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부분을 인용구 안에 넣어서 알아보기 쉽게끔 했습니다.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여 읽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북독일 통합에 따른 경제 정책 혼란, 보오전쟁, 보수당 정부의 보호무역 정책, 군사력 팽창 등의 복합적 원인이 맞물린 결과 최근 3년 동안의 곡물 시세는 눈에 띌 정도로 상승하였습니다. 1853년 12월 19일,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시작된 빵 폭동은 전국 각지로 번졌으며,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보수당 정부에 책임을 묻고 내각을 개편합니다. 상원의 자유당 의석이 20% 증가하였습니다.
1854년 의회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이 강하게 일었지만, 그럼에도 자유당 의석은 10%만이 줄어들었을 뿐입니다. 사회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엔 자유당 의석이 오랫동안 42%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죠.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의 11%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자유당 의석이 42%로 되돌아왔다는 말은, 그 11%의 의석이 원래는 전부 보수당과 국민당 의석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흐름대로라면 5월 3일 있을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집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다행히도 보수당은 반동주의를 표방하는 국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간신히 과반을 확보합니다. 하지만 51:49의 비율은 숨길 수 없습니다. 1849년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고작 0.63%의 지지를 받았던 것을 떠올리면, 불과 5년만에 이렇게까지 성장한 것은 선거인단이 보수당의 정치적 능력에 상당한 불신임을 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음 총선거에서는 보수당 연정의 재집권을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막 등장한 사회주의자들은 아직 정치적 발언권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투표권자의 12%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을 보면 향후 캐스팅 보터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자유주의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보수주의는 여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자들과의 대타협 시도가 반동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면 극심한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1854년 11월 5일, 북부 슐레스비히의 덴마크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하여 연방의회의 결정이 떨어지는 날입니다. 독일 전체의 정세를 좌지우지해온 슐레스비히는, 덴마크와 합스부르크가 손을 떼면서 지금으로서는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열강들이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슐레스비히 내부에는 여전히 덴마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때문에 프로이센 당국은 이 지역의 행정에 큰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보수당의 당론은 강제적인 동화정책입니다. 2 정도의 악명을 얻고, 해당 지역의 북독일 문화권 이외의 주민들은 정치의식이 5 올라가겠지만 동화율이 10% 빨라집니다.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과 일부 자유당 의원들은 강제 동화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동화율과 이민에 있어서는 10% 손해가 되지만, 어쨌든 지역 정세의 안정엔 큰 기여를 할 겁니다.
문제는 국민당입니다. 반동주의적인 국민당원들은 보수당과의 연립정권에서 그 발언권이 상당히 커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강제 동화 정책이 의회를 통과합니다. 보수당은 국민당과 당론 자체엔 큰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보인 소극적 태도 때문에 국민당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습니다.
1855년 8월 3일, 베를린에서 발생한 단순 소규모 파업이 좌파 언론에 의해 증폭되어 전국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괴현상이 발생합니다. 특히 단치히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죠. 서프로이센 산업 종사 노동자들의 20%가 사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벨기에는 북독일 연방의 스피어 안에 들어와 있지만,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추격도 만만찮습니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를 압박하면 네덜란드가 어부지리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를 저지하지 않는다면 벨기에를 잃게 될 겁니다.
결국 북독일 연방은 벨기에의 프랑스 대사관을 닫아버립니다.
