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셍떽쥐베리의 소설 '야간비행'이 생각난다. 1976년인가 '어린 왕자'를 처음 읽고 감동을 받아 셍떽쥐베리의
작품과 그의 생에 심취하여 동경하였던 적이 있다. 비행사였던 그가 '야간비행'이란 작품을 쓴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 제목에서부터 신비한 비장감을 느낀다면 사하라사막에서 비행 도중 산화한 그의 생과 비교할 때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셍떽쥐베리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일종의 비장감을 지닌 채 북한산 야간산행을 시작하였다. 수없이 산을 다녔지만 야간산행이라니... 그것도 우정 밤을 골라 산을 타려하다니 묘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셍떽쥐베리를 흉내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사히 하산하고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온 지금 우리는 셍떽쥐베리의 생에 못지 않은 광기로서 밤을 허우적거렸다.
사실 의상능선을 타기 위해 개들이 짖어대는 백화사
들머리를 걸어가면서부터 약간 제정신이 아닌 듯도 했다. 밤 9시. 예정보다 늦게 백화사 입구에서 버스를 내렸던 것이다. 이어 어둠 속으로 우리는 빨려 들 듯이 잰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매표소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였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땀이 비오듯했다. 매표소는 아무도 없이 어둠 속에서 휑뎅그런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야간산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를 여기서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정규 휴게소를 지나면서도 돈을 내지 않고 가다니...
이어 능선이 이어졌다. 9시를 넘은 시간이지만 동쪽으로 보이는 북한산 연봉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
왔다. 연봉 너머 서울 시가지의 불빛이 새벽 여명처럼
밝았기 때문에 연봉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은 환상적인
실루엣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마치 부처님의 후광과도
같이... 아. 이런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저
야간산행이라고 하면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을 탈 수 있고, 사람들이 없어 쾌적한 등반이 될
정도만 생각했는데....이런 절경을 볼 수 있다니...
이런 생각은 산을 오를수록 더욱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의상봉 첫 봉우리를 오르면서 어둠 속에 드러나는 백운대와 염초, 원효봉의 위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밤중에 희끗희끗 내비치는 하얀 암릉은 속치마를 여미는 함초롬한 새댁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사이사이 보이는 절집의 불빛들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형용함을 그려내고 있었다. 조용히 앉아 산사의
호젓함에 대해 시라도 읊고 싶은 심정이었다.
등 뒤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거기는 또 다른 장관이 연출되고 있었다. 일산, 김포 지역의 야경들은 속세가 빚어내는 화려함 바로 그것이었다. 앞과 뒤의 모습이 이렇게 확연하게 대비되다니.... 멀리 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불빛과 김포공항의 활주로 불빛은 정연한 모습을 드러내어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의 현란함에 한동안 넋을 읽고 바라보는데 일행 중에서 싸파이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글세, 아마 1/3은 싸파이어 일걸!"(여기서는 내 닉이 싸파이어로 통한다)
의상능선은 암릉이 끝없이 이어진 곳. 북한산에서 염초봉 만큼 고난도의 릿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첨탑과
같은 봉우리들이 연이어 있는 곳. 그래서 대낮에도 짜릿함을 느끼는 곳이 한둘이 아닌데, 밤중에 가기는 다소
부담스럽다. 하지만 리더의 안내로 암릉 하나하나를 오를 수 있었다. 평탄한 산길을 걸을 때는 귀신놀이도 하고, 흥겨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한봉 한봉
오르며 점차 몸은 고도를 높여 나갔다. 산아래서는 무더위에 몸이 흠뻑 땀에 젖어 들었지만 고도를 높여감에 따라 시원한 바람이 금새 땀을 씻어 주었다. 능선위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초대형 선풍기 마냥 끊임없이 우리 몸을 식혀 준다. 아, 폐부 속깊이 들여 마시는 이 바람, 바람, 그래서 우리는 바람이 난 모양이다. 우리는
한동안 낄낄거리며 산을 올랐다. 귀신놀이도 하고, 무장공비, 북한산 침투조 이야기도 하면서 철없는 아이들 마냥 낄낄거렸다. 헤드랜턴이나 야간램프가 산길을 따라
한 줄로 죽 늘어선 것이 마치 유령들의 행렬같기도 했다. 그리고 봉우리마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일부 대원은 간간이 상의를 들치고 배꼽을
말리기도 했다. 북한산 유원지 가게 불빛이 아스라해질
무렵, 허기를 느끼는 대원들이 있었다.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대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암릉 밑
캠프사이트에서 우리는 컵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부족했지만, 라면을 모두 꺼내 코펠에다가 한꺼번에
끓여 버렸다. 그리고 막걸리, 소주를 꺼내 알콜도 조금
보충했다. 안주로 가져온 도시락, 돼지고기 볶음, 각종
야채가 불티나듯 팔렸다. 이 컴컴한 야밤중, 산 구석에서 무슨 귀신들의 축제인가? 야식을 느긋하게 마치고
다시 비탈길을 오르는데 갑자기 광풍이 불어온다. 하늘을 봤다. 머리 위에 우리를 지켜봐야 할 별은 없었다.
