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 카페에 올리려 하셨는데 아이디가 등급이 낮아서 못 올리신다고 대신 올려달라고 부탁하신 ^^;
일단 채효정 편집위원님 아이디 카페 등급은 조합원으로 올렸으나
제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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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래 맞아 맞아 쉽게 동의하는 글보다,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그랬나? 정말 그랬었나 회의하고
의심하는 글을 쓰기를 바란다. 대중적 호감보다는 대중적 불편함을 일으키는 글이기를 원한다. 글 속에 뼈가 있어 단번에 꿀꺽
삼켜지지 않고 불편하게 만드는 글, 오래 오래 씹어 나보다 더 내 생각을 잘 소화해주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글, 나의
글이 그런 글이기를 바란다. 늘 간절한 한 사람에게 닿는 간절한 하나의 글이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교육>이 발송되자마자 바로 조합원 리뷰가 카페 게시판에 올라왔다. 치열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한 글이다. 안준철 샘께 답글을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계속 시간에 쫓겨 차분히 앉아 쓰지 못했다.
신자유주의적 혁신담론이 혁신교육운동이라는 학교 운동의 역사와 중첩되어 '혁신'이란 용어를 공유함으로써 학교 현장으로 별다른 거부감없이 밀려들어오고 있는데 대한 반성과 경각심을 갖고 쓴 것이다.
혁신학교운동 초기에 나는 '학교밖 청소년 인문학교실' 프로그램으로 결합한 적이 있고 그 때 혁신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어떤
마음으로 학교에 대한 상을 다시 그리고 꿈꾸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의 헌신과 열정은 대단했고, 그 때 그 선생님들의 반짝반짝
빛나던 눈빛과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 이 선생님들에게 다시 뭔가 현장 운동의 계기가 생겼구나, 싶었다.
남한산초등학교의 학교운동에도 주목했다. 학교가 다시 운동의 현장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학교운동'의 꿈은 혁신학교의
확산과 제도화 과정 어딘가에서 좌초했다.
그리고 그 시기 '혁신'이라는 용어는 학교만이 아니라 사회 전 부문에
쇄도해들어오며 '사회의 지배적 가치'이자 새로운 이념이 되었다. 이 말은 자본주의 씽크탱크에서 탁마되어 공급되었고 미디어 권력과
부르주아 공론장을 통해 유통되고 유포되었다.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포장지임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신'에는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혁신'이란 단어에는 호감을 갖는다.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이 '언어의 통치술'과 '수사학적 위력'에 맞서, 한번은
깨부수고 싶었다. 나는 그 첫 망치를 들었을 뿐이다.
혁신 담론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부술 수
있을 때, 그렇게 할 때에만, 사회와 학교의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은, 사회혁신의 전략이 아니라 운동주체들의 '운동으로써',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학교가 운동의 장이 되기를, 정치의 공간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 혁신
담론에는 그 운동의 가치가 빠져있고, 위험할 정도로 탈정치화되어 있으며, 오직 사회 공학적 관점에서 사회의 재설계를 시도한다.
지금 자본주의 혁신론자, 기술 혁신론자들이 주도하는 교육혁신의 담론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교육공학적 관점에서 '교육의 재설계'를
추동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대학 혁신'을 보라. 절망적이다.
'혁신학교'라는 개념과 실천을 통해 진보적 교사와
교육운동이 '혁신'이란 말을 재전유하고 다른 의미로 사회화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착각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사회 혁신'이란
이름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오히려 우리의 혁신은 자본의 혁신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먹혀버렸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것이 첫번째가 아닐까. 학교 문제를 학교를 넘어서 전체 사회 구조의 변동 속에서
연결하여 사고하지 않으면, 우리가 만든 좋은 이념은 그냥 우리들의 선의와 좋은 시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 그 의도와 반하여 오히려 자본의 지배 이념과 통치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가 있다. 지금 특히 민주당
지지층을 위시한 리버럴 진영에서 환호하며 무분별하게 쓰고 있는 '혁신'이란 개념이 갖는 위험성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그럴수록 개념을 더 날카롭고 더 선명하게 분리해내야 한다. 피지배계급과 약자의 지적 투쟁에서는 그게 기본 아닌가. 지배언어로부터
나의 언어를 분리해내는 것, 그게 그거라고 뭉뚱거리는 사람들에게 맞서 같아 보이지만 아니라고, 실은 다르다고, 아니 우리가
말하는 것과 당신들이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게 우리 자신의 말을 갖기 위한 시작이 아닌가. 우리가 원하는
자유는 당신들이 주겠다는 그 자유와 다르다고, 우리가 하고 싶은 민주주의는 당신들이 하겠다는 그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 같다고,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자체를 전복하는 개념적 저항은 모두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던가.
나도 이제 시작이다. 다음 글에서는 90년대 이후 (범)진보 및 자유주의 교육이념과 운동의 계보를 한 번 추적해보고 싶다. 떠오르는 제목은 '혁신의 굴절 :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혁신인가' ...
