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전 보존논란에 휩싸였던 '치욕의 유물',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
지방유형문화재의 목록을 죽 훑어보다가 보면, 유달리 지정번호가 빠른 것들이 듬성듬성 이가 빠진 듯이 지정해제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아래에 정리된 해제목록에서 보듯이, 제주, 전남, 충남, 충북, 전북 같은 곳에는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호'가 없다.
이는 대개 초기에 지정된 지방유형문화재들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문화재의 가치가 재평가되어 보물이나 사적으로 승격지정되면서, 해당 지정번호가 삭제처리된 데에 따른 것이다. (아래에서는 참고 삼아, 지방유형문화재 가운데 제1호~제10호 가운데 지정해제처리된 문화재의 내역과 그 연유를 따로 정리해 보았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호 불탑사오층석탑(佛塔寺五層石塔, 1971.8.26 지정), 보물 제1187호로 승격지정(1993.11.19)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필암서원(筆巖書院, 1972.1.29 지정), 사적 제242호로 승격지정(1975.4.23)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계룡산청량사지쌍탑(鷄龍山淸凉寺址雙塔, 1971.9.14 지정), 보물 제1284호 '청량사지오층석탑' 및 보물 제1285호 '청량사지칠층석탑'으로 분리승격지정(1998.9.29)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호 법주사원통보전(法住寺圓通寶殿, 1974.4.10 지정), 보물 제916호로 승격지정(1987.3.9)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1호 전주객사(全州客舍, 1971.12.2 지정), 보물 제583호로 승격지정(1975.3.31)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2호 괴산각연사통일대사탑비(槐山覺淵寺通一大師塔碑, 1974.4.10 지정), 보물 제1295호로 승격지정(1999.6.28)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2호 경기전(慶基殿, 1971.12.2 지정), 사적 제339호로 승격지정(1991.1.9)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2호 범어사일주문(梵魚寺一柱門, 1972.6.26 지정), 보물 제1461호 '범어사조계문(梵魚寺曹溪門)'으로 승격지정(2006.2.6)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호 양관(洋館, 1969.9.18 지정), 사적 제253호 '구러시아공사관'으로 승격지정(1977.11.22)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 옥천용암사쌍석탑(沃川龍岩寺雙石塔, 1974.4.10 지정) 보물 제1338호 '옥천용암사쌍삼층석탑'으로 승격지정(2002.3.12)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불회사대웅전(佛會寺大雄殿, 1972.1.29 지정), 보물 제1310호로 승격지정(2001.4.17)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 송광사십자각(松廣寺十字閣, 1971.12.2 지정), 보물 제1244호 '완주송광사종루(完州松廣寺鍾樓)'로 승격지정(1996.5.29)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 제천신륵사삼층석탑(堤川神勒寺三層石塔, 1974.4.10 지정), 보물 제1296호로 승격지정(1999.6.28)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 증심사삼층석탑(證心寺三層石塔, 1972.1.29 지정),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변경재지정(1986.11.1)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5호 월사집판목(月沙集板木, 1974.4.10 지정), 지정해제(사유불명, 1986.4.28)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6호 금산사대장전(金山寺大藏殿, 1971.12.2 지정), 보물 제827호로 승격지정(1985.1.8)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6호 보성우천리삼층석탑(寶城牛川里三層石塔, 1972.1.29 지정), 보물 제943호로 승격지정(1988.4.1)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 청룡사보각국사비(靑龍寺普覺國師碑, 1974.4.10 지정), 보물 제658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로 승격지정(1979.5.22)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 계룡산중악단(鷄龍山中嶽壇, 1973.12.24 지정), 보물 제1293호로 승격지정(1999.3.2)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 화순운주사연화탑(和順雲住寺蓮花塔, 1972.1.29 지정), 보물 제798호 '운주사원형다층석탑(雲住寺圓形多層石塔)'으로 승격지정(1984.11.30)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 구돈암서원사우및응도당(1973.12.24 지정), 사적 제383호 '논산돈암서원(論山遁岩書院)'로 승격지정(1993.10.18)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 화순운주사구층석탑(和順雲住寺九層石塔, 1972.1.29 지정), 보물 제796호 '운주사구층석탑(雲住寺九層石塔)'으로 승격지정(1984.11.30)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9호 화순운주사사각석실미륵석불(和順雲住寺四角石室彌勒石佛, 1972.1.29 지정), 보물 제797호 '운주사석조불감(雲住寺石造佛龕)'으로 승격지정(1984.11.30)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 현일동삼층석탑(縣一洞三層石塔, 1977.1.1 지정), 보물 제610호로 승격지정(1977.8.22)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0호 화천동삼층석탑(化川洞三層石塔, 1977.1.1 지정), 보물 제609호로 승격지정(1977.8.22)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호 한우물(천정) (1972.8.30 지정), 사적 제343호 '한우물및주변산성지'로 승격지정(1991.2.26)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0호 김재로영정(金在魯影幀, 1989.12.28 지정), 경기도 호암미술관에 매각되어 지정해제(2001.4.2)
그런데 서울지역의 경우 시유형문화재 제1호 장충단비와 제2호 봉황각은 아직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제3호가 없다. 원래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호는 1969년 9월 18일(19일?)에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양관(洋館)'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냥 '양관'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양관을 말하는 것인지 매우 불명확하나, 그 지정내역을 다시 살펴보면 이것이 현재 사적 제253호로 승격지정된 '구러시아공사관' (1977년 11월 22일)이라는 것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건물의 내력을 확인하다 보면, 한때 '치욕의 유물'로 간주되어 보존논란이 크게 일었던 때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개화기 때의 외세침탈을 제대로 이겨내지 못해 남의 나라 공사관까지 대군주(大君主)가 피난을 가야했던 상황이 있었으니 그것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그로 인하여 이것은 그러한 치욕의 역사 현장이요, 곧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치욕의 유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히 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치욕의 유물이라고 해서 그걸 곧 파괴하거나 없애버려도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러한 논란은 삼전도비, 양호거사비, 조선총독부 청사, 동묘, 오무장공사 등과 같이 외세와 관련된 유물에 대해서는 거듭하여 제기되어온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치욕의 역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미 우리 역사의 일부가 되어 있는 바에야, 가급적 현상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적어도 이것들이 인위적인 파괴상태에까지 이르게 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한다.