1855년 10월 17일, 리스본에 기항해 있던 북독일 해군 소속 증기선 SS 베를린이 폭발과 함께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보일러 과열로 인한 사고로 추정되지만, 이미 상당수의 신문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분노를 선동하는 기사가 작성되었습니다. 정부는 이를 필사적으로 무마하려 시도하지만, 국민들의 분노와 호전성이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곤경에 처한 보수당 정부는 고심 끝에 자유주의자들에게 손을 벌리기로 합니다. 정치적 스캔들을 회피하려면 더 큰 맞불을 놓아야겠죠. 비록 최저임금제와 의무교육확대 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인상을 받아 운동이 과격해지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투표권을 확대하여 상류층과 중류층이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개혁 12일만에 또 투표권 확대 운동-_-
온갖 정치 파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만 보이는 보수당 정부에 진절머리가 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55년 12월 1일, 내각을 해산하고 국민당을 대거 기용하는 결정을 단행합니다. 이때 프로이센 국왕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바흐 절대주의를 참고하여 반동정치를 실시합니다. 이를 신 절대주의 반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1849년부터 1859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내무부 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폰 바흐 남작의 1849년 초상화. 1852년 펠릭스 추 슈베르첸베르크 총리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 제국 정치는 내각회의(Ministerkonferenz) 체제로 변화합니다. 내각회의의 의장은 외무장관 폰 부올 백작이었지만, 사실 내무장관 폰 바흐에게 실권이 있는 셈이었죠. 이렇게 성립된 1852년부터 1859년까지의 오스트리아 정치체제를 신 절대주의(Neoabsolutismus) 또는 바흐 절대주의라고 합니다. 언론의 자유가 줄어들고 정치범들이 마구 잡혀들어가는 등 각종 절대주의적인 조치가 잇따랐습니다. 체코 민족주의도 이때 상당히 억압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체코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는 역설도 일어났고 말이죠. 헝가리 출신의 유대계 작가 겸 정치인이던 아돌프 피시호프(Adolf Fischhof)는 이 시기가 4개의 군대로 유지되었다고 표현했는데, 서있는 병사, 앉아있는 공무원, 무릎 꿇은 성직자, 아첨하는 고자질쟁이를 뜻합니다. 그나마 경제적인 자유는 허용되어 여러 관세가 철폐되고 농노들이 봉건적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등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으로 사르데냐와 프랑스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침공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솔페리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폰 바흐는 사임합니다. 1860년과 61년에 각각 10월 문서(October Diploma)와 2월 특허(February Patent)가 발표되어 귀족들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황제 중심의 절대주의 정치 자체는 어떻게든 유지되었으나(그래도 10월 문서를 오스트리아 제국 최초의 헌법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866년 보오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절대군주정은 완전히 무너지고 12월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이중제국으로 변환됩니다.
1849년부터 1859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내무부 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폰 바흐 남작의 1849년 초상화.
1852년 펠릭스 추 슈베르첸베르크 총리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 제국 정치는 내각회의(Ministerkonferenz) 체제로 변화합니다. 내각회의의 의장은 외무장관 폰 부올 백작이었지만, 사실 내무장관 폰 바흐에게 실권이 있는 셈이었죠. 이렇게 성립된 1852년부터 1859년까지의 오스트리아 정치체제를 신 절대주의(Neoabsolutismus) 또는 바흐 절대주의라고 합니다.
언론의 자유가 줄어들고 정치범들이 마구 잡혀들어가는 등 각종 절대주의적인 조치가 잇따랐습니다. 체코 민족주의도 이때 상당히 억압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체코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는 역설도 일어났고 말이죠. 헝가리 출신의 유대계 작가 겸 정치인이던 아돌프 피시호프(Adolf Fischhof)는 이 시기가 4개의 군대로 유지되었다고 표현했는데, 서있는 병사, 앉아있는 공무원, 무릎 꿇은 성직자, 아첨하는 고자질쟁이를 뜻합니다. 그나마 경제적인 자유는 허용되어 여러 관세가 철폐되고 농노들이 봉건적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등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으로 사르데냐와 프랑스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침공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솔페리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폰 바흐는 사임합니다. 1860년과 61년에 각각 10월 문서(October Diploma)와 2월 특허(February Patent)가 발표되어 귀족들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황제 중심의 절대주의 정치 자체는 어떻게든 유지되었으나(그래도 10월 문서를 오스트리아 제국 최초의 헌법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866년 보오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절대군주정은 완전히 무너지고 12월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이중제국으로 변환됩니다.
국민당은 국왕의 지지를 통해 집권하자마자 작센에 유리 공장을,
슐레스비히에 통조림 공장을,
브란덴부르크에 와인 공장을,
하부 슐레지엔에 제철소를 건설합니다.
1856년 의회에서는 자유당이 41%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사회당이 5%를 더 얻어 16%를 차지합니다. 2년 전 의석 비율과 비교해보면 보수당이 2%, 국민당이 1%, 자유당이 1% 잃었고 그 의석들을 사회당 혼자 다 먹은 겁니다. 이젠 보수당과 국민당이 연합하더라도 과반 확보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국민당 정부(어딘가의 장법사께서 군벌들을 때려잡아야 할 것만 같은 이름이지만)는 헤센에 유리 공장을 세우고,
라인란트에 대포 공장을 만듭니다.
에센 지방에는 2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크루프 가문이 살고 있었습니다. 1587년 아른트 크루프가 에센 상인 길드에 가입하면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이 가문은 당대에 무역업을 통해 에센에서 가장 부유한 가족이 되었고, 아른트가 죽은 뒤 가문을 물려받은 안톤은 30년 전쟁 당시총기제작업을 시작함으로써 군수산업과의 첫 인연을 맺었죠. 1810년 프리드리히 크루프는 루르 강의 수력을 이용하여 제철소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알프레드 크루프는 39세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 고작 14세의 나이로 학교를 그만 두고 철강업을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1847년에는 주강(鑄鋼)으로 대포를 만들었고,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제1회 세계박람회에서 완전히 주강으로 만든 6파운더 대포를 선보여 명성을 얻습니다.