안준철 선생님의 리뷰와 공현의 댓글을 읽다 보니 내가 다음에 무엇을 써야할 지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것 같다. 함께 물음을
던져주고 함께 고민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쓰는 이는 그런 집단적 사유의 대표 집필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또한 그런 필자가
되는 것이 좋다.
어쨌든 아래 리뷰에 담긴 간절한 메시지는 '사람들아 이 글 한 번 꼭 읽어보라'는 것 같다. 항력이 여전히 만만치 않게 느껴지지만. 글쓴이에게는 이만큼 새로운 자극과 힘을 주는 리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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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내 생각은 이랬다.
'혁신의 주어는 자본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실은 아닐 것이다. 혁신의 주어는 교사일 수도 있고 학생일 수도 있고 시민일
수도 있다. 현실의 학교 사회에서 지금 그런 것들이 혼재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지나칠 정도로 혁신을 교육의 시장화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필자가 말한 혁신이 혁신학교의 혁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혁신의 주어는
자본이다'라는 필자가 내린 결론으로 혁신학교에서의 모든 다양한 노력들이 곡해되고 폄하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강하고 주장의 상당부분이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해도 이것은 엄연한 오류일 수 있다.'
잠자리에 들어 막 스쳐간
생각들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타자 치는 속도로 거칠게 적어본 것이다. 어쨌거나 아침에 다시 채효정의 글을 읽었다. 나는 필자가 쓴
글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고, 내 생각도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 설득이 되었다기보다는 소중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혁신교육을 교육시장화의 관점에서만 사유하는 필자에 대한 불만이랄까 의문이랄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혁신의 주어는
자본이다'라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상당부분 동의하게 되었다. 오늘 읽은 글을 통해서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히 여기시라. 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부분적인 인용이 전체 내용을 오히려 왜곡할 수도 있겠기에 여기서 글을 끝내려다가 아쉬운 마음에 오늘
읽은 몇 구절만 맛 보기로 소개한다. 지면 관계상 이번 글에서는 넘어가는 정용주와 공현의 글과 더불어 꼭 일독을 권한다."
첫댓글 장모님 모시고 꽃구경 나왔네요. 집에 가서 쓰다보면 너무 진지해질 것 같아서 꽃그늘 아래서 몇 자 적습니다. 저는 채효정 샘의 글을 치열하게 읽었다기보다는 매료되어 읽었다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 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리뷰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혁신학교 경험이 전무한 저로서 더 이상의 의견 개진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 같네요. 다만, 오늘의 교육 이번 호에서 이상대 샘의 글을 감명 깊게 읽으면서 두 분이 대담 식으로 혁신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대 샘은 혁신학교 교장을 하시면서 채효정 샘이 우려한 점을 잘 감안하여
혁신학교 운동에 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채효정 샘으로서는 그 정도를 넘어선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요구할 수도 있겠지만 두 분의 대화(대담)가 일정 정도라도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리라는 좋은 예감이 듭니다. 자칫 온라인상으로 이루어지는 혁신학교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되 별 소득은 없는 소모적인 논쟁이 될 위험이 없지 않기에 이런 제안을 해봅니다.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이상대샘은 "혁신학교의 경험이 짧아 깊이 있게 잘 모릅니다만,(...) 그냥 쉽게 '교육의 본래 기능을 회복시키는 학교'쯤으로 생각해요"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하는데, 그럼 왜 하필 혁신이냐? 그것은 교육의 본래 기능을 회복하는 운동이 만만치가 않아서 혁신을 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붙인 이름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무지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하지만 전 이런 무지가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제 말씀은 혁신이라는 이름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저는 혁신학교의 뿌리는 전교조의 참교육일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전교조의 참교육이 완전한 것일 수 없듯이 혁신학교의 실천 또한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것은 사람의 문제일 수도 있고 시대적 한계일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이를 바로잡아가는 일일텐데 그 과정에서 채효정 샘의 '망치질'이 치유와 재건을 위한 소중한 계기가 되어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혁신학교 현장에 겨시는 분들의 갼절한 바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모든 사회적 실천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랄까요 이런 점에 과도하게 집중하다보면 실천 자체가 위축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봅니다. 깨부숨이 위로가 되는 따뜻한 망치가 될 필요가 있는 거지요.여기까지만 말씀드립니다.
채효정선생님의 글에 가슴이 뛰곤합니다. 나는 '혁신'이란 남성성의 전투적인 열정과 빛나는 아이디어로 혁신을 실험하다가 지쳐 나자빠진 자리를 , 보건, 상담 등의 고립된 여성성이 뒷설거지를 감당하고 있다는 분노를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 불만을 접할 때까지 있었습니다. 구조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혁신의 치열한 열정과 열심이 냉정한 머리와 이론의 토대위에서 다시 재점화되기를 바라는데, 그마저도 요즘 신세대 교사들에게는 전혀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교육공동체적 모델로, 우리가 옳다고 가르치기보다, 잠잠히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선배교사가 되어야겠다 싶지요. 성별 격차에서 한 번 톺아보고 싶은데, 음 시간이 .....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