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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3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자정이 지났는데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여전히 불면증으로 인함입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으면 억지로 잠을 자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주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나이다.
이 종의 영을 깨워 주의 영으로 조명하여 주사 깨닫는 은혜와 함께 삼위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영의 눈을 열어주소서.
지나간 하루의 삶을 지켜주셨지만 알게 모르게 지은 생각의 죄와 마음으로 지은 원망과 불평의 죄들을 주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내 안에 있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오늘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연약함을 받으사 주의 강함으로 인도하소서.
이 하루가 만물 위에서 살아가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4:27-42
제목 : 믿음에서 영생의 사귐으로 복음의 진보를 이루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 나의 묵상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고자 신적 의지를 가지고 사마리아 수가성에 도착하여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쉬신다.
때가 정오 쯤 되었을 때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고 그 사이에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이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자, 그 여인은 의아한 듯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 하고 묻는다.
이처럼 마시는 물로 시작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담론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샘물 곧 생수로 진전이 되고 이는 하나님의 선물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수이심이 드러난다.
야곱의 우물과 남편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야곱의 우물은 신앙의 전통과 유산으로 아무리 마셔도 다시 목마르고 마는 그 무엇(something)으로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이나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영생으로 인도하지 못하며 성분이 좋은 야곱의 우물과 같이 잠시는 해갈이 되고 시원한 것 같지만 이내 목마르고 말기에 또 다른 프로그램을 찾아 전전하며 더 좋은 설교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이 방송 저 방송을 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생수는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이다.
이것은 영생으로 인도하며 아들의 생명 안에 거할 때 날마다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 그 생수를 자기에게 주어 더 이상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러 여기에 오는 수고를 그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다.
여인은 자기는 남편이 없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의 과거를 들추어 내신다.
왜 예수께서 갑자기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그 여인의 과거의 거짓된 삶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떠한 은혜도 임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과거를 알고 계시는 주께서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이다.
여인은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서 남편이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과거를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너의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사실 이전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도 한 명이 있지만 진리 안에서는 남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천명하신다.
진리 안에서는 남편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종말에는 쇠락의 법칙에 의하여 여섯 명의 남편이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는 쇠락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모든 만물 안에 있는 것은 이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다.
따라서 카이로스 곧 영원의 시간 안에서 보면 종말에 없어질 것이라면 지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영원의 시간은 항상 현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영원의 현재성이라 한다.
무엇보다 여인이 취했던 다섯 명과 또 한 명의 남편은 문자적인 해석보다 상징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것 같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다섯 남편은 사마리아에 각기 자신들의 神을 갖고 있는 모든 이방의 다섯 부족으로 형성된 사마리아를 대표한다고 한다.
그리고 한 남편은 참 하나님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거짓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바로 이어서 예배에 대한 대화가 이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여인은 자기 조상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하였는데 왜 유대인들인 당신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께서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예배란 영과 진리 곧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 태초부터 계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인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고 하신다.
사마리아인 너희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만 유대인인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는데 그 이유는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다윗의 혈통 곧 다윗의 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이다(롬 1:3).
이처럼 아버지께 영과 진리의 참된 예배를 할 때가 오는데 곧 지금(now)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이란 말은 영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때이며 그 분이 지금 사마리아 여인 앞에 와 계시기 때문에 지금 이 때인 것이다.
오늘 우리들로 보면 이미 성령도 오셨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대속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에 연합되어 생명의 교제로서의 예배를 누리면 되는 것이다.
예배는 결코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삼위 하나님과 온전히 영원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
이런 대화를 통하여 여인은 결국 자기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 자기가 기다리고 찾던 메시야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을 ‘내가 그’라는 말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로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그’라는 말은 아들이 계시하시는 아버지를 아는 것이며 이를 가리켜 ‘신적 자기계시’라고 한다.
아들이 자신을 드러내어 오직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은 진리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되고 이는 복음 곧 진리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영적 실재이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 안에 들어오면 그는 참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요 8:32).
