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었을때부터 몽고군이 고려를 거의 무인지경으로 짓밟았다'(물론 소수의 영웅적인 승리가 있었지만)는 인식이 강한데요, 의외로 1차 침입때는 중반에는 나름 선전을 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듯 합니다.
뭐 이건 당연한 거기는 합니다. 초반에 너무 쉽게 몽고군의 서북지방 진출을 허용했고 후반에는 침입 범위가 개경을 지나 한반도 중부내륙까지 확대되니 말이죠.
하지만 중반에 의외로 선전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매우 짧게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동선역(동선령) 전투입니다.
초기 몽골군이 함신진(의주)를 함락시키고 바로 남하하였습니다. 그리고 서경에 이르기까지 황해안에 맞닿아 있는 고을들을 차례로 함락시켰죠. 하지만 서경(평양)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바로 남하하여 황주와 봉주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황주와 봉주(봉산군)의 관리들은 백성들을 이끌고 철도(대동강하구에 있는 섬이라 하네요)로 들어갔고, 그리고 이때 고려의 중앙군이 동선역에 당도합니다.
동선역의 위치
주황색 : 몽골군
노란색 : 고려군
큰 지도로 보면 왜 굳이 저기서?라는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좀 자세히 지형을 보죠.
주황색: 황주
노란색: 봉주(봉산)
빨간색: 동선령일대
지금이야 동선령 서쪽에 길도 있고 사리원으로 빠지는 루트가 있어서 동선령으로 가지 않아도 될테지만 그 당시에는 황주에서 동선역이있는 산길을 통과하여 봉주로 가는 루트가 가장 발달하고 빠른 루트였나봅니다. 그래서 몽골군과 고려군이 여기서 전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죠.
(출처:문화콘텐츠 닷컴)
삼군이 동선역(洞仙驛)에 둔을 쳤는데, 마침 해질
무렵에 첩자가 와서 적에게 변화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삼군이 그 말을 믿고 안장을 풀어놓고 쉬었는데,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
외치기를, “오랑캐 군사가 왔다." 하니, 군중이 크게 놀라 모두 흩어졌다. 몽고 군사 8천여 명이 돌연히 이르러, 상장군
이자성(李子晟)ㆍ장군 이승자(李承子)ㆍ노탄(盧坦) 등 5, 6명이 죽기로써 싸웠으나, 자성은 날아온 화살에 맞고, 노탄은 창에
찔려 겨우 죽기를 면하였다. 삼군이 비로소 모여 싸웠는데 몽고 군사가 약간 물러났다가 다시 와서 우리의 우군을 공격하므로,
산원(散員) 이지무(李之茂)ㆍ이인식(李仁式) 등 45명이 이를 막아냈다. 마산의 초적으로 있던 두 사람이 몽고 군사를 쏘아
시위소리와 함께 그들이 쓰러지니, 관군이 기세를 틈타 쳐서 물리쳤다.
-고려사 절요-
상세한 전투는 나와있지 않지만 몽골군이 선공을 했고 고려군사가 이를 물리쳤다는 이야기 입니다. 참고로 마산의 초적은 왜나오냐 하실 분도 계신데, 이 전투가 벌어지기전 초적들이 갑자기 최이에게 항복하고 군대에 자원하고 최우가 기뻐하면서 이들을 군대에 충원시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승리가 적에게 어느정도 피해를 안겨줬는지에대해서는 자세히 기록이 되어있지 않은데 이 전투이후 전장이 저 북쪽의 안북부(안주)로 옮겨갑니다.
노란색: 고려 중앙군 주둔지역과 이동
주황색: 귀주성
빨강색: 함신진
검정색: 고려 경내 몽골군 영향권(추정)
지도를 보시면 대동강도 넘어서 개성까지 곧장 가려했던 몽골군이 되려 청천강 이북까지 몰려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죠. 그리고 동선역 전투가 벌어지기전 '귀주성'에서 그 유명한 박서와 김경손의 대승리가 있었고, 초창기에 조숙창에의해 항복당했던(?) 함신진(의주)에서 요청이 들어와서 사람을 보내 몽골주둔군을 죽이고 백성들을 대피시키는 등 몽골군의 후방교란까지도 성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함신진에서 보고하기를, “국가에서 만일 배를 보내 준다면 내가 마땅히 성을 지키는 몽고 사람 소미생(小尾生) 등을 모두 죽이고,
다음에 온 성에 있는 것을 거두어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김영시(金永時) 등 30명에게 배를 갖추어 주어
보냈더니 과연 몽고 사람을 거의 다 죽였는데, 소미생은 먼저 알고 달아났으므로 부사 전간이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고
보신도(保薪島)로 들어갔다.....
-고려사 절요-
만약 이 지점에서 끝났다면 고려가 몽골군을 맞아 초반에 불리한 상황에 놓였으나 혼란을 수습하고 반격에 성공하였다라고 역사책에 기록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끝나지 않았죠.
안북성 전투(출처 문화콘텐츠 닷컴)
몽고군이 계속해서 안북성을 포위하고 도발하였지만 당시 북계병마사로 임명된 채송년을 비롯해 다른 장군들은 안북성을 지키려 하였지만 유일하게 후군진주 대집성만 야전에서 싸우기를 고집하였습니다.
마 싸나이라면 무릇 나가 싸워 끝장을 봐야지!
그래도 좀 상황을 지켜보는게.....
나 누군지 몰라? 나 최우장인 대집성이야 대집성! 내 의견따라야지!