에센 지방에는 2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크루프 가문이 살고 있었습니다. 1587년 아른트 크루프가 에센 상인 길드에 가입하면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이 가문은 당대에 무역업을 통해 에센에서 가장 부유한 가족이 되었고, 아른트가 죽은 뒤 가문을 물려받은 안톤은 30년 전쟁 당시총기제작업을 시작함으로써 군수산업과의 첫 인연을 맺었죠.
1810년 프리드리히 크루프는 루르 강의 수력을 이용하여 제철소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알프레드 크루프는 39세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 고작 14세의 나이로 학교를 그만 두고 철강업을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1847년에는 주강(鑄鋼)으로 대포를 만들었고,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제1회 세계박람회에서 완전히 주강으로 만든 6파운더 대포를 선보여 명성을 얻습니다.
1856년 3월 27일, 크루프 사에서 970명의 노동자들에 대한 건강보험기금을 만들고 의무적으로 가입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것이 의회에 소개되면서 자본가, 귀족, 수공업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산업 현장에 대한 안전 규제 법안이 통과됩니다.
보수당이나 국민당이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국왕이 다시 내각을 해산시키고 보수당을 집권시킵니다.
룩셈부르크의 내부 사정이 미묘하게 돌아가는군요.
다행히도 시의적절하게 친독 쿠데타가 발생해서 좋게좋게 끝났습니다. 북독일의 개입이 있었으리라는 루머가 떠돌지만 그런 찌라시는 믿으면 안되는 겁니다.
투표권 확대 운동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으나, 더 이상 자유주의가 확산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파라오의 저주가 내렸다는 루머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전 국민의 투쟁심이 1 오릅니다. 선택지의 혜성 드립은 이젠 그냥 역설사의 개그 요소인 모양입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니트로글리세린이 처음으로 소개됩니다. 해당 지역의 광업 효율이 50% 오르는 이벤트죠.
명색이 대독일 건설 이야기인데 합스부르크를 영향권에 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오헝 제국을 열강에서 탈락시켜야겠죠. 위신을 깎기 위한 전쟁을 준비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무너뜨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선덕선덕해지는 모양입니다. 북독일연방 전용 이벤트까지 떠 가면서 전쟁명분을 25% 빨리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1858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55%를 득표하여 처음으로 정권을 잡습니다. 185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뇌졸중을 겪었고, 1858년 1월부터 국왕의 동생 빌헬름이 대리청정을 맡고 있었습니다. 섭정 빌헬름은 정치적 중립을 선호한 덕분에 자유당 정부는 나름대로 국왕의 간섭 없이 정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유당은 군사력 확대에 반대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보수당이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걸 취소하려면 군부의 반발을 막기 어려울 겁니다. 군부가 반쯤 억지를 부려가며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준비를 마칩니다.
북부 슐레스비히의 플렌스부르크에서 시위에 나선 군중에 의해 북독일연방기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강제적인 동화 정책에 반발하는 의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에 자유당 정부는 북부 슐레스비히에 대한 동화정책을 포기합니다.
대충 짜본 전쟁 계획. 이름도 정직하게 오스트리아 계획입니다(...)
제1차 보오전쟁과는 다르게 남독일 3개국과 벨기에가 모두 북독일연방의 동맹국이므로 그때보다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것입니다.
러시아, 남독일 3개국,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참전할 예정입니다. 1859년 7월 16일, 이번에는 북독일연방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1:3 교환비는 이젠 놀랍지 않은 수준.
1:1에 가까운 것만으로도 오헝 입장에선 선방인 수준.
근데 왜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여도 프랑스에겐 교전비가 안되는 거니ㅠㅠ
큰 어려움 없이 재빠르게 평화협상에 들어갑니다. 불과 3개월만에 항복하는 추태를 보이는 오헝제국.