이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은 여인은 자기가 들고온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자기의 과거를 모두 꿰뚫고 계시는 사람을 와서 보라고 외친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한다.
그 외침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나와서 예수께로 갔다.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오는 사이에 제자들이 사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면서 드시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전혀 의외다.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누가 먹을 것을 주님께 갖다 드렸는지 서로 수군수군한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양식이란, 육신의 양식이 아니다.
주님의 양식은 자신을 보내신 이 곧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또한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란 다름 아니라 ‘영생’이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또한 아버지의 일이란 아들을 믿는 것이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양식 또한 우리 주님이 잡수시는 그 양식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추수에 대한 말로 주위를 환기시킨다.
너희들은 4개월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온다고 한다.
이는 아직 추수할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미’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초림과 그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아직’의 중간 상태의 긴장관계를 직시하라는 말씀임과 동시에 또한 수가성 주변에 있는 들판에는 곡식들이 푸른 빛을 띠며 넘실대고 있어서 아직 추수의 때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눈에는 보리나 밀의 추수를 떠나 영적 추수의 때가 이미 왔음을 천명하고 계신다.
이는 수가성을 떠나 예수님께로 달려오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지금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는 말씀으로 영적 추수의 때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거두는 자는 이미 삯도 받았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데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뿌리는 자는 사마리아 여인이다.
그가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의 복음을 듣고 영생을 얻어, 그 복음을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 곧 뿌리는 자이다.
그런데 뿌리는 자의 본질적인 의미는 사마리아 여인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으며 그 씨앗이 자라 생명의 열매를 맺고 또한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 그는 바로 그리스도시다’라는 복음을 전하여 그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달려오는 것이다.
이제 그 열매를 거둘 이는 다름 아니라 제자들이다.
복음은 내가 심고 내가 거두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심으면 또 다른 사람이 거둘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심은 복음이 열매가 되어 다른 사람이 추수하게 되는 것이다.
전도나 선교의 경우도 그렇다.
내가 복음을 전하나 그 열매는 반드시 내가 거두어야 한다는 사고를 버려야 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때 나는 거두는 수고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복음을 내가 뿌린다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복음을 뿌리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처럼 주께서 심으신 것을 우리는 단지 거두어 들이는 것뿐이기에 스스로 자랑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뿌리는 수고를 하지 않은 열매를 거두러 보내셨다고 하신다.
이는 다른 사람이 뿌리는 수고를 하였고 너희는 단지 그들이 뿌린 수고에 거두는 수고만 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다시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이 말한 것으로 인함이다.
그것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고 증언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많은 동네 사람들 중에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동네에서 유하기를 청하였다.
그 요청에 예수께서는 이틀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그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더 많이 그리고 깊이 뿌리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와 함께 이틀을 지낸 사람들이 예수께서 전한 복음을 듣고 더 많이 믿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의 고백이 달라진다.
그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하기를, “처음에는 너의 증언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너의 말로 인함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께로부터 친히 복음을 듣고 그가 진짜 세상의 구주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마지막 주일을 김해에 있는 함께지어져가는교회에서 드렸다.
그날 주일낮예배 설교를 오늘 본문으로 그 교회 담임인 강윤호목사가 했는데 말씀의 제목이 복음의 진보(믿음에서 사귐으로)였다.
내용인즉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자신의 과거를 이미 알고 있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예수라는 분이며 또한 그리스도시라는 증언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통해서 싹이 튼 믿음의 단계이다.
그러나 이 믿음의 단계에 머물지 말고 예수께로 나아와 그 분이 주시는 생명으로 사귐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였다.
이는 아주 깊은 묵상을 통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면 된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믿음도 중요하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서 단지 믿음을 가지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가 그 삼위 하나님 안에서 연합하여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영생을 누리는 데 궁극적 신앙의 목적이 있다.
물론 강목사는 나를 통하여 복음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깨달음의 깊이가 날로 더하여 가며 나아가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강목사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쁜데, 우리 주님이야 두 말해 무엇하겠는가?
