙 크로스비 이야기 >
만화의 캐릭터에서 '빙'이라는 별명을 따온 크로스비는 그를 성공적인 가수로 만들어준 것과 똑같은 편안한 분위기로 밝고 가벼운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그는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힘겹게 노력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여유롭게 활동하던 그는 <나의 길을 가련다(1944)>에서는 신부(神父)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회상 속의 연인(1954)>에서는 그레이스 켈리의 상대역인 초췌한 술꾼 역으로 연기의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와는 <상류사회(1956)>에서 다시 공연을 합니다.
* 영화 <나의 길을 가련다>에서...
크로스비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밴드에서 연주하는 일을 훨씬 원했고, 1925년에는 음악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CBS는 바로 그에게 생방송 라디오 쇼를 맡겼습니다.
그가 라디오에서 성공하자 파라마운트사는 1930년대 초에 영화에 출연시켰고 덕분에 그는 <빅 브로드캐스트(1932)>와 <내 사랑 시카고(1936)> 같은 영화에 출연하여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1940년에 <싱가포르 가는 길>에서 밥 호프와 도로시 라무어와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 영화 <상류사회>에서 그레이스 켈리와 함께...
이어 그는 <홀리데이 인(1942)>에서 그 유명한 'White Christmas'를 불렀고 영화 <화이트 크리스마스(1954)>에서는 훨씬 더 긴 버전으로 다시 불렀습니다.그가 영화에서 부른 노래 중 Sweet Leilani(1937), White Christmas(1942), Swinging on a Star(1944), In the Cool, Cool, Cool of the Evening(1951) 등 네 곡이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습니다.
말년에는 친구인 코메디언 밥 호프와 함께 골프 코스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냈고 이따금 <로빈 후드(1964)> 등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만을 했습니다. 그러나 태평해 보이는 공적 페르소나와 달리 개인적으로는 비극이 따라 다녔습니다. 49세에 아내와 사별하고 5년 후에 재혼했으며, 생전에 일곱 명의 자식 중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