대신 두꺼운 구름이 서쪽에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낮부터 높은 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다소 불안해졌다.
우리는 의상 3봉을 넘었다. 험한 암릉에서는 자일을
걸어 잡고 오르기도 했다. 그래도 즐겁다. 오른쪽으로
아찔한 협곡의 연속이지만 어둠 속에 감추어진 계곡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까만 계곡 건너 펼쳐지는 비봉의 모습을 감상할 따름이다. 3봉 위에
올라서자 갑자기 굵은 닭똥 같은 빗방울 하나가 뺨을 때렸다. 이어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려니했다. 후두둑거리는 빗소리는 이내 떡갈나무
잎을 때리기 시작했다. 얼른 모자를 꺼내 썼다. 안경 낀
사람의 불편함은 이때 쉽게 느낀다. 키 큰 참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만났다. 여기서 일단 소나기를 피하기로 했다. 그렇게 5분 정도 쉬었을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숲 속에서도 서서히 나뭇잎 사이로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의를 꺼내 입고서 서둘러 장소를 옮겼다.
마지막 봉우리(의상능선에서 어느 것이 의상봉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가장 높은 이 마지막 봉우리가 의상봉일 것이다. 그 다음은 문수봉이니까)를 넘어 빗속을
20분 정도 걸었다. 아직은 나무 잎새에 가려 비를 많이
맞지는 않았다. 그리고 청수동암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일시 비를 피할 수 있다.
청수동암문에서 한 20분 정도 쉬었다. 그리고 좀더 기다려보자는 의견과 한시라도 빨리 가자는 의견이 갈렸다. 시간은 벌써 2시 40분. 코스도 여럿 나왔다. 대남문까지 가서 평창동이나 구기동으로 빠지자는 의견, 당초
계획대로 가자는 의견, 비봉에서 승가사 쪽으로 빠지자는 의견, 많은 논의 끝에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으니 승가사로 빠지기로 했다.
우리는 당초 저녁 7시 30분 집합하여 8시 정도에는
산에 오르려 하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한 대원의
부친상으로 단체문상을 가는 바람에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그리고 첫 야산인 관계로 미처 상상치 못했던 북한산의 황홀한 자태에 넋을 빼앗겨 더 많은 시간을 지체하기도 했다. 환상적인 스카이라인의 북한산. 속치마말기를 움켜쥐고 있는 듯한 새댁과 같은 백운대. 하지만
지금은 비속 산길에 모두들 지쳐가기 시작했다. 램프 불빛도 가물가물해져갔다. 새건전지를 바꾸어 끼워도 습기에 젖어서인지 한층 빨리 닳는 것 같았다.
청수동암문길이 그렇게 지루할 줄 몰랐다. 이 길을 오르는 것은 더 괴로울 터. 그래도 우리는 묵묵히 내려갔다. 이제는 완전히 비에 몸을 내 맡긴 꼴이 되었다. 사모바위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딛던 우리는 조명탄 마냥 사방을 훤하게 비치는 번개에 몸서리 쳤다. 그리고 들리는
천둥소리.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번개만 치면 번개 맞는다고....그래, 번개모임 칠 때마다 번개가 쳤다. 벌써
네 번째이다. 첫 번개로 이 코스를 오를때도 수도 없이
천둥, 번개가 쳤고, 신촌번개 때도 그랬고, 원효릿지 번개 때도 그랬고, 오늘 또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앞으로
절대 번개는 치지 말자 했다. 대신 이름을 바꾸자고 했다. 임시산행으로 하자고 했다. 또 어떤 대원은 무지개는 어떠냐고 했다. 예쁘게 장미 산행은 어떠냐는 대원도
있었다. 그래 번개산행이 뭐냐? 장미산행이나 홍어산행은 어떨까? 아니면 싸파이어산행은 어떨까? ㅋㅋ
수없는 번개가 우리 길을 밝혀 주었다. 그래도 하나님의 보살핌인지 우리 중에 죄지은 자 없어서인지, 아무도
겁을 먹지 않았다(나만 빼고...지은 죄가 많아서). 그리고 번개 맞은 사람도 없었다.
굵은 빗줄기 사이로 사모바위가 보인다. 그래. 너도
비를 맞고 있구나. 이 한 밤중에 비옷도 없이 맨 몸뚱이로 비를 맞고 있다. 그러나 사모바위는 우리를 아는 체
모르는 체 말이 없다. 한마디 인사말이라도 건네 준다면
좀 좋을까? 나도 본체 못본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말없는 가운데 서로 정겨움을 나눌 수 있으니 산을 자주 다니면 우리도 바위가 되는 것일까?