37년전에 이 러시아공사관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 당시 이곳을 어린이공원으로 조성하려했던 움직임도 있었던 모양이었는데, 더구나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공사관건물이 죄다 파괴되고 3층짜리 탑모양이 잔존물로 남아 있던 상황이라는 것도 그러한 철거론에 한몫을 햇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보존논란 끝에 이 러시아공사관 잔존물은 용케도 서울시 향토문화재 제3호 '양관(洋館)'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되게 되었으니, 그때가 바로 1969년 9월 18일이었다. (신문기사에는 9월 19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후 다시 1970년대 후반기 근대여명기(近代黎明期) 건축물의 보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러시아공사관은 1977년 11월 22일자로 사적 제253호로 승격지정되기에 이르렀고, 달랑 탑 모양의 3층짜리 잔존건물 일부만 남았으나 그것도 말끔히 수리되어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969년에 벌어진 보존논란에 밀려 '치욕의 유물'이라고 하여 그냥 헐어버렸다면, 이러한 역사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떠한 유물의 보존타당성에 대한 판단, 그 보존의 방식에 대한 논란은 사람마다, 입장마다 보는 눈이나 생각하는 바가 다 달라서, 문화재 보존의 가능성은 그만큼 늘 어렵고도 어려운 처지에 서고 마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아래에서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구 러시아공사관 관련 기사내용을 옮겨둔다.
▲ <동아일보> 1969년 7월 22일자
전(前)러시아 영사관(領事館)건물
보존(保存)여부에 찬반양론(贊反兩論)
<동아일보> 1969년 7월 22일자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구한말 격돌하는 열강의 승강이를 견디다 못한 고종(高宗)황제가 '러시아' 영사관에 몸을 옮김으로써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역사를 남겼던 서울 정동 소재 전'러시아'영사관 건물 중 남아 있는 일부를 정치사의 생생한 유적이라는 뜻에서 향토문화재로 보존해야 하느냐, 아니면 치욕스런 역사의 잔해이므로 헐어버려야 하느냐를 두고 관계부처간에 의견이 맞서고 있다.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러시아' 건물인 옛 영사관의 일부 건물은 바로 어린이공원이 들어설 서울 서대문구 정동 15-1 일대 전'러시아'영사관 대지 6천여 평 위에 겨우 윤곽만 지탱하는 3층의 돔모양으로 남아 있다.
서울시 문화위원 이서구(李瑞求)씨 등은 이 건물의 처리문제에 대해 "아관파천이라는 역사적 수모는 한국정치사의 큰 오점이며 그로부터 일제 36년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는 치욕스런 것이지만 역사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었던 사실 그대로가 중요한 것이므로 당연히 이 건물을 복원 또는 보수하여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학자들과 정부관계부처에선 "영사관대지와 그 건물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적국의 잔류물이며 치욕의 역사가 담긴 곳인데 이를 굳이 남기려는 것은 넌센스"라고 못박고 있어 서울시 당국의 향토문화재 지정여부가 주목된다.
[사진설명] 향토문화재 지정여부로 논란이 되고 있는 구'러시아' 영사관 건물 일부.
장충단석비(石碑), 봉황각(閣), 구(舊)러시아공관(公館)
향토문화재(鄕土文化財)로 지정(指定)
<동아일보> 1969년 9월 19일자
서울시 문화위원회는 19일 3개의 문화재를 '향토문화재'로 지정했다.
시가 지정한 시향토문화재 제1호는 장충동에 있는 장충단 석비, 제2호는 우이동의 봉황각, 제3호는 정동의 구'러시아'공사 양관이다. ▲ 장충단 석비는 1895년 민비가 시해당할 때 순사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등의 영령을 위해 1900년에 세워졌고 ▲ 봉황각은 3.1운동 당시 33인의 대표였던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광복운동지도자를 훈련시키기 위해 1912년에 세웠으며 ▲ 러시아공사 양관은 한국에 처음 들어온 서양식 건축물로 1890년에 세워져 1896년 2월 고종(高宗)이 세자 순종(純宗)과 함께 피신한 적이 있다.
▲ 왼쪽은 <코리아라이프> 1972년 3월호에 수록된 '러시아공사관' 잔존물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수리보수공사를 거친 최근의 모습이다.
▲ <경성과 인천> (1929)에 수록된 '러시아영사관'의 전경이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러시아공사관은 러시아영사관(나중에는 다시 쏘비에트연방 영사관)으로 바뀌었다. 사진 속에 깃빨이 펄럭이는 부분이 지금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러시아공사관' 3층탑이다. 나머지는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모두 파괴되어 사라졌다.
(정리 : 2006.8.2,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