육신의 물로 시작하여 생수로 발전하고 그 생수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나아가 그 생수인 복음을 듣고 믿음을 얻어 날마다 삼위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있는 영생의 누림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일이요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그런데 나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생수인 생명의 복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수인데 나는 그저 육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고자 온갖 야곱의 우물과 온전한 연합의 대상인 진짜 남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남편들 곧 목회사역과 온갖 프로그램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예배, 명성과 높은 직분 그리고 목회성공 등 세상에서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연합의 대상인 나의 남편으로 삼과 살아왔다.
이런 나에게 심판이 왔다.
그러나 그 심판과 함께 주님의 긍휼도 함께 온 것이다.
심판은 결코 나를 죽이는 진멸이 아니다.
징계를 통하여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만지심이다.
그로 인하여 복음을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는다.
이것이 현재적으로 누리는 영생이며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이요 또한 내 안에 있는 아들의 생명임을 믿는다.
비록 지금도 여전히 상황적 어려움에 처해 있으나 이것이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은 내 안에 아들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기쁨으로 넉넉히 땅의 고통을 삼키는 것이다.
물론 연약한 인간이기에 내게 닥친 어려운 상황으로 인하여 순간순간 불안과 초조 그리고 두려움이 닥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비존재 세력은 나의 친구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을 존재이기에 날마다 찾아오는 이런 불청객들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오늘도 거룩한 불구자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루살이의 은혜를 누리며 살면 되는 것이다.
내게 주신 주의 은혜가 너무 크고 귀하며 놀랍다.
날마다 아버지 집에 거하여 창세전에 아들에게 주신 그 영광의 빛이 오늘도 내게 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복음을 알지 못하고 목회가 무엇인지도 몰라 늘 헤매었던 내가 바로 여기 있나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몰랐기에 그저 신학교에서 배운 목회학을 따라 사역을 했고 선배 목사들이 행한 그 사역이 목회인 줄 알고 그대로 답습하기 일쑤였나이다.
아무리 신학교에서 배운 목회학일지라도 그것은 대부분 이 땅에서 교회의 부흥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목회 성공을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런 방법을 따라 목회를 했던 나는 조금 무엇인가 이루는 것 같으나 내 영은 언제나 환난과 곤고가 그치지 않았나이다.
무언가 이룬 것 같으면 날아갈 것 같이 기분이 좋다가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잠시는 좋고 목마름이 해갈 되지만 이내 목마르고 마는 야곱의 우물이요 남편을 바꿔야만 무언가 이룰 것 같은 또 다른 남편이었나이다.
그런 내게 심판이 임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심판의 자리에 있지만 이 심판은 결코 한두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나이다.
단지 그 심판의 크기가 다를 뿐, 언제나 주님의 심판은 스탠바이되어 있나이다.
그래서 그 심판의 무덤을 친구 삼아 늘 주님을 나의 남편으로 연합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진짜 무덤에 내려가는 노래와 같이 흑암만이 나의 절친임을 고백합니다.
그 나의 절친인 흑암 속에 주님께서 찾아와 주시고 당신의 성소를 지어 그 안에서 내게 생명을 주옵소서.
오늘도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주의 친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때에 새 생명으로 일어나 주의 영광을 선포하길 원하오니 이 종을 긍휼히 여기소서.
이제 차드에서의 캠프를 마치고 세네갈로 이동합니다.
세네갈에서의 한인선교사와 목회자들을 상대로 복음이 선포될 때 주께서 행하시옵소서.
사역자들은 오직 복음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성령님의 역사로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히게 하옵소서.
모든 일 주님이 하셨나이다, 라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게 하소서.
육신의 연약함이 고통받는 이들을 하감하옵시고 저들의 고통을 체휼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하게 하시고 장사됨을 통하여 새 생명의 부활을 경험하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생사를 넘나드는 자매와 젊은 필리핀 청년 아뎃을 긍휼히 여기사 복음이 그들을 붙들어 부활의 소망 가운데 넉넉히 고난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그것이 진정한 믿음임을 알게 하시고 이 땅에서나 그 나라에서나 동일한 생명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만 영광을 받아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