헬기장을 지나 이어 승가사 내려가는 좌측 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좌측으로 꺾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여 오르면 비봉이다. 비봉 지나 향로봉, 그리고 수리봉을 넘어가면 당초 목적지인 불광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좌측으로 길을 꺾었다.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지만, 이런 우중에 향로봉 코스로 하산한다는 것은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은 항상 하산할 때 위험이 배가 되는 법이다.
승가사쪽 산길로 한참을 내려오다가 커다란 암장 밑에서 휴식을 취했다. 오버행의 바위 탓에 비를 다소 피할
수 있는 좋은 지점이었다. 그 옆에서 잠시 해우제를 지냈다. 아무래도 산신령이 노한 것 같아서 풀 수 있는 방법을 줄곳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우제를 어떻게 지내느냐고? 그것을 공개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가르쳐 줄
수 밖에 없다. 어느 철없는 여인이 산신령을 잘 못 건드렸으니, 나라도 나서서 달랠 수밖에....
다시 하산길을 재촉했다. 승가사 옆에 도달했다. 시각은 이미 4시를 넘기고 있다. 그래도 지금부터는 시멘트
포장이 된 길이다. 그리고 비도 점차 잦아지기 시작했다. 해우제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현상은 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것이 자기의 생각과 맞아 떨어질 때 묘한 신비감에 싸이게 된다. 이제 몸은 비옷 속으로 젖어들고
있지만 모두 기분은 상쾌하기 이를데 없었다. 동쪽하늘에는 벌써 여명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는 새벽을 맞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틈엔가
새벽이 주는 생명의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피로는 사라지고 엑스터시를 느끼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구기동으로 하산했다. 새벽 5시. 8시간의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우리는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올갱이 해장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소주와 맥주로 비에 젖은 몸을 녹이기도 했다. 느긋하게 배를 불리고, 그리고 지나간 한밤중의 일들을 즐겁게 이야기했다. 여덟시간의 밤중 산행은 많은 기억을 남겨 주었다. 개인적으로 첫 야간산행이 우중산행이 되고... 그리고, 많은 후일담. 즐거운 시간들. 어린아이와 같이 즐겁게 낄낄거리던 일.
평생 잊지 못할 즐거운 산행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주
야산을 하자고 했다. 세계적인 명산 북한산을 지척에 두고, 이 무더운 날 멀리 산행을 갈 이유가 어딨느냐고?
집에 돌아와서 오후 늦게까지 잠을 잤다. 눈을 뜨니
그때까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수고로움을
달래주려는 듯이. 이번 산행은 분명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형화된 도회의 삶 속에서 이런 일탈을 꿈꾸지 않는 자 어디 있으랴마는 이러한 일탈을 감행한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휴일 오후 나른해진 몸으로 느긋하게 내리는 비를 관조하면서 지난 밤의 일들을 되새겨 보면 마치 꿈과 같다. 누군가 등 뒤로 소리없이 다가와 나직이 읊조릴 것만 같다
'나는 지난 밤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첫댓글 아~~~~이럴수가~~~~이렇게 멋진 산행에 꽃별이를 빼놓고 가시다니요....ㅠㅠㅠ 그것도 천둥번개 우중산행을~~~~~에구~~~~부러워라~~~~~몇번의 야간산행 경험이 있는 저도 님의 마음을 알지요...ㅎㅎㅎ그래도 "나는 지난 밤 에 네가 한 일을 모르고 있다~~~~" ㅎㅎㅎ다음산행은 함께 나눕시다~~~*^_^* 산행후기 잘봤습니다~~
우수횐 되심을 축하합니다. 자주 이런 글 올려 주소서...저와 가까운데 사시네요, 귀에 익은 지명들이라 반갑네요. 산이 좋아 산을 타신분들은 다들 마음이 산과 같이 푸르더군요,꼬리도 잡아 주시고 활동 부탁합니다...꾸~~벅 *^^*
저도 축하드려요 ...글 잘읽었어요..혹 모임이 산행도 괜찮을것같은디..함께하심은^^*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자주 뵐께요 수고하시구요..행복한시간 되세요
싸파이어님.........쌩땍쥐베리......의..야간비행...그리고....멋진,,,,,등산,,이야기.......ㅎㅎㅎㅎㅎ잘보고갑니당..
산은 언제가도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고생끝에 정상을 오르면 성취감에 가슴이 뿌듯하지요 즐감하고 갑니다
아..부러워랑..고생은 하셨겠지만 야밤의 우중산행..넘 값진 추억을 만드셨군요 후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안봐도 비디오.....! 즐겁게 좋은 이들과 비맞으며 신나게 산행하는 님이 보이는 듯 합니다. 건강하세요1