조금만 더 진행하면 빈에 진입할 수 있었겠네요. 다른 동맹국들이 많아서 수월한 전쟁이 되었습니다. 특히 벨기에는 프랑스군에게 유독 취약한 북독일연방을 위해 열심히 몸빵을 대주었지요. 가장 고마운 나라입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내각이 해산되고 보수당이 재집권합니다. 전쟁을 수행한 건 자유당이지만, 정작 군부가 자유당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보수당으로 회귀했죠. 학자에 따라서는 이번 1859년 내각 해산 역시 신 절대주의 반동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1860년 1월 1일,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프랑스가 사르데냐의 편을 들어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을 일으키는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이렇게 오헝-프랑스 동맹이 깨져버렸으니 북독일 입장에선 어부지리죠. 사르데냐를 앞세워 이탈리아로 확장하려는 프랑스의 입장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북독일이라는 공공의 적을 놔두고 굳이 오헝과 척을 져야만 했을지는...
전쟁 이름이 저런 이유는 이벤트로 인해 롬바르디아 지역에 사르데냐 왕국의 코어가 박혀버리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로부터 롬바르디아를 얻어내려는 통일전쟁이 해방전쟁으로 둔갑한 거죠.
자유당이 실각한 이후, 자유주의자들은 기존의 리즈시절을 서서히 잃어가는 분위기입니다. 40%를 간신히 수성하고 있으며, 오히려 사회주의자들이 22% 의석을 차지하면서 보수당과 맞먹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합니다.
1860년 1월 1일, 사회당을 주축으로 하는 사회개혁이 처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많은 민중들이 최저임금제 도입을 원했지만, 자유당 및 보수당과의 타협으로 의무교육 확대를 대신 선택합니다.
1860년 3월 8일 신문이네요. 1월 1일 새로운 정당이 등장했습니다. 독일노동자협회(Deutscher Arbeiterverein)이라는 정당인데, 이것은 1863년 5월 23일 결성된 전독일노동자협회(Allgemeiner Deutscher Arbeiterverein, ADAV)을 의미합니다.
1848년 혁명의 좌절 이후로 오랫동안 침체기에 있던 노동운동은 1850년대 말 각종 노동자협회가 결성되었지만, 이들은 노동자 중심의 계급운동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오히려 노동자 계급의식을 부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브레슬라우 출신의 유대계 마르크스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레가 중심이 되어 1863년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를 결성합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에는 라살레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기반 노동자협회들이 모여서 독일노동자협회연맹(VDAV)을 결성합니다. 이후 VDAV는 좌우파로 갈려서 분열됩니다. 1869년에는 아이제나흐의 ADAV 대회에서 ADAV의 회장 슈바이처에 반대하는 일파가 떨어져나왔고, 이들과 VDAV의 좌파, 작센인민당이 합쳐서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 SDAP)을 만들게 됩니다. 이 두 당은 모두 라살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ADAV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를 지지한 반면, 반프로이센적인 작센인민당이 처음부터 참여한 SDAP에서는 반프로이센적인 연방제 대독일주의를 일관되게 지지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더 이상 소독일과 대독일 문제로 싸울 필요가 없어지고,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1875년 고타 합동대회를 열고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ozial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으로 통합합니다. ADAV에서 특히 강했던 라살레주의는 대단히 수직적이고 위계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회장이 독재적으로 지도하고, 협회에 찬동하지 않으면 노동자 계급의 적으로 간주하며, 노동조합과 파업운동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생산협동조합이 국가의 원조를 받아 노동 수익을 실현하도록 하는 등 국가권력과의 결탁을 지향하는 모습이 강하게 보입니다. SDAP에서 주로 비판하는 모습이지만, 정작 SDAP의 아이제나흐 강령에서도 라살레주의의 영향이 곳곳에 보이며, 1875년 고타 강령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거의 희석되고 라살레주의가 더욱 강화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18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당 내에 확산됩니다.
1848년 혁명의 좌절 이후로 오랫동안 침체기에 있던 노동운동은 1850년대 말 각종 노동자협회가 결성되었지만, 이들은 노동자 중심의 계급운동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오히려 노동자 계급의식을 부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브레슬라우 출신의 유대계 마르크스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레가 중심이 되어 1863년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를 결성합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에는 라살레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기반 노동자협회들이 모여서 독일노동자협회연맹(VDAV)을 결성합니다. 이후 VDAV는 좌우파로 갈려서 분열됩니다. 1869년에는 아이제나흐의 ADAV 대회에서 ADAV의 회장 슈바이처에 반대하는 일파가 떨어져나왔고, 이들과 VDAV의 좌파, 작센인민당이 합쳐서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 SDAP)을 만들게 됩니다.
이 두 당은 모두 라살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ADAV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를 지지한 반면, 반프로이센적인 작센인민당이 처음부터 참여한 SDAP에서는 반프로이센적인 연방제 대독일주의를 일관되게 지지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더 이상 소독일과 대독일 문제로 싸울 필요가 없어지고,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1875년 고타 합동대회를 열고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ozial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으로 통합합니다.
