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진정한 효자
최 순 태
그와 나의 만남은 내가 대구광역시 도시철도 건설 본부에서 대구시 본청 재난관리과로 전입하던 2003년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재난관리과 산하 재난상황실로 발령받아 근무하였다. 재난상황실은 대구시 관내에서 발생하는 화재, 교통사고 등 각종 재난상황을 신속하게 해당 부서로 전파하여 처리하는 매우 중요한 부서이다.
그러나 사흘에 한 번씩 밤에 잠을 자면서 근무하는 열악한 환경에다 간이침대에서 가면상태로 일하느라 직원들이 일하기를 꺼려하는 기피부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3년간 근무하며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끔직한 사고로 기록되는 대참사인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화재사건 사고대책반에서 일했다. 지하철 참사로 인한 사망자의 유가족과 부상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분들의 사후대책을 마련하느라 전력을 다하였다.
재난상황실은 재난관리과에서 일정 인원을 지원받아 상황담당자와 같이 재난상황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와 밤을 함께하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와 참사대책반의 애로사항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나는 동년배이고 고향도 같은 경상북도여서 서로 친밀감이 있었다. 시청의 인사이동으로 잠시 떨어져 있었으나, 가끔 술을 나누며 수시로 교통하였다. 사람의 인연은 지속되는 것인가 보다. 공직생활의 마지막을 다시 도시철도 건설 본부에서 보낼 때 우리는 다시 만났다. 같이 일하면서 그가 중증치매로 투병중인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들이 없으면 스스로 거동도 할 수 없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인사부서에 특별히 부탁하여 본인의 자택과 가까운 근무지를 택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점심시간이면 집에 계신 어머니께 식사를 차려 드리는 등 정성이 대단하였다.
어머니가 치매로 판정받자 형님과 여동생들 등 가족들은 일단 요양원에 모친을 모셨단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그는 노모를 혼자 방치할 수 없다며 본인의 집에서 모시기로 하였다. 요즈음 자식들이 가정을 꾸리고 직장문제로 타지에서 생활하는 경향으로 볼 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어머니를 모시느라 60대 중반인 본인은 결혼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식사준비를 위해 요리학원에 등록하여 요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하는 내내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고 동료들과 유대관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려고 치매에 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여 사회복지사1.2급, 상담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하였다.
나 자신도 막내아들로서 노모를 잘 모시지 못하여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그의 희생은 감히 내가 따라잡을 수 없었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어머니에게 항상 미안한 감정을 가진다.
이렇게 효심이 갸륵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도 한 가지 달성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공무원으로 입문하여 일반 공무원의 꽃으로 불리는 사무관 승진을 위하여 무던히 노력하였으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끝내 무산되었다.
당시 실망한 그는 만취하여 나에게 한없는 넋두리를 하였다. 역시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자세한 탈락 이유는 모르나, 그의 나이가 원인이 된 것 같다. 군인들처럼 퇴직하기 전 일정기간 한 직급 승진시켜 주면 탈이라도 나는 것일까!
나의 어머니가 97세 일기로 돌아가신 2년 전 어느 날 그는 대구에서 멀리 김천까지 달려와 진심어린 조의를 표한 일은 잊을 수 없다.
그는 치매노인 자족모임 회장을 맡아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되기 전에 1년에 한 번 하모니카공연과 흘러간 옛 노래 등으로 위로공연을 하였고, 그 자리에 어머니를 손수 모시고 갔다. 이 행사에 내가 참가하기를 권유하였으나, 내가 하는 성악이 노인들을 흡족하게 하지 못할 것 같아 고사하였다. 행사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대구광역시 공무원으로 정년퇴직 후에도 여전히 그는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신다. 아들이지만 여자인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궂은일을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투병중인 어머니를 모시면서 겪은 체험담을 글로 작성하여 수기 공모에 출품하여 상은 받은 이야기를 읽어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자상하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기억을 상실하고 성격도 포악해 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그는 치매노인의 가족들에 대한 상담과 주간보호 알선도 하고 있었다.
자식은 어머니가 아파도 계속 본인 곁에 남아 있어 주기를 희망하나, 이러한 소망도 실현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올해 설날을 지나고 얼마 안돼서 나는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여 본인이 24시간 주보호자로서 병원에서 대기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후 며칠 동안 소식이 없다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서둘러 빈소를 찾아가 조문하였다. 영정 사진에서 그의 어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들, 딸 중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그는 무척 상심하면서 어머니가 5년만 더 살아 계셨으면 좋으련만 이라며 아쉬워 하였다.
자식은 효도를 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 법이다. 이제까지 진정으로 효도를 다한 그는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다 하였고, 이 시대의 진정한 효자였다. 앞으로 그의 앞날에 항상 행운이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2023. 02. 10)
첫댓글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분이네요,
큰 결격사유가 없으면 어머니 모시는 일 하나만으로도
승진사유가 충분히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디, ~~~
나이든 부모를 모시는 일은 삶의 근본입니다. 근본을 다하는 일은 의미있고 보람된 일입니다. 요즘 이를 회피하며 자신만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런 삶이 행복할까요?
60이 넘은 나이에 결혼도 하지않고 어머니를 모시는 효심, 아들 둘을 둔 어미로서 맘이 싸아 합니다.
치매 노인인 어머님 정상적인 어머니라면 본인이 아들에게 짐이 된다는 맘이 왜 없겠습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모시는 효심 존경스럽습니다. 효도 한번 옳게 해보지 못한 딸이어서 후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