결국에는 어쩝니까 최우장인이 이야기하는데 따라야죠. 하지만 억지로 나가서 밖에서 진은 치는데 다른 지병마사 및 진주들은 다 성안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자 야전을 고집하던 대집성도 성에 들어가버립니다(엥?). 그러다 보니 품계가 낮은 장군이나 병사만 야전에 남아 그 천하의 몽골군과 싸우는데 제대로 싸움이 될리가 없지요, 질질끌려다니다가 - 당연하겠지만 - 패해버리고 맙니다.
3군은 안북성에 진을 쳤는데 몽고군이 성 아래에 와서 싸움을 걸었다. 3군은 나가 싸울 생각이 없었으나, 후군진주(後軍陣主) 대집성(大集成)이 억지를 부려 결국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치게 되었다. 다른 진주(陣主)와 지병마(知兵馬) 등은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모두 성 위에서 바라만 보자 대집성도 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양 군이 맞붙자 몽고군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부대별로 대열을 지은 후 기병(騎兵)이 우리 우군(右軍)쪽으로 돌격해 왔다. 빗발같이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우군이 우왕좌왕하니 구원에 나선 중군(中軍)도 혼란에 빠져 다투어 성으로 쫓겨 들어왔다. 몽고군이 기세를 타고 아군을 추격하자 아군은 반 넘게 사상자가 났으며, 장군 이언문(李彦文)·정웅(鄭雄)과 우군판관(右軍判官) 채식(蔡識) 등이 전사했다.
- 고려사 -
대집성은 왜 야전을 고집했을까.
우리야 결과를 알고있으니 '대집성이 고집만 안부렸어도 안북성을 지켜내고 승리할 수도 있었어'라고 쉽게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전략적 판단이 아예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몇가지 추론을 해보자면
예전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도 귀주성 앞 야전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한 것인만큼 몽골군을 당시의 거란군과 비슷하다 생각하여 그랬을 수도 있고
우리가 그 거란군을 무려 야전에서 박살낸 사람들이야 알간?(강조는 뭐야 그럼)
가장 합리적인건 서경을 지나쳐서 동선령으로 왔듯이 안북을 포위하여 놔두고 개경으로 간다면? 지금 있는 군사 없는 군사 다 끌고 나왔는데? 예전 2차 3차 거란전에서도 경험했듯이 유목민족군대가 요새의 병력은 놔두고 곧장 수도로 진격하는 전략을 쓰는 것을 봐왔기에 그걸 우려 했을 수도 있죠(그리고 이는 나중에 조선도 경험하게 될 것이었죠)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 묘사한 이괄의 우려..... 그리고 이는 결국 현실이 되었죠 ㅜㅜ
합리적이유야 어떻든 우겼다가 자기 혼자 살겠다고 성안에 들어가 버린 사람의 의견이 뭐 중요하겠습니까만(핑계없는 무덤은 없다), 후대의 우리야 안타까울 따름이죠. 이 패배를 계기로 고려는 두번다시 몽골과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자주성과 귀주성에서 국지적 승리를 거두기는 합니다만), 1차 몽골전쟁은 고려의 항복으로 끝나고, 고려와 고려의 백성들은(일부 집권층은 제외하고) 앞으로 수십년간 현세의 지옥을 앞두게 됩니다.
여담으로 당시 북계병마사로 군을 지휘하던 채송년은 평강채씨의 시조가 되는데(아버지 채영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는 대집성을 통제 못했을 따름이지 그래도 동선역에서 작게나마 승리를 하고 안북성에서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등 장군으로서 크게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냥 무난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격도 온화해서 끝까지 잘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태가 단아 수려하였고 성품이 온화해 시종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시호는 경평(景平)이다-
고려사
첫댓글 궁금한게 있는데 저렇게 맞서싸운 곳의 백성들은 몽골이 진짜 다 죽였나요?
보니까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강간하고 죽인 뒤 젓갈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를 봐서요...
몽골군이 본보기로 학살을 많이 일으킨건 사실인 것 같아요. 중동 동유럽(특히 러시아)사료들에서 몽골군의 잔인함과 학살의 비참함에 대한 표현이 많이 언급이 되거든요. 다만 규모에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요.
뭐... 최우 장인이 와서 저짓 했으면 저건 단순히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최씨 정권의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고.. 야전에서 적을 섬멸해야 전쟁이 끝나는 것도 사실이긴 해서..
그리고 동선역에서 이겼다고 몽골군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나.. 싶네요.. 사실 몽골군이 무장 같은 것은 좀 비루하긴 하니까..원래 애네들은 접전해서 좀 불리하면 그냥 전투진형 풀고 달아나는게 기본전략이니 쉽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어쨌건 중앙정부는 빨리 애네들 밀어내야 하는 문제니..
전 저게 별로 아깝다고 생각되진 않는게.. 한 번은 야전을 시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고.. 최종적으로는 털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ㅡ.ㅡ;; 귀주 대첩처럼 몇년에 걸쳐서 군대 재건할 상황도 아니고 보면;;;;;;;
저 때는 대영제국 레드코트 수준의 몽골제국의 리즈 시절이라 맞다이 쳐서 이길 가능성은 많이 적죠.. 맘루크처럼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것도 아니고.,..
@델카이저 뭐 그냥 30년간의 몽골침략에서 고려가 유일하게 주도권을 쥐고 몽골군을 코너로 몰았던(?) 전황이 아니었나 생각해서 써 본 글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겼다고 해도 역사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테지만 말이죠....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