ADAV에서 특히 강했던 라살레주의는 대단히 수직적이고 위계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회장이 독재적으로 지도하고, 협회에 찬동하지 않으면 노동자 계급의 적으로 간주하며, 노동조합과 파업운동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생산협동조합이 국가의 원조를 받아 노동 수익을 실현하도록 하는 등 국가권력과의 결탁을 지향하는 모습이 강하게 보입니다. SDAP에서 주로 비판하는 모습이지만, 정작 SDAP의 아이제나흐 강령에서도 라살레주의의 영향이 곳곳에 보이며, 1875년 고타 강령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거의 희석되고 라살레주의가 더욱 강화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18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당 내에 확산됩니다.
신문 왼쪽을 보면, 몇 년 동안 미국의 영향력에 대항해오던 조선의 지배층이 미국 영사를 내쫓았다고 합니다. 뭐죠 이건? 신미양요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북독일에게 두 번이나 털린 주제에 정작 북이탈리아에서는 승기를 잡고 있습니다.
오만의 술탄이 죽으면서 두 아들 간의 계승분쟁이 있었는데, 하나는 무스카트에 하나는 잔지바르에서 각자 술탄이 되기로 한 모양입니다.
1858년 7월 12일, 프랑스 동부 로렌 지방의 플롱비에흐에서 나폴레옹 3세와 카보우르가 만나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항하는 대신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게 넘겨주는 비밀조약을 맺었더라고 합니다. 그러면 1859년의 제2차 보오전쟁에서는 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준수했을까요? 어차피 오헝은 안될 놈이니까 적당히 북독일의 힘을 빼놓으려고 했던 걸까요?
하지만 그래놓고 이제 와서 워스코어가 21%까지 벌어지는 건 대체 무슨 뻘짓인 걸까요? 이래서 외교력이 고자면 안되는 겁니다. 나폴레옹 3세는 그래서 안돼요.
중간에 반동주의 국민당이 잠깐 집권한 건 당연히 공장 건설하려고 그랬던 거죠. 웬만하면 자본가들에게 맡기겠지만, 국가 주도 산업화를 약간 끼엊어주더라도 나쁠 건 없을 겁니다.
브금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 1악장입니다. 빅토 오스트리아 제국 플레이를 하다보면 메테르니히 팩션 정당이 1848년 혁명으로 무너지고 바흐 팩션이라는 이름의 정당이 등장하는데, 대체 뭐길래 바흐라는 이름이 붙었나 궁금했습니다만 진짜 사람 이름이 바흐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무슨 바로크 시대를 상징하는 복고주의 어쩌고 때문에 상징적으로 붙은 이름인 줄 알았건만 동명이인(엄밀히 말하면 그냥 성만 같은)이 있었을 줄이야 ㄷㄷ 당대에도 이와 관련된 이름 개그가 있지 않았을까 하기도 하네요.
첫댓글 대단하시네요 여담으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영향권두시면일정확률로대독일에가담합니다 룩셈부르크처럼
아, 그게... 하하하하 스포일러는 못해드립니다만 아마 HPM은 다를 겁니다 ㅌㅌ 대독일부터가 전혀 다른 시스템이어서...
헛.. 이벤트들이 굉장히 재미있어보이네요
바닐라는 이벤트가 상당히 빈약한 편이고 범용 이벤트만 잔뜩 들어있어서 지루한 감도 없잖아 있었는데, HPM은 전용 범용을 가리지 않고 이벤트가 상당히 늘어나서 역사 공부하는 맛이 있습니다. 비록 독일어 위키백과는 토 나옵니다만...
이벤트가 장난아니네요 ㄷㄷㄷ 덕국 진짜 꿀잼 ㄷㄷ
첫댓글 대단하시네요 여담으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영향권두시면일정확률로대독일에가담합니다 룩셈부르크처럼
아, 그게... 하하하하 스포일러는 못해드립니다만 아마 HPM은 다를 겁니다 ㅌㅌ 대독일부터가 전혀 다른 시스템이어서...
헛.. 이벤트들이 굉장히 재미있어보이네요
바닐라는 이벤트가 상당히 빈약한 편이고 범용 이벤트만 잔뜩 들어있어서 지루한 감도 없잖아 있었는데, HPM은 전용 범용을 가리지 않고 이벤트가 상당히 늘어나서 역사 공부하는 맛이 있습니다. 비록 독일어 위키백과는 토 나옵니다만...
이벤트가 장난아니네요 ㄷㄷㄷ 덕국 진짜 